삼영동 내영산마을(영강 7통)
고려말 흑산도 사람들이 들어와 정착했던 마을로 추정되며 영산강 가 안쪽의 안온한 터에 자리잡아 '안영산'또는'냉산'이라 불리우다 내영리로 불리우기도 했다. 40년 후 조선초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직촌화 되었고 당시 영산현의 소재지가 현재삼영동 268번지 이다. 선인들의 구전에 의하면 내영산과 외영산으로 구별했으나 내영산으로 통칭하게 되엇다. 마을 좌측 산록에는 임진왜란 당시에 구국 충절의 위대한 무공을 세운 창의사 김천일 장군의 묘소가 있고 마을 뒤에는 파주염씨 사우인 충경서원이 있다.
삼영동 택촌마을(영강 8통)
약 1,500년전 나주나씨(羅州羅氏) 시조(始祖)의 18세 손인 덕후(德後)공이 이주하여 와서 손자 6형제를 두고 한 마을에 전부 살았다 하여 택촌(宅村)이라 칭하였다. 그 후 택촌(澤村)으로 전용되었다. 조선조 때 김좌근(金左根)의 첩인 나합(羅閤)이 이 곳 출생이다. 택촌마을은 대포리봉에서 새매봉을 거쳐 염창골과 산소골의 분수계를 이루면서 남쪽으로 옛 호남선 철도와 구 국도 1호선 도로를 거쳐 솟아오른 '영산창등'을 기대고 서편에 자리잡고 있다.
안창동 濟倉마을(영강 9통)
1763년 삼남지방에 흉년을 대비하여 양곡을 저장할 창고터를 정할 때 전라우창(全羅右倉)으로 '제민창(濟民倉) 이 설치되었던 마을이다. 대포리에서 서남쪽으로 대월봉을 거쳐 별봉산(169m)으로 솟아오른 산줄기의 남쪽 사면에 영산강을 바라보며 자리잡은 매우 양명한 터이다. 마을 서편에는 미수(眉수) 허목(許穆,1595~1682)을 기려 세운 미천서원이 있다. 서원 안에는 '미천(眉泉)이 유명하다. 350년 수령인 당산목인 느티나무가 동서남북으로 4그루가 있는데 그 중 2그루는 1982년 시 나무로 지정 되었다. 매년 음력 1월10일 18시부터 다음날 5시까지 지신당제와 사당제를 지낸다.
안창동 龍頭, 월호(月湖)마을(영강 10통)
용머리(龍頭)인 양달뜸인 '나씨촌'과 별봉산에서 북서쪽으로 뻗어내린 두 산줄기의 골짜기에 자리잡은 월호인 응달뜸인 '공씨촌'으로 구성된 마을이다. '무재등'이라고 칭한 불난산에서 남쪽으로 힘차게 뻗어내린 산이 호암산이다. 호암산은 우백호를 이루고 있고, 그 형상은 멀리서 보면 옹머리 같다하여 용두마을로 불리운다.
안창동 투주(投珠)마을(영강 10통)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열람』에 용안(龍安)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1917년 1만분의 1 지형도 중 영산포지도에 '용안'이라 표기되어 있다. 그렇지만 언제부터 현재의 투주마을이라 개칭하였는지 알 수 없다.
안창동 방죽안 마을(영강 10통)
일제말엽 저수지 터 급정바위 근처에 마을이 있었는데 수몰되어 현 위치로 옮겨졌다. 껍정바우 또는 급정바우는 저수지 북쪽 배꼽산 기슭에 있는 바위로 춘궁기 때 배꼽산에 올라 다니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창동 전추(前秋)마을(영강 10통)
금성산에서 남서쪽으로 뚜겅봉(339m)에 이르러 두 갈래진 산줄기 사이의 '장골'과 '보현앞골' 물이 남서쪽으로 흘러 내리면서 '수안골' 들에서 남쪽으로 좁은 들의 산기슭에 '대삽뜸','양달뜸','응달뜸'으로 분리되어 마을이 형성되었다. 가뭄이 심할 때 산에서 나는 풀인 '재피(전피,전초)를 먹고 사는 동네로 나주성 밖에서 살다온 사람 들이 들어와 9대 진사가 나왔다는데서 '전추'로 불렸다는 설이 있어서 전추로 칭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