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배의 사계
매화나 벚꽃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은은한 기품을 풍기는 배꽃, 매년 4월 중순 무렵이면 나주는 온통 새하얀 배꽃으로 장관을 연출한다. 예로부터 꽃중의 제일은 배꽃이라 했다. 특히 달밤의 배꽃은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오래전부터 시인 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고려시대 문신 이조년의 시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화(梨花 )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냐만은..." 천상의 누군가가 허공에 뿌린듯 새하얀 축복의 세례. 나주의 봄은 배꽃 덕분에 가장 화사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게 된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취할 새도 잠시, 농부들의 손놀림은 이제부터 바빠진다. 나주배가 잘 자라기 위한 양분이 가장 많이 필요한 시기가 바로 이맘때. 이를 양분 전환기라고 하는데 이때의 노력이 이후 수확기 배 크기까지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배밭의 여름은 땅심과 하늘의 기운을 듬뿍받고 배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시기이다. 이때에 햇빛과 비의 양에 따라 배의 맛과 품질이 결정되는데 유난히 수분을 많이 필요로 하는 나주배. 특히 배나무의 생육이 가장 활발해지는 여름철엔 일조량이 많을 수록, 사이사이 비가 많이 내릴수록 배의 맛과 품질은 더욱 좋아진다. 나주는 강수량이 많고, 성숙기인 한여름은 일조량이 많아 나주배가 자라기에 최적의 기후조건을 갖고있다.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 가을, 한여름 태풍의 위협에서 잘 버텨준 탐스러운 열매들이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농부들이 그간의 수고를 잊고 가슴벅찬 뿌듯함을 느낄때도 바로 이맘때, 하지만 일년 중 소비가 가장 많은 추석을 코앞에 둔터라 어느 때보다 바빠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각 농가에서 실어온 배가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움직이면 선과장에선 꼭지를 잘라내고 무게에 따라 등급을 분류한다. 분류된 배들은 전국 각지의 소비자와 만나게 되는데 귀한 선물용 또는 제수용으로 큰 인기를 모으는 명절의 대표 과일이다.
텅빈듯 고즈넉한 들녘, 한해의 결실을 아낌없이 나눠주고 텅빈채로 휴면기에 들어가는 겨울이 왔다. 나무의 성장은 정지되고 뿌리만이 미미한 활동을 한다. 하지만 이 시기 뿌리에 보온을 잘해줘야 이듬해 봄에 꽃도 잘피고 나무도 잘 자라게 된다. 배수가 나빠 땅이 얼어버리기라도 하면 큰일, 자칫 뿌리마저 얼어죽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나무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된다. 쉬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이듬해를 준비하는 나주배, 내년에도 풍작을 기원하며 땅심을 회복하고 기운을 추스리는 겨울 나주배는 보이지 않은 운동을 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