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리
- 등록일 2020.04.16 17:26
- 조회수 1319
- 등록자 관리자
양천리 (良川里)
본래 나주군 이로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장동리, 시목리, 재등리, 계량리, 영천리, 금동, 호동, 천동을 병합하여 계량과 영천의 이름을 따서 영천리라 하였고 노안면에 편입되었다.
-양천1구 장등(長燈),금동,영천 마을
장등마을 형성의 유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마을사람들은 고가(古家)를 세 차례 헐고 개축하는 등 구조물 변천의 흔적으로 보아 약250여년 전 정착하였던 것으로 한다. 마을의 설기, 정착 후로 조선 현종 6년(1840)에 광산김씨 김유삼이 입향하여 자자 손손 대를 있다가 4세손 김병순, 김병남 등이 1971년 광산군 송정읍으로 이주하였으며 김해김씨김문택이 본래 문평면 신광리 덕산에서 살다가 산수도인(山水道人)의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노안면 양천리 다복골에 이주하여 살다가 화마괴변(火魔傀變) 으로 지금의 장등에 정착하였다. 다음으로 다복골에 살던 김득원의 3형제가 입향 하고, 김상춘의 3형제는 다복골에서 광산구 삼도면 신동으로 이주 후 장등 마을에 입향하였다. 금동마을의 형성 유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838년경 김해김씨 김치원이 광산군 평동면 연동리에 거주하다가 농경지를 따라 이곳에 정착한 후 함평이씨, 평산신씨, 장수황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 하였다.
영천마을의 유래는 250년 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선산의 묘소에 의해 고증된다고 한다. 광산김씨 김정이 일찍 부모를 여의고 농경지와 지세를 보고 이곳으로 이주 살게 되었다. 지명유래는 장등의 등맥이 잠형(蠶形)이고, 장등마을이 위치한 지점이 잠두형(蠶頭形)이며 대명당이라 한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양천제 수리공사로 장등등맥을 끊어 수로를 연결 하였 는데 지형이 배 같아 하여 배형상의 명당이 되었다한다.
금동마을은 금성산 줄기를 배경으로 하여 풍수지리설에 따라 지세가 문무와 충효가 자자손손 유지된다고 하여 금동(錦洞)이라 하였다. 영천마을은 병풍산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길고 길어 태평양을 향하여 계속 흐르듯 장래가 영원토록 성장, 발전한다는 뜻에서 영천(永川)이라 하였다.
-양천2구 계량(桂良) 마을
예전에 한양조씨 조달(趙達)이 전북 김제에서 살다가 부친 조천희 (趙天熙)가 사화(士禍)로 유배(流配)당하자 그 자손들이 각각 흩어졌는데 그 중 조달이 지금의 계량마을에 입주 함평이씨 딸과 혼인 후 정착하였고, 18세기에 호남지역에서는 최초로 천주교가 들어와 현재의 노안천주교가 되었다.
지명유래로는 천동, 음지뜸, 양지편, 검정굴을 합하여 계량마을 이라 하였는데 나주군 도림면 소란, 봉학을 합하여 삼도면 송학 이라 하고, 순봉, 소란, 새터, 화동을 합하여 송계라 하여 나누어 졌다. 이중 소란이 양천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이었다. 마을 앞에 소가 있어 소란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산세로 보아 당초 닭이 계란을 품는 형상이라 하여 계란(鷄卵)이라 불렀 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도 변하여 계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계량(桂良)마을로 호칭되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산 좋고 물 좋은 양천리에 계수나무가 좋은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계량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예전부터 마을 경계를 표시하기 위한 선돌이 4곳에 있었으나 현재 1곳은 매몰 되었다.
본래 나주군 이로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장동리, 시목리, 재등리, 계량리, 영천리, 금동, 호동, 천동을 병합하여 계량과 영천의 이름을 따서 영천리라 하였고 노안면에 편입되었다.
-양천1구 장등(長燈),금동,영천 마을
장등마을 형성의 유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마을사람들은 고가(古家)를 세 차례 헐고 개축하는 등 구조물 변천의 흔적으로 보아 약250여년 전 정착하였던 것으로 한다. 마을의 설기, 정착 후로 조선 현종 6년(1840)에 광산김씨 김유삼이 입향하여 자자 손손 대를 있다가 4세손 김병순, 김병남 등이 1971년 광산군 송정읍으로 이주하였으며 김해김씨김문택이 본래 문평면 신광리 덕산에서 살다가 산수도인(山水道人)의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노안면 양천리 다복골에 이주하여 살다가 화마괴변(火魔傀變) 으로 지금의 장등에 정착하였다. 다음으로 다복골에 살던 김득원의 3형제가 입향 하고, 김상춘의 3형제는 다복골에서 광산구 삼도면 신동으로 이주 후 장등 마을에 입향하였다. 금동마을의 형성 유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838년경 김해김씨 김치원이 광산군 평동면 연동리에 거주하다가 농경지를 따라 이곳에 정착한 후 함평이씨, 평산신씨, 장수황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 하였다.
영천마을의 유래는 250년 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선산의 묘소에 의해 고증된다고 한다. 광산김씨 김정이 일찍 부모를 여의고 농경지와 지세를 보고 이곳으로 이주 살게 되었다. 지명유래는 장등의 등맥이 잠형(蠶形)이고, 장등마을이 위치한 지점이 잠두형(蠶頭形)이며 대명당이라 한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양천제 수리공사로 장등등맥을 끊어 수로를 연결 하였 는데 지형이 배 같아 하여 배형상의 명당이 되었다한다.
금동마을은 금성산 줄기를 배경으로 하여 풍수지리설에 따라 지세가 문무와 충효가 자자손손 유지된다고 하여 금동(錦洞)이라 하였다. 영천마을은 병풍산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길고 길어 태평양을 향하여 계속 흐르듯 장래가 영원토록 성장, 발전한다는 뜻에서 영천(永川)이라 하였다.
-양천2구 계량(桂良) 마을
예전에 한양조씨 조달(趙達)이 전북 김제에서 살다가 부친 조천희 (趙天熙)가 사화(士禍)로 유배(流配)당하자 그 자손들이 각각 흩어졌는데 그 중 조달이 지금의 계량마을에 입주 함평이씨 딸과 혼인 후 정착하였고, 18세기에 호남지역에서는 최초로 천주교가 들어와 현재의 노안천주교가 되었다.
지명유래로는 천동, 음지뜸, 양지편, 검정굴을 합하여 계량마을 이라 하였는데 나주군 도림면 소란, 봉학을 합하여 삼도면 송학 이라 하고, 순봉, 소란, 새터, 화동을 합하여 송계라 하여 나누어 졌다. 이중 소란이 양천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이었다. 마을 앞에 소가 있어 소란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산세로 보아 당초 닭이 계란을 품는 형상이라 하여 계란(鷄卵)이라 불렀 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도 변하여 계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계량(桂良)마을로 호칭되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산 좋고 물 좋은 양천리에 계수나무가 좋은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계량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예전부터 마을 경계를 표시하기 위한 선돌이 4곳에 있었으나 현재 1곳은 매몰 되었다.
- 담당부서 노안면 총무
- 전화 061-339-3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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