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암리
- 날짜
- 202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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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5
- 등록자
- 관리자
광암1리 : 상잉(上仍)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상잉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2㎞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홍주송씨 집성촌으로 마을회관을 기준으로 상잉과 광산마을로 나뉘어 있다. 이 마을을 과거에는 ‘상너뱅이’라 불렸으며, 너뱅이 열두동네 중 한 마을로 칭하기도 하였다. 마을 뒤로는 세풍산이 있고, 인근에 지석묘로 추정되는 바위가 세 군데 4기가 있었는데 이 바위로 인해 ‘너바위(넓은바위)’라 부르기도 하고 ‘광암’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이 밖에 마을 인근 지명으로는 ‘장구배미’와 ‘오강배미’가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동악리 황동마을이 있고, 서쪽으로 광산마을이 있다. 남쪽으로 중잉마을이 있고, 북쪽으로 석전리 천석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35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과 뒤 그리고 고동리 인근에 펼쳐져 있고, 나주호의 물과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공급하고 있다. 상잉과 광산마을을 합하여 논 10㏊, 밭 20㏊가 있는데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이고 대부분의 농가가 일ㆍ이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무ㆍ배추ㆍ고추 등을 주로 재배하고 있는데 5~6년 전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하여 20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송기동이 8년 전에 시작하였고, 복숭아는 15가구가 재배하며 송용화가 20여년 전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몇몇 가구가 하우스를 이용하여 야채를 재배하고 있으며 이밖에 3가구에서 한우 150여두를 사육하고 있다.
교통은 2구에 위치하고 있는 버스정류소에서 나주교통 180번을 이용하여 나주와 광주를 오갈수 있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과거에는 상너뱅이라 불렀으나 일제강점기때 면장을 지낸 송광세가 상잉(上仍)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789년 《호구총수》로 어천면 13개 마을 중 ‘잉읍방리 仍邑方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홍주송씨의 보첩에 ‘잉읍촌 仍邑村’이란 지명이 나타나며 이곳에 묘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잉읍촌은 현재 홍주송씨의 선산이 있는 상잉과 중잉마을 일대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상잉리(上仍里)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호구총수》에서 잉읍방리라는 지명이 상잉리로 변경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14년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촌면 상잉리ㆍ중잉리(仲仍里)ㆍ광석리(廣石里)일부와 병합하여 광암리(廣岩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광암1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에 입향한 홍주송씨(洪州宋氏)는 한성판윤공파(漢城判尹公派)이다. 파조(派祖)는 계(桂)이고, 입향조는 파조의 2세손인 송극녕(宋克寧, 1474~1519)이다. 송극영의 자는 태이(泰爾)이고, 성균관 생원이었는데 내정사로 인하여 충청남도 홍성군 홍주에서 처가인 나주로 낙향하여 상잉(상너뱅이)에 정착하였다. 부인은 나주정씨이고, 묘는 금천면 광암리에 있다. 이후 파조로부터 7세손인 4형제 중 린(璘)은 상잉에, 빈(?)은 중잉으로, 림(琳)은 화순군 능주로, 수(璲)는 동지의금부사인데 무안으로 분가해 나갔다. 이후 손(孫)이 번창하여 현재 마을에는 파조로부터 16세손인 송기백(남, 76세, 제보자)의 일가(一家)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문중관련유적으로는 종가집과 사당 그리고 상경재(尙經齋)가 있고, 1998년 건립한 「사헌송선생유적비 思軒宋先生遺蹟碑」가 있다. 이밖에 문중에서는 음력 10월 15일에 마을 뒤 선산에서 시제를 지내오고 있다. 마을에는 홍주송씨 23, 최씨 2, 임씨 2, 신씨 2, 하동정씨 1, 윤씨 1, 홍씨 1, 기타 3호 등 총 3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양력 12월 3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의 결산과 마을 사업 토론 그리고 마을 임원을 선출한다. 위친계는 1945년 조직하였는데, 35가구가 가입되어 애경사 시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70년께 조직되었으며 30여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기는 1972년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2대 있었으며,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가구, 기름보일러 33가구, 심야전기보일러 1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1동 99㎡으로 2001년 건립하여 경로당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광암1리 : 광산(廣山)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광산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2㎞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회관을 기준으로 상잉과 광산마을로 나뉘어 있다. 동쪽으로 상잉마을이 있고, 서쪽으로 고동리가 있으며 남쪽으로 중잉마을이 있고, 북쪽으로 석전리 천석마을이있다. 마을에는 32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과 뒤 그리고 고동리 인근에 펼쳐져 있고, 나주호의 물과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관개하고 있다.
상잉과 광산마을에 논 10㏊, 밭 20㏊가 있는데 농경지 토양이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ㆍ이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무ㆍ배추ㆍ고추 등을 주로 재배하고 있는데 5~6년 전부터 많은 밭이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되어 배를 재배하고 있다. 이밖에 몇몇 가구에서 하우스를 이용하여 야채를 재배하고 있다. 배를 재배하고 있는 농가는 7가구로 송흥수가 8년 전에 시작하였고 복숭아는 4가구가 재배하며 송흥수가 20여년 전에 시작하였으며 이밖에 1가구가 포도를 2001년부터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좋은 편으로 나주교통 180번을 이용하여 나주와 광주를 왕래하고 있으며,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이밖에 마을 인근 속칭 ‘바우백이’라는 곳에 2기의 지석묘가 있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 1993년에 세운 「송공유허비 宋公遺墟碑」가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무제산 밑에 있는 넓은 마을이라 하여 ‘너뱅이’라고 하였으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광산(廣山)이라 하였다. 마을의 이름은 1789년 《호구총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4년의 행정구역개편 등에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본 마을은 과거에 상잉마을에 속한 자연마을로 편성되어 있다가 그후 행정구역상 광암1리 2반으로 편제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은 과거 상잉마을과 한 마을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에 마을에 처음 입향한 성씨는 홍주송씨이다. 그러나 홍주송씨에 대해서는 상잉마을을 통해 살펴보았기 때문에 여기는 제일 많이 거주하고 있는 광산김씨 입향 내력을 살펴보고자 한다.
마을에 입향한 광산김씨는 경력공파(經歷公派)이다. 입향조는 시조로부터 28세손인 곤걸(坤傑, 1614~1669)이다. 그의 자는 인보(仁甫)이고, 부인은 김해김씨, 묘는 금천면 고안리에 있다. 이후 손(孫)이 번창하여 현재 마을에는 시조로부터 41세손인 김인만(남, 73세, 제보자)을 비롯하여 18가구가 일가(一家)를 이루며 살고 있다. 문중관련 유적으로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금양재(錦陽齋)가 있다. 이밖에 개인이 건립한 「암은거사광산김공관수공적비 巖隱居士光山金公寬洙功績碑」와 「모원광산김공은수기적비 慕園光山金公殷洙紀績碑」 그리고 「유인진주강씨효행비 孺人晉州姜氏孝行碑」가 있다. 현재 마을에는 광산김씨 18, 김해김씨 4, 홍주송씨 4, 강씨 2, 오씨 1, 박씨 1, 최씨 1, 하씨 1호 등 총 32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와 부녀회는 상잉마을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위친계는 40여년 전에 조직하였으며, 32가구가 가입되어 애경사 시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기는 1972년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32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 LPG를 사용하고 있다.
광암2리 : 중잉(仲仍)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중잉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2.2㎞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홍주송씨 집성촌이다. 과거에는 ‘중너뱅이’라 불렸으며, 너뱅이 열두동네 중 한 마을이다. 마을 동쪽으로 동악리가 있고, 서쪽으로 광석마을이 있다. 남쪽으로는 안석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상잉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40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에 펼쳐져 있고, 나주호의 물과 30여 개의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마을에는 2구 전체적으로 논 40㏊, 밭 20㏊가 있다.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ㆍ이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무ㆍ배추ㆍ고추ㆍ수박 등을 주로 재배하고 있는데 10여년 전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하여 10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으며 송수용이 30년 전에 시작하였고, 복숭아는 2가구가 30여년 전부터 재배해 오고 있다. 교통은 좋은 편으로 마을 인근 버스정류소에서 나주교통 180번을 이용하여 나주와 광주를 오가고 있으며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마을 뒤편 홍주송씨 선산에는 은행정사(銀杏亭祠)로 추정되는 묘각이 있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의 맞배지붕 골기와 건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건립연대는 미상이나 5~60년 전에 초창 또는 개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1999년 무너져 버렸다. 사(祠)의 이름은 확실치 않으나 은행정 신평(新平) 송빈(宋?)의 묘각으로 추정된다. 현재 건물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소나무와 은행나무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밖에 이정룡(李政龍, 남, 76세ㆍ전 중학교장)집에는 1933년 건립된 모선당(慕先堂, 사당)과 1931년 건립된 양정당(養精堂, 초당)이 있고, 그의 선친 이기원(李基元)이 남긴 《농은실록 農隱實錄》 20권이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과거에는 ‘중너뱅이’라 불렸으나 일제강점기 때 면장을 지낸 송광세가 ‘중잉(仲仍)’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헌상 마을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789년 《호구총수》로 어천면 13개 마을 중 ‘잉읍방리 仍邑方里’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홍주송씨의 보첩에 ‘잉읍촌 仍邑村’이란 지명이 나타나며 이곳에 묘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잉읍촌은 현재 홍주송씨의 선산이 있는 상잉과 중잉마을 일대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중잉리(仲仍里)라는 지명이 보이고,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촌면 상잉리(上仍里)ㆍ중잉리ㆍ광석리(廣石里)일부와 병합하여 광암리(廣岩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광암2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은 홍주송씨 한성판윤공파(파조 桂) 자손들이 일가를 이루며 살고 있다. 입향조는 파조로부터 7세손인 빈(?)이다. 빈(1625~1649)의 자는 미중(美仲)이고 호는 은행(銀杏)이며 부인은 영광정씨이고 묘는 금천면 광암리에 있다. 이밖에 빈은 상잉마을에 입향한 파조로부터 2세손인 송극녕(宋克寧, 1474~1519)의 후손이기도 하다. 이후 자손이 번창하여 현재 마을에는 파조로부터 16세손과 17세손이 일가(一家)를 이루며 살고 있다. 문중에서는 음력 10월 15일에 상잉마을 뒤에 위치하고 있는 선산에서 시제를 지내고 있다. 현재 마을에는 홍주송씨 28, 최씨 10, 완산이씨 2 등 총 4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양력 12월3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토론 그리고 마을임원을 선출한다. 위친계는 30여년 전에 조직되었으며, 40가구가 애경사 시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부녀회는 2리 전체적으로 1970년께 조직되었으며 30여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을 다지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40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 LPG를 사용하고 있다.
광암2리 : 광석(廣石)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광석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2.2㎞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 금천-봉황간, 금천-영산포간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마을 동쪽으로 중잉마을이 있고, 서쪽으로 안석마을이 있다. 남쪽으로 신천리가 있고, 북쪽으로 광산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20가구, 6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에 펼쳐져 있고, 나주호의 물과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마을 전체적으로 논 40㏊, 밭 20㏊가 있는데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다. 밭에서는 무ㆍ배추ㆍ고추ㆍ수박 등을 주로 재배하고 있다. 10여년 전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하여 2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고, 1가구가 포도를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좋은 편으로 마을 앞 버스정류소에서 나주교통 180번을 이용하여 나주와 광주를 왕래하고 있고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이밖에 공공기관으로는 금천농협 남부지소와 판매장, 농기구센타, 양곡창고, 주유소가 위치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에 넓은 바위가 있어 ‘바우벡이’라 불렀으나 한자 표기 상 광석(廣石)으로 개칭하였다. 문헌상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여기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광석리(廣石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촌면 상잉리(上仍里)ㆍ중잉리(仲仍里)ㆍ광석리 일부와 병합하여 광암리(廣岩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광암리 2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에 입향한 성씨는 김해김씨(金海金氏) 해사공파(海史公派)이다. 파조이자 마을 입향조는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으로부터 58세손인 치서(致瑞, 1572~?)인데 호는 해사(海史)이고 전라북도 남원에서 왔으며 부인은 밀양박씨이다. 묘는 금천면 광암리에 있으며, 현재 마을에는 파조로부터 14세손까지 살고 있다. 마을에는 김씨 15, 최씨 4, 문씨 1호 등 총 20가구가 거주한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와 부녀회는 2리 전체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위친계는 30여년 전에 조직되었으며, 20가구가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20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에는 슈퍼 1, 건강원 1, 농기계센터 1개소가 있으며 마을회관은 1동 66㎡으로 20년 전에 건립하였던 건물을 헐고 2001년 다시 지었다.
광암2리 : 안석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안석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2.2㎞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 금천-봉황간, 금천-영산포간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동쪽으로 광석마을이 있고, 서남쪽으로 신천리가 있으며 북쪽으로는 고동리가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는 18가구, 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에 펼쳐져 있고, 나주호의 물과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2리 전체적으로 논 40㏊, 밭 20㏊가 있고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 농가가 1~2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무ㆍ배추ㆍ고추ㆍ수박 등을 주로 재배하고 있는데 10여년 전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하여 6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좋은 편으로 마을 앞 버스정류소에서 나주교통 180번을 이용하여 나주와 광주를 왕래하고 있고,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이밖에 광암교회가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고동3리 석동마을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안석이라 하였다. 지명은 1789년 《호구총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 마을은 과거에 중잉과 광석마을에 속한 자연마을로 편성되어 있다가 이후 행정구역상 광암리 2구 3반으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입향성씨는 김해김씨(金海金氏) 해사공파(海史公派)로 파조이면서 마을 입향조는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으로부터 58세손인 치서(致瑞)이다(2반 광석마을과 같음). 마을에는 현재 파조인 치서로부터 14세손이 거주하고 있다. 김씨 14, 최씨 3, 이씨 1호 등 총 18가구가 이 마을에 살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와 부녀회는 2리 전체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위친계는 20여년 전에 조직하였으며, 18가구가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18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 안에는 슈퍼 2, 그릇공장 1개소가 있다.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상잉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2㎞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홍주송씨 집성촌으로 마을회관을 기준으로 상잉과 광산마을로 나뉘어 있다. 이 마을을 과거에는 ‘상너뱅이’라 불렸으며, 너뱅이 열두동네 중 한 마을로 칭하기도 하였다. 마을 뒤로는 세풍산이 있고, 인근에 지석묘로 추정되는 바위가 세 군데 4기가 있었는데 이 바위로 인해 ‘너바위(넓은바위)’라 부르기도 하고 ‘광암’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이 밖에 마을 인근 지명으로는 ‘장구배미’와 ‘오강배미’가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동악리 황동마을이 있고, 서쪽으로 광산마을이 있다. 남쪽으로 중잉마을이 있고, 북쪽으로 석전리 천석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35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과 뒤 그리고 고동리 인근에 펼쳐져 있고, 나주호의 물과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공급하고 있다. 상잉과 광산마을을 합하여 논 10㏊, 밭 20㏊가 있는데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이고 대부분의 농가가 일ㆍ이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무ㆍ배추ㆍ고추 등을 주로 재배하고 있는데 5~6년 전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하여 20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송기동이 8년 전에 시작하였고, 복숭아는 15가구가 재배하며 송용화가 20여년 전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몇몇 가구가 하우스를 이용하여 야채를 재배하고 있으며 이밖에 3가구에서 한우 150여두를 사육하고 있다.
교통은 2구에 위치하고 있는 버스정류소에서 나주교통 180번을 이용하여 나주와 광주를 오갈수 있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과거에는 상너뱅이라 불렀으나 일제강점기때 면장을 지낸 송광세가 상잉(上仍)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789년 《호구총수》로 어천면 13개 마을 중 ‘잉읍방리 仍邑方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홍주송씨의 보첩에 ‘잉읍촌 仍邑村’이란 지명이 나타나며 이곳에 묘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잉읍촌은 현재 홍주송씨의 선산이 있는 상잉과 중잉마을 일대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상잉리(上仍里)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호구총수》에서 잉읍방리라는 지명이 상잉리로 변경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14년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촌면 상잉리ㆍ중잉리(仲仍里)ㆍ광석리(廣石里)일부와 병합하여 광암리(廣岩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광암1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에 입향한 홍주송씨(洪州宋氏)는 한성판윤공파(漢城判尹公派)이다. 파조(派祖)는 계(桂)이고, 입향조는 파조의 2세손인 송극녕(宋克寧, 1474~1519)이다. 송극영의 자는 태이(泰爾)이고, 성균관 생원이었는데 내정사로 인하여 충청남도 홍성군 홍주에서 처가인 나주로 낙향하여 상잉(상너뱅이)에 정착하였다. 부인은 나주정씨이고, 묘는 금천면 광암리에 있다. 이후 파조로부터 7세손인 4형제 중 린(璘)은 상잉에, 빈(?)은 중잉으로, 림(琳)은 화순군 능주로, 수(璲)는 동지의금부사인데 무안으로 분가해 나갔다. 이후 손(孫)이 번창하여 현재 마을에는 파조로부터 16세손인 송기백(남, 76세, 제보자)의 일가(一家)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문중관련유적으로는 종가집과 사당 그리고 상경재(尙經齋)가 있고, 1998년 건립한 「사헌송선생유적비 思軒宋先生遺蹟碑」가 있다. 이밖에 문중에서는 음력 10월 15일에 마을 뒤 선산에서 시제를 지내오고 있다. 마을에는 홍주송씨 23, 최씨 2, 임씨 2, 신씨 2, 하동정씨 1, 윤씨 1, 홍씨 1, 기타 3호 등 총 3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양력 12월 3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의 결산과 마을 사업 토론 그리고 마을 임원을 선출한다. 위친계는 1945년 조직하였는데, 35가구가 가입되어 애경사 시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70년께 조직되었으며 30여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기는 1972년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2대 있었으며,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가구, 기름보일러 33가구, 심야전기보일러 1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1동 99㎡으로 2001년 건립하여 경로당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광암1리 : 광산(廣山)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광산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2㎞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회관을 기준으로 상잉과 광산마을로 나뉘어 있다. 동쪽으로 상잉마을이 있고, 서쪽으로 고동리가 있으며 남쪽으로 중잉마을이 있고, 북쪽으로 석전리 천석마을이있다. 마을에는 32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과 뒤 그리고 고동리 인근에 펼쳐져 있고, 나주호의 물과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관개하고 있다.
상잉과 광산마을에 논 10㏊, 밭 20㏊가 있는데 농경지 토양이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ㆍ이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무ㆍ배추ㆍ고추 등을 주로 재배하고 있는데 5~6년 전부터 많은 밭이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되어 배를 재배하고 있다. 이밖에 몇몇 가구에서 하우스를 이용하여 야채를 재배하고 있다. 배를 재배하고 있는 농가는 7가구로 송흥수가 8년 전에 시작하였고 복숭아는 4가구가 재배하며 송흥수가 20여년 전에 시작하였으며 이밖에 1가구가 포도를 2001년부터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좋은 편으로 나주교통 180번을 이용하여 나주와 광주를 왕래하고 있으며,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이밖에 마을 인근 속칭 ‘바우백이’라는 곳에 2기의 지석묘가 있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 1993년에 세운 「송공유허비 宋公遺墟碑」가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무제산 밑에 있는 넓은 마을이라 하여 ‘너뱅이’라고 하였으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광산(廣山)이라 하였다. 마을의 이름은 1789년 《호구총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4년의 행정구역개편 등에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본 마을은 과거에 상잉마을에 속한 자연마을로 편성되어 있다가 그후 행정구역상 광암1리 2반으로 편제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은 과거 상잉마을과 한 마을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에 마을에 처음 입향한 성씨는 홍주송씨이다. 그러나 홍주송씨에 대해서는 상잉마을을 통해 살펴보았기 때문에 여기는 제일 많이 거주하고 있는 광산김씨 입향 내력을 살펴보고자 한다.
마을에 입향한 광산김씨는 경력공파(經歷公派)이다. 입향조는 시조로부터 28세손인 곤걸(坤傑, 1614~1669)이다. 그의 자는 인보(仁甫)이고, 부인은 김해김씨, 묘는 금천면 고안리에 있다. 이후 손(孫)이 번창하여 현재 마을에는 시조로부터 41세손인 김인만(남, 73세, 제보자)을 비롯하여 18가구가 일가(一家)를 이루며 살고 있다. 문중관련 유적으로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금양재(錦陽齋)가 있다. 이밖에 개인이 건립한 「암은거사광산김공관수공적비 巖隱居士光山金公寬洙功績碑」와 「모원광산김공은수기적비 慕園光山金公殷洙紀績碑」 그리고 「유인진주강씨효행비 孺人晉州姜氏孝行碑」가 있다. 현재 마을에는 광산김씨 18, 김해김씨 4, 홍주송씨 4, 강씨 2, 오씨 1, 박씨 1, 최씨 1, 하씨 1호 등 총 32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와 부녀회는 상잉마을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위친계는 40여년 전에 조직하였으며, 32가구가 가입되어 애경사 시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기는 1972년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32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 LPG를 사용하고 있다.
광암2리 : 중잉(仲仍)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중잉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2.2㎞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홍주송씨 집성촌이다. 과거에는 ‘중너뱅이’라 불렸으며, 너뱅이 열두동네 중 한 마을이다. 마을 동쪽으로 동악리가 있고, 서쪽으로 광석마을이 있다. 남쪽으로는 안석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상잉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40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에 펼쳐져 있고, 나주호의 물과 30여 개의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마을에는 2구 전체적으로 논 40㏊, 밭 20㏊가 있다.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ㆍ이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무ㆍ배추ㆍ고추ㆍ수박 등을 주로 재배하고 있는데 10여년 전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하여 10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으며 송수용이 30년 전에 시작하였고, 복숭아는 2가구가 30여년 전부터 재배해 오고 있다. 교통은 좋은 편으로 마을 인근 버스정류소에서 나주교통 180번을 이용하여 나주와 광주를 오가고 있으며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마을 뒤편 홍주송씨 선산에는 은행정사(銀杏亭祠)로 추정되는 묘각이 있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의 맞배지붕 골기와 건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건립연대는 미상이나 5~60년 전에 초창 또는 개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1999년 무너져 버렸다. 사(祠)의 이름은 확실치 않으나 은행정 신평(新平) 송빈(宋?)의 묘각으로 추정된다. 현재 건물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소나무와 은행나무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밖에 이정룡(李政龍, 남, 76세ㆍ전 중학교장)집에는 1933년 건립된 모선당(慕先堂, 사당)과 1931년 건립된 양정당(養精堂, 초당)이 있고, 그의 선친 이기원(李基元)이 남긴 《농은실록 農隱實錄》 20권이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과거에는 ‘중너뱅이’라 불렸으나 일제강점기 때 면장을 지낸 송광세가 ‘중잉(仲仍)’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헌상 마을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789년 《호구총수》로 어천면 13개 마을 중 ‘잉읍방리 仍邑方里’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홍주송씨의 보첩에 ‘잉읍촌 仍邑村’이란 지명이 나타나며 이곳에 묘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잉읍촌은 현재 홍주송씨의 선산이 있는 상잉과 중잉마을 일대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중잉리(仲仍里)라는 지명이 보이고,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촌면 상잉리(上仍里)ㆍ중잉리ㆍ광석리(廣石里)일부와 병합하여 광암리(廣岩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광암2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은 홍주송씨 한성판윤공파(파조 桂) 자손들이 일가를 이루며 살고 있다. 입향조는 파조로부터 7세손인 빈(?)이다. 빈(1625~1649)의 자는 미중(美仲)이고 호는 은행(銀杏)이며 부인은 영광정씨이고 묘는 금천면 광암리에 있다. 이밖에 빈은 상잉마을에 입향한 파조로부터 2세손인 송극녕(宋克寧, 1474~1519)의 후손이기도 하다. 이후 자손이 번창하여 현재 마을에는 파조로부터 16세손과 17세손이 일가(一家)를 이루며 살고 있다. 문중에서는 음력 10월 15일에 상잉마을 뒤에 위치하고 있는 선산에서 시제를 지내고 있다. 현재 마을에는 홍주송씨 28, 최씨 10, 완산이씨 2 등 총 4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양력 12월3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토론 그리고 마을임원을 선출한다. 위친계는 30여년 전에 조직되었으며, 40가구가 애경사 시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부녀회는 2리 전체적으로 1970년께 조직되었으며 30여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을 다지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40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 LPG를 사용하고 있다.
광암2리 : 광석(廣石)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광석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2.2㎞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 금천-봉황간, 금천-영산포간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마을 동쪽으로 중잉마을이 있고, 서쪽으로 안석마을이 있다. 남쪽으로 신천리가 있고, 북쪽으로 광산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20가구, 6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에 펼쳐져 있고, 나주호의 물과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마을 전체적으로 논 40㏊, 밭 20㏊가 있는데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다. 밭에서는 무ㆍ배추ㆍ고추ㆍ수박 등을 주로 재배하고 있다. 10여년 전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하여 2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고, 1가구가 포도를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좋은 편으로 마을 앞 버스정류소에서 나주교통 180번을 이용하여 나주와 광주를 왕래하고 있고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이밖에 공공기관으로는 금천농협 남부지소와 판매장, 농기구센타, 양곡창고, 주유소가 위치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에 넓은 바위가 있어 ‘바우벡이’라 불렀으나 한자 표기 상 광석(廣石)으로 개칭하였다. 문헌상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여기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광석리(廣石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촌면 상잉리(上仍里)ㆍ중잉리(仲仍里)ㆍ광석리 일부와 병합하여 광암리(廣岩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광암리 2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에 입향한 성씨는 김해김씨(金海金氏) 해사공파(海史公派)이다. 파조이자 마을 입향조는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으로부터 58세손인 치서(致瑞, 1572~?)인데 호는 해사(海史)이고 전라북도 남원에서 왔으며 부인은 밀양박씨이다. 묘는 금천면 광암리에 있으며, 현재 마을에는 파조로부터 14세손까지 살고 있다. 마을에는 김씨 15, 최씨 4, 문씨 1호 등 총 20가구가 거주한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와 부녀회는 2리 전체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위친계는 30여년 전에 조직되었으며, 20가구가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20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에는 슈퍼 1, 건강원 1, 농기계센터 1개소가 있으며 마을회관은 1동 66㎡으로 20년 전에 건립하였던 건물을 헐고 2001년 다시 지었다.
광암2리 : 안석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안석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2.2㎞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 금천-봉황간, 금천-영산포간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동쪽으로 광석마을이 있고, 서남쪽으로 신천리가 있으며 북쪽으로는 고동리가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는 18가구, 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에 펼쳐져 있고, 나주호의 물과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2리 전체적으로 논 40㏊, 밭 20㏊가 있고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 농가가 1~2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무ㆍ배추ㆍ고추ㆍ수박 등을 주로 재배하고 있는데 10여년 전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하여 6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좋은 편으로 마을 앞 버스정류소에서 나주교통 180번을 이용하여 나주와 광주를 왕래하고 있고,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이밖에 광암교회가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고동3리 석동마을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안석이라 하였다. 지명은 1789년 《호구총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 마을은 과거에 중잉과 광석마을에 속한 자연마을로 편성되어 있다가 이후 행정구역상 광암리 2구 3반으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입향성씨는 김해김씨(金海金氏) 해사공파(海史公派)로 파조이면서 마을 입향조는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으로부터 58세손인 치서(致瑞)이다(2반 광석마을과 같음). 마을에는 현재 파조인 치서로부터 14세손이 거주하고 있다. 김씨 14, 최씨 3, 이씨 1호 등 총 18가구가 이 마을에 살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와 부녀회는 2리 전체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위친계는 20여년 전에 조직하였으며, 18가구가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18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 안에는 슈퍼 2, 그릇공장 1개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