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리
- 날짜
- 202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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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3
- 등록자
- 관리자
신천1리 : 농소(農所)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농소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3.5㎞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주위에 농경지와 과수원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본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구)금천남초등학교 인근에 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동악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구내마을이 있다. 남쪽으로는 방축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광암리가 있다. 마을에는 28가구, 6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보리 그리고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 방목들에 펼쳐져 있으며, 나주호와 영산강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농소와 구내마을을 합하여 논 35㏊, 밭 10㏊가 있고 농경지 토양은 양질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가가 이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채소를 재배하고 있는데 1990년께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하여 사용하는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배를 11가구가 재배하고 있는데 송동수가 20여년 전에 시작하였고 5년 전부터 3가구가 복숭아를, 2가구가 포도를 재배하고 있다. 이밖에 1가구가 양봉으로 아카시아와 유채꿀을 채취하고 있다.
교통은 매시간 운행되고 있는 광주-봉황간 버스를 이용하고,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마을 안에 있는 문화유적은 삼왕묘(三王廟)와 지선당(至善堂)이 있다. 삼왕묘는 단층의 팔작 골기와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이다. 김해김씨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을 비롯, 양왕(讓王), 흥무왕(興武王)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1933년 건립하였으나 6.25로 인해 피폐된 것을 1967년과 1977년에 개축하였다. 지선당은 삼왕묘의 부속건물인데 단층 팔작 골기와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4칸의 제실로서 김해김씨의 종친회소로도 쓰이며 화수정이라고도 부른다. 1933년 건립하였고 1983년 중수하였다. 아울러 삼왕묘 주위에는 1984년에 세운〈정석김대현공적비 淨石金大鉉功績碑〉와 1977년에 세운「월강김용두공적비 月岡金聳斗功績碑」, 「삼왕묘연혁비 三王廟沿革碑」ㆍ「삼왕묘중수비 三王廟重修碑」가 있다. 삼왕묘와 지선당은 김해김씨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본 마을에 거주하게 된 사연은 이곳이 ‘왕 터’라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건립하게 되었다. 이밖에 2002년 음력 1월 14일까지 마을에서는 당산제를 지냈으나 2002년 8월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당산나무가 고사되어 앞으로 당산제의 진행 여부는 불투명하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 앞의 논이 옥답으로 농사짓기 좋은 곳이라 하여 농소라 하였다.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789년 《호구총수》로 어천면(魚川面)의 13개 마을 중 한 마을로 ‘농소촌 農所村’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그 후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어천면 31개 마을 중 ‘농소리 農所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신방리(新防里)ㆍ농소리ㆍ구천리(九川里)ㆍ황동리(黃洞里)ㆍ방축리(防丑里)ㆍ어전리(於田里)ㆍ광석리(廣石里)와 병합하여 신천리(新川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1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입향조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다. 다만 해남윤씨ㆍ김해김씨가 입향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두 집안의 보첩을 통해 입향조의 입향 내력을 파악할 수 없었다. 마을에는 김해김씨 8, 밀양박씨 4, 김해허씨 4, 광산김씨 2, 전주이씨 2, 송씨ㆍ한씨ㆍ남씨ㆍ배씨ㆍ임씨ㆍ나씨ㆍ윤씨ㆍ최씨 등 각 1호 총 2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양력 12월 3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사업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 등을 한다. 위친계는 30여년 전에 조직되었으며 애경사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고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하여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75년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5가구, 기름보일러 23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은 (구)금천남초등학교 인근에서 2가구가 구멍가게를 운영하였다. 마을 농기계보관창고는 99㎡으로 1998년 건립하였고 마을회관은 1동 89㎡으로 2001년 건립하였으며 노인정과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이밖에 본 마을 인근에 주막거리가 있었다. 이 주막은 산포ㆍ남평ㆍ대촌지역 사람들이 영산포장을 가는 길에 들렀던 곳이다.
신천1리 : 구내(龜內)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구내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3.5㎞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주위로 농경지와 과수원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농소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고동리가 있다. 남쪽으로는 방축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광암리가 있다. 마을에는 16가구, 4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보리 그리고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 방목들에 펼쳐져 있으며, 나주호와 영산강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농소와 구내마을을 합하여 논 35㏊, 밭 10㏊가 있고 농경지 토양은 양질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이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채소를 재배하고 있는데 1990년께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하여 사용하는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현재 6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박종태(남, 62세)가 15년 전에 처음 시작하였다. 교통은 매시간 운행되고 있는 광주-봉황간 버스를 이용하고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 뒷산의 지형이 거북형이며 지금은 배수시설이 잘 되어 있으나 과거에는 비가 조금만 내려도 홍수가 되어 거북이는 물을 떠나 살 수 없다하여 구내라 하였다. 문헌상 마을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구천리(九川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신방리(新防里)ㆍ농소리(農所里)ㆍ구천리(九川里)ㆍ황동리(黃洞里)ㆍ방축리(防丑里)ㆍ어전리(於田里)ㆍ광석리(廣石里)와 병합하여 신천리(新川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신천1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150여년 전 밀양박씨 윤신이 입향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현재 마을에는 밀양박씨 6가구가 거주하고 있지만 윤신의 후손이 아닌 관계로 보첩을 통한 입향조의 내력은 파악할 수 없다. 마을에는 밀양박씨 6, 김해김씨 5, 이씨 2, 안씨 1, 조씨 1, 한씨 1호 등 총 16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와 위친계 그리고 부녀회는 농소마을과 함께 조직되어 운영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3가구, 기름보일러 11가구, 심야전기보일러 2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은 1가구가 건강원을 운영하고 있다.
신천2리 : 방축(防丑)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방축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3.8㎞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관정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금천면과 영산동을 연결하는 지방도로가 나 있고, 49호선 나주시 외곽도로가 시공 중에 있다. 마을 뒤로는 ‘금장들’이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신방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어전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관정동이 있고, 북쪽으로는 농소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20가구, 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주로 마을 뒤 금장들에 펼쳐져 있고, 신천제와 나주호의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방축과 신방마을을 합하여 논 4㏊, 밭 3.5㏊가 있고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수박ㆍ무ㆍ배추를 재배하고 있으나 1990년대 초반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하여 5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며 이중 박동섭이 10년 전에 시작하였다. 이밖에 나주에 살고 있는 외지인이 마을에 하우스 4~5동을 설치하여 국화를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나주-영산포 방면 버스가 1일 4~5회 마을 앞을 경유한다. 이 버스는 10여년 전부터 운행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이전에는 걸어다녀야 했다. 생필품 구입은 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전언에 의하면 마을이 소형국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을 지명의 표기가 과거에는 방축(方築)이었으나 1910년대에 이르러 방축(防丑)으로 바뀌었다. 문헌상 마을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789년 《호구총수》로 어천면(魚川面)의 13개 마을 중 한 마을로 ‘방축동리 方築洞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조선시대 한 개의 행정마을로써 행정편제가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어천면 31개 마을 중 방축리(防丑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호구총수》에서 보이던 방축(方築)이 1900년대에 이르러 방축(防丑)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신방리(新防里)ㆍ농소리(農所里)ㆍ구천리(九川里)ㆍ황동리(黃洞里)ㆍ방축리ㆍ어전리(於田里)ㆍ광석리(廣石里)와 병합하여 신천리(新川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신천리 2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과거 백씨와 오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으며 그 증거로 인근에 그들의 묘가 있다고 한다. 이후 밀양박씨가 입향하였는데, 규정공파 내 청재공파(淸齋公派)이다. 파조는 청재공 심문(審問)으로 시조로부터 46세손이다. 입향조는 파조로부터 12세손인 태인(泰仁, 1644~1716)으로, 그의 자는 인후(仁?), 호는 취암(翠菴)이며 부인은 함풍이씨이고 묘는 삼포면 화지리에 있다. 마을 안 문중유적으로는 파조로부터 15세손인 필운(弼運)의 효행을 기린 효자각과 비가 있다. 마을에는 밀양박씨 9, 김씨 5, 양씨 3, 장씨 1, 강씨 1, 고씨 1호 등 총 2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양력 12월 30일에 개최한다. 총회는 1반과 2반이 각각 별도로 개최하는데 본 마을의 경우 반장이 주관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의 현안 등을 협의한다. 이밖에 2구 전체 총회는 영농자금 배정과 마을사업 등을 토론할 때 이장이 임시로 개최한다. 동계는 10여년 전에 조직되었으며 전 가구가 어려울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농업협동조합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10여명이 가입되어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1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16가구, 심야전기 4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은 구멍가게가 1개소, 차량정비소가 1개소 있다. 마을 농기계보관창고는 165㎡으로 1998년 건립되었고 동각(우산각)은 1990년 초에 건립되었다. 이밖에 마을에는 과거 사용하였던 돌다리의 괴임돌과 상판이 보존되어 있다.
신천3리 : 어전(於田)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어전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4㎞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산동ㆍ관정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신천들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나주시청이 바라보인다. 그리고 마을 뒤로는 ‘금장들’이 있다. 동쪽으로는 방축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부덕동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평산동이 있고, 북쪽으로는 농소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20가구, 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보리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뒤로 펼쳐져 있고, 신천제와 나주호의 물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논 3㏊, 밭 1.5㏊가 있는데 토양은 양질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다. 대부분의 농가가 이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대부분 가용으로 사용할 채소를 재배하고 있다. 30~40년 전부터 밭을 논으로 용도 변경하는 추세이다. 마을에서는 2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서병태가 20여년 전에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교통은 광주-영산포간 1일 4회 버스가 운행되고 있는데, 이웃하고 있는 평산동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기 때문에 불편한 편이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과거에는 배가 마을 앞에 닿았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의 지명은 옛날 마을이 갈대밭으로 되어 있었다 하여 어전(於田)이라 하였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어전리 於田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신방리(新防里)ㆍ농소리(農所里)ㆍ구천리(九川里)ㆍ황동리(黃洞里)ㆍ방축리(防丑里)ㆍ어전리ㆍ광석리(廣石里)와 병합하여 신천리(新川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신천3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은 갈대밭을 일구어 정착하기 위하여 한씨가 처음으로 입향하였으며 이후 여러 성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현재 박씨 5, 서씨 4, 김씨 3, 강씨 2, 이씨ㆍ홍씨ㆍ유씨ㆍ노씨ㆍ황씨ㆍ한씨 등 각1호 총 2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2월 26일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의 결산과 사업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 등을 한다. 마을 내 남아있는 조직은 없으며, 다만 부녀회만이 농협협동조합과 관련되어 활동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75년 12월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2가구, 기름보일러 18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 공동창고는 1동(231㎡)으로 창고 겸 마을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동각(우산각)은 1940년대 후반에 건립되었다. 이 마을은 과거에 침수피해를 많이 입었으나 마을 앞을 흐르는 영산천(봉황천)의 제방을 막은 이후부터 이러한 피해는 없어졌다.
신천4리 : 신방(新防)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신방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4㎞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 금천면과 영산동을 연결하는 지방도로가 나 있고, 국가지원지방도 49호선이 지나고 있다. 마을 동쪽으로는 야죽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방축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죽촌리 상촌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농소마을과 동악리 춘정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40가구, 9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주로 마을 앞과 금장들에 펼쳐져 있고, 신천제와 나주호의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방축과 신방마을을 합하여 논 4㏊, 밭 3.5㏊가 있고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수박ㆍ무ㆍ배추를 재배하고 있고 10여 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다. 김용태가 15년 전에 시작하였다. 이밖에 1가구가 3년 전부터 복숭아를 재배해 오고 있다. 교통은 나주-영산포 방면 버스가 1일 4~5회 마을 정류장을 경유한다. 이 버스는 10여년 전부터 운행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이전에는 걸어다녀야 하였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학 형국이며, 방축마을에서 분리되었다 하여 신방(新防)이라 한다. 문헌상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신방리(新防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신방리ㆍ농소리(農所里)ㆍ구천리(九川里)ㆍ황동리(黃洞里)ㆍ방축리(防丑里)ㆍ어전리(於田里)ㆍ광석리(廣石里)와 병합하여 신천리(新川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신천2리로 편제되었다가 2011년 4리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창녕조씨가 처음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창녕조씨 집안에 대해 아는 이가 없다. 이후 밀양박씨 규정공파가 정착하였다. 입향조는 시조로부터 60세손인 수해(守海, 1670~?)인데 자는 양서(良瑞), 호는 남호(南湖)이다. 부인은 김해김씨이고 묘는 금천면 어전리에 있다. 이후 후손이 번창하여 지금 시조로부터 70세손인 박홍주와 일가(一家)가 마을에 살고 있다. 문중관련 유적으로는 입향조를 모시는 제각 1동과 1994년에 세운 「밀양박공수해선생유적비 密陽朴公守海先生遺蹟碑」가 제각 앞에 있다. 마을에는 밀양박씨 25, 노씨 7, 김씨 3, 조씨 1, 윤씨 1, 양씨 1, 이씨 1, 남씨 1호 등 총 4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음력 2월 1일에 개최한다. 총회는 1반과 2반이 각각 별도로 개최하는데 본 마을의 경우 이장이 주관하고,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의 현안 등을 협의한다. 이밖에 2리 전체 총회는 영농자금 배정과 마을사업 등을 토론할 때 이장이 임시로 개최한다. 동계는 7년 전에 조직되었으며 전 가구가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농업협동조합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여명이 가입되어 있다.
전기는 197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1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가구, 기름보일러 34가구, 심야전기보일러 5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동각(우산각)은 1990년 초에 건립하였다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농소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3.5㎞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주위에 농경지와 과수원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본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구)금천남초등학교 인근에 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동악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구내마을이 있다. 남쪽으로는 방축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광암리가 있다. 마을에는 28가구, 6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보리 그리고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 방목들에 펼쳐져 있으며, 나주호와 영산강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농소와 구내마을을 합하여 논 35㏊, 밭 10㏊가 있고 농경지 토양은 양질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가가 이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채소를 재배하고 있는데 1990년께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하여 사용하는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배를 11가구가 재배하고 있는데 송동수가 20여년 전에 시작하였고 5년 전부터 3가구가 복숭아를, 2가구가 포도를 재배하고 있다. 이밖에 1가구가 양봉으로 아카시아와 유채꿀을 채취하고 있다.
교통은 매시간 운행되고 있는 광주-봉황간 버스를 이용하고,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마을 안에 있는 문화유적은 삼왕묘(三王廟)와 지선당(至善堂)이 있다. 삼왕묘는 단층의 팔작 골기와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이다. 김해김씨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을 비롯, 양왕(讓王), 흥무왕(興武王)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1933년 건립하였으나 6.25로 인해 피폐된 것을 1967년과 1977년에 개축하였다. 지선당은 삼왕묘의 부속건물인데 단층 팔작 골기와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4칸의 제실로서 김해김씨의 종친회소로도 쓰이며 화수정이라고도 부른다. 1933년 건립하였고 1983년 중수하였다. 아울러 삼왕묘 주위에는 1984년에 세운〈정석김대현공적비 淨石金大鉉功績碑〉와 1977년에 세운「월강김용두공적비 月岡金聳斗功績碑」, 「삼왕묘연혁비 三王廟沿革碑」ㆍ「삼왕묘중수비 三王廟重修碑」가 있다. 삼왕묘와 지선당은 김해김씨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본 마을에 거주하게 된 사연은 이곳이 ‘왕 터’라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건립하게 되었다. 이밖에 2002년 음력 1월 14일까지 마을에서는 당산제를 지냈으나 2002년 8월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당산나무가 고사되어 앞으로 당산제의 진행 여부는 불투명하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 앞의 논이 옥답으로 농사짓기 좋은 곳이라 하여 농소라 하였다.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789년 《호구총수》로 어천면(魚川面)의 13개 마을 중 한 마을로 ‘농소촌 農所村’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그 후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어천면 31개 마을 중 ‘농소리 農所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신방리(新防里)ㆍ농소리ㆍ구천리(九川里)ㆍ황동리(黃洞里)ㆍ방축리(防丑里)ㆍ어전리(於田里)ㆍ광석리(廣石里)와 병합하여 신천리(新川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1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입향조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다. 다만 해남윤씨ㆍ김해김씨가 입향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두 집안의 보첩을 통해 입향조의 입향 내력을 파악할 수 없었다. 마을에는 김해김씨 8, 밀양박씨 4, 김해허씨 4, 광산김씨 2, 전주이씨 2, 송씨ㆍ한씨ㆍ남씨ㆍ배씨ㆍ임씨ㆍ나씨ㆍ윤씨ㆍ최씨 등 각 1호 총 2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양력 12월 3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사업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 등을 한다. 위친계는 30여년 전에 조직되었으며 애경사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고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하여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75년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5가구, 기름보일러 23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은 (구)금천남초등학교 인근에서 2가구가 구멍가게를 운영하였다. 마을 농기계보관창고는 99㎡으로 1998년 건립하였고 마을회관은 1동 89㎡으로 2001년 건립하였으며 노인정과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이밖에 본 마을 인근에 주막거리가 있었다. 이 주막은 산포ㆍ남평ㆍ대촌지역 사람들이 영산포장을 가는 길에 들렀던 곳이다.
신천1리 : 구내(龜內)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구내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3.5㎞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주위로 농경지와 과수원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농소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고동리가 있다. 남쪽으로는 방축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광암리가 있다. 마을에는 16가구, 4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보리 그리고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 방목들에 펼쳐져 있으며, 나주호와 영산강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농소와 구내마을을 합하여 논 35㏊, 밭 10㏊가 있고 농경지 토양은 양질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이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채소를 재배하고 있는데 1990년께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하여 사용하는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현재 6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박종태(남, 62세)가 15년 전에 처음 시작하였다. 교통은 매시간 운행되고 있는 광주-봉황간 버스를 이용하고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 뒷산의 지형이 거북형이며 지금은 배수시설이 잘 되어 있으나 과거에는 비가 조금만 내려도 홍수가 되어 거북이는 물을 떠나 살 수 없다하여 구내라 하였다. 문헌상 마을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구천리(九川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신방리(新防里)ㆍ농소리(農所里)ㆍ구천리(九川里)ㆍ황동리(黃洞里)ㆍ방축리(防丑里)ㆍ어전리(於田里)ㆍ광석리(廣石里)와 병합하여 신천리(新川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신천1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150여년 전 밀양박씨 윤신이 입향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현재 마을에는 밀양박씨 6가구가 거주하고 있지만 윤신의 후손이 아닌 관계로 보첩을 통한 입향조의 내력은 파악할 수 없다. 마을에는 밀양박씨 6, 김해김씨 5, 이씨 2, 안씨 1, 조씨 1, 한씨 1호 등 총 16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와 위친계 그리고 부녀회는 농소마을과 함께 조직되어 운영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3가구, 기름보일러 11가구, 심야전기보일러 2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은 1가구가 건강원을 운영하고 있다.
신천2리 : 방축(防丑)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방축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3.8㎞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관정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금천면과 영산동을 연결하는 지방도로가 나 있고, 49호선 나주시 외곽도로가 시공 중에 있다. 마을 뒤로는 ‘금장들’이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신방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어전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관정동이 있고, 북쪽으로는 농소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20가구, 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주로 마을 뒤 금장들에 펼쳐져 있고, 신천제와 나주호의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방축과 신방마을을 합하여 논 4㏊, 밭 3.5㏊가 있고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수박ㆍ무ㆍ배추를 재배하고 있으나 1990년대 초반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하여 5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며 이중 박동섭이 10년 전에 시작하였다. 이밖에 나주에 살고 있는 외지인이 마을에 하우스 4~5동을 설치하여 국화를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나주-영산포 방면 버스가 1일 4~5회 마을 앞을 경유한다. 이 버스는 10여년 전부터 운행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이전에는 걸어다녀야 했다. 생필품 구입은 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전언에 의하면 마을이 소형국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을 지명의 표기가 과거에는 방축(方築)이었으나 1910년대에 이르러 방축(防丑)으로 바뀌었다. 문헌상 마을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789년 《호구총수》로 어천면(魚川面)의 13개 마을 중 한 마을로 ‘방축동리 方築洞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조선시대 한 개의 행정마을로써 행정편제가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어천면 31개 마을 중 방축리(防丑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호구총수》에서 보이던 방축(方築)이 1900년대에 이르러 방축(防丑)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신방리(新防里)ㆍ농소리(農所里)ㆍ구천리(九川里)ㆍ황동리(黃洞里)ㆍ방축리ㆍ어전리(於田里)ㆍ광석리(廣石里)와 병합하여 신천리(新川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신천리 2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과거 백씨와 오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으며 그 증거로 인근에 그들의 묘가 있다고 한다. 이후 밀양박씨가 입향하였는데, 규정공파 내 청재공파(淸齋公派)이다. 파조는 청재공 심문(審問)으로 시조로부터 46세손이다. 입향조는 파조로부터 12세손인 태인(泰仁, 1644~1716)으로, 그의 자는 인후(仁?), 호는 취암(翠菴)이며 부인은 함풍이씨이고 묘는 삼포면 화지리에 있다. 마을 안 문중유적으로는 파조로부터 15세손인 필운(弼運)의 효행을 기린 효자각과 비가 있다. 마을에는 밀양박씨 9, 김씨 5, 양씨 3, 장씨 1, 강씨 1, 고씨 1호 등 총 2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양력 12월 30일에 개최한다. 총회는 1반과 2반이 각각 별도로 개최하는데 본 마을의 경우 반장이 주관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의 현안 등을 협의한다. 이밖에 2구 전체 총회는 영농자금 배정과 마을사업 등을 토론할 때 이장이 임시로 개최한다. 동계는 10여년 전에 조직되었으며 전 가구가 어려울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농업협동조합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10여명이 가입되어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1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16가구, 심야전기 4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은 구멍가게가 1개소, 차량정비소가 1개소 있다. 마을 농기계보관창고는 165㎡으로 1998년 건립되었고 동각(우산각)은 1990년 초에 건립되었다. 이밖에 마을에는 과거 사용하였던 돌다리의 괴임돌과 상판이 보존되어 있다.
신천3리 : 어전(於田)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어전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4㎞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산동ㆍ관정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신천들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나주시청이 바라보인다. 그리고 마을 뒤로는 ‘금장들’이 있다. 동쪽으로는 방축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부덕동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평산동이 있고, 북쪽으로는 농소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20가구, 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보리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뒤로 펼쳐져 있고, 신천제와 나주호의 물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논 3㏊, 밭 1.5㏊가 있는데 토양은 양질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다. 대부분의 농가가 이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대부분 가용으로 사용할 채소를 재배하고 있다. 30~40년 전부터 밭을 논으로 용도 변경하는 추세이다. 마을에서는 2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서병태가 20여년 전에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교통은 광주-영산포간 1일 4회 버스가 운행되고 있는데, 이웃하고 있는 평산동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기 때문에 불편한 편이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과거에는 배가 마을 앞에 닿았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의 지명은 옛날 마을이 갈대밭으로 되어 있었다 하여 어전(於田)이라 하였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어전리 於田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신방리(新防里)ㆍ농소리(農所里)ㆍ구천리(九川里)ㆍ황동리(黃洞里)ㆍ방축리(防丑里)ㆍ어전리ㆍ광석리(廣石里)와 병합하여 신천리(新川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신천3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은 갈대밭을 일구어 정착하기 위하여 한씨가 처음으로 입향하였으며 이후 여러 성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현재 박씨 5, 서씨 4, 김씨 3, 강씨 2, 이씨ㆍ홍씨ㆍ유씨ㆍ노씨ㆍ황씨ㆍ한씨 등 각1호 총 2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2월 26일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의 결산과 사업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 등을 한다. 마을 내 남아있는 조직은 없으며, 다만 부녀회만이 농협협동조합과 관련되어 활동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75년 12월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2가구, 기름보일러 18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 공동창고는 1동(231㎡)으로 창고 겸 마을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동각(우산각)은 1940년대 후반에 건립되었다. 이 마을은 과거에 침수피해를 많이 입었으나 마을 앞을 흐르는 영산천(봉황천)의 제방을 막은 이후부터 이러한 피해는 없어졌다.
신천4리 : 신방(新防)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신방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4㎞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 금천면과 영산동을 연결하는 지방도로가 나 있고, 국가지원지방도 49호선이 지나고 있다. 마을 동쪽으로는 야죽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방축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죽촌리 상촌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농소마을과 동악리 춘정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40가구, 9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주로 마을 앞과 금장들에 펼쳐져 있고, 신천제와 나주호의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방축과 신방마을을 합하여 논 4㏊, 밭 3.5㏊가 있고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수박ㆍ무ㆍ배추를 재배하고 있고 10여 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다. 김용태가 15년 전에 시작하였다. 이밖에 1가구가 3년 전부터 복숭아를 재배해 오고 있다. 교통은 나주-영산포 방면 버스가 1일 4~5회 마을 정류장을 경유한다. 이 버스는 10여년 전부터 운행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이전에는 걸어다녀야 하였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학 형국이며, 방축마을에서 분리되었다 하여 신방(新防)이라 한다. 문헌상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신방리(新防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신방리ㆍ농소리(農所里)ㆍ구천리(九川里)ㆍ황동리(黃洞里)ㆍ방축리(防丑里)ㆍ어전리(於田里)ㆍ광석리(廣石里)와 병합하여 신천리(新川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신천2리로 편제되었다가 2011년 4리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창녕조씨가 처음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창녕조씨 집안에 대해 아는 이가 없다. 이후 밀양박씨 규정공파가 정착하였다. 입향조는 시조로부터 60세손인 수해(守海, 1670~?)인데 자는 양서(良瑞), 호는 남호(南湖)이다. 부인은 김해김씨이고 묘는 금천면 어전리에 있다. 이후 후손이 번창하여 지금 시조로부터 70세손인 박홍주와 일가(一家)가 마을에 살고 있다. 문중관련 유적으로는 입향조를 모시는 제각 1동과 1994년에 세운 「밀양박공수해선생유적비 密陽朴公守海先生遺蹟碑」가 제각 앞에 있다. 마을에는 밀양박씨 25, 노씨 7, 김씨 3, 조씨 1, 윤씨 1, 양씨 1, 이씨 1, 남씨 1호 등 총 4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음력 2월 1일에 개최한다. 총회는 1반과 2반이 각각 별도로 개최하는데 본 마을의 경우 이장이 주관하고, 마을자금의 결산과 마을의 현안 등을 협의한다. 이밖에 2리 전체 총회는 영농자금 배정과 마을사업 등을 토론할 때 이장이 임시로 개최한다. 동계는 7년 전에 조직되었으며 전 가구가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농업협동조합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여명이 가입되어 있다.
전기는 197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1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가구, 기름보일러 34가구, 심야전기보일러 5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동각(우산각)은 1990년 초에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