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산리
- 날짜
- 2020.04.16
- 조회수
- 1002
- 등록자
- 관리자
월산1리 : 갈산(葛山)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갈산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6㎞ 지점에 위치한다. 마을 앞으로 농어촌도로가 새로 개설되어 있고, 마을 뒤로 과수원과 들녘이 펼쳐있다. 인근 지명으로는 갈매굴ㆍ통생골ㆍ몰무대미 등이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월산2리와 3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죽촌리 야죽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봉황면 옥산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빛가람동이 있다.
마을에는 43가구, 1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입구와 뒤편에 펼쳐져 있고, 농업용수는 나주호의 물을 월산양수장을 이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논 2.5㏊,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3㏊가 있으며 토양은 사질양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고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수박ㆍ무 등을 많이 재배하였으나 8년 전부터 과수원으로 바꾸어 13호가 배를 재배하고 있다. 임기조(작고)가 15년 전에 시작하였고 복숭아는 4가구가 30여년 전부터 재배를 하고 있는데 많은 가구가 복숭아에서 배로 전환하였다. 이밖에 3가구가 8년 전부터 포도를 재배해 오고 있으며, 5가구가 10년 전부터 감을 재배해 오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초부터 8가구가 하우스에서 국화와 장미 그리고 고추ㆍ수박ㆍ오이 등을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매 시간마다 운행되고 있는 광주-세지면 동창간 버스를 이용한다. 이 버스가 운행되기 전에는 면소재지까지 걸어다녔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 주변에 칡이 많이 자생하여 갈뫼로 불리워 오다가 한자로 갈산(葛山)으로 변경되었다. 이 마을에 이와 얽힌 설화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갈산마을은 칡이 많이 번성한 야산으로 들 건너 나주시 토계리의 토끼가 들을 건너와서 갈산의 칡을 뜯어먹고 가니 토계마을은 천석 부자가 생겨나고 갈산마을은 가난하였다고 한다. 이후 일제시대에 호남선 철도가 생겨나자 토끼가 들을 건너올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토계마을은 가난하여지고 갈산마을은 점점 잘살게 되었다(○○○談).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갈산리(葛山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신갈리(新葛里)ㆍ갈산리(葛山里)ㆍ원동(元洞)ㆍ월정리(月汀里), 죽곡면(竹谷面) 옥산리(玉山里), 두산면(頭山面) 신평리(新坪里) 각 일부와 병합하여 월산리(月山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월산리 1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입향조에 대해 창녕조씨가 처음 터를 잡고 살았으며 그후 풍천임씨, 풍천홍씨가 이주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창녕조씨 집안에 보첩이 없어 내력을 확인할 수 없다. 마을에는 풍천임씨 18, 김씨 7, 이씨 5, 창녕조씨 4, 풍천홍씨 3, 정씨 2, 박씨 2, 양씨 1, 최씨 1호 등 총 43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12월 28일경에 개최하는데 마을자금의 결산과 사업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을 한다. 상조회는 196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39명의 회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경노회(노인회)는 1999년에 부녀회는 1960년대에 조직되어 35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일 돕기 등을 하고 있는데 과거에는 회원 집을 돌아가면서 장사를 하여 얻은 이윤을 경로잔치를 할 때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사는 오래 전에 중단되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1대 있었고,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2가구, 기름보일러 38가구, 심야전기보일러 3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 농기계보관창고는 99㎡으로 1999년에 건립하였다. 마을회관은 66㎡으로 1985년 건립되었으며 사무실과 노인정으로 이용되고 있다. 동각(우산각)은 1988년에 건립되었다. 상업활동으로는 마을 인근에 금성산나주배사업단ㆍ매나리나주배사업단의 저온창고와 배 포장지를 제조하고 있는 이화네트가 있다. 이밖에 1967년과 1968년의 가뭄, 그리고 1999년 태풍으로 과수와 하우스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월산2리 : 신갈(新葛)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신갈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6㎞ 지점에 위치한다. 마을 앞으로 농어촌도로가 새로 개설되어 있고, 마을 뒤로 과수원과 들녘이 펼쳐있다. 인근 지명으로는 갈매굴ㆍ통생골ㆍ몰무대미 등이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월산2리와 3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죽촌리 야죽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봉황면 옥산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빛가람동이 있다.
마을에는 43가구, 1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입구와 뒤편에 펼쳐져 있고, 농업용수는 나주호의 물을 월산양수장을 이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논 2.5㏊,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3㏊가 있으며 토양은 사질양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고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수박ㆍ무 등을 많이 재배하였으나 8년 전부터 과수원으로 바꾸어 13호가 배를 재배하고 있다. 임기조(작고)가 15년 전에 시작하였고 복숭아는 4가구가 30여년 전부터 재배를 하고 있는데 많은 가구가 복숭아에서 배로 전환하였다. 이밖에 3가구가 8년 전부터 포도를 재배해 오고 있으며, 5가구가 10년 전부터 감을 재배해 오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초부터 8가구가 하우스에서 국화와 장미 그리고 고추ㆍ수박ㆍ오이 등을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매 시간마다 운행되고 있는 광주-세지면 동창간 버스를 이용한다. 이 버스가 운행되기 전에는 면소재지까지 걸어다녔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소쿠리형국이며, 새로 터를 닦았다는 뜻에서 신갈이라 하였다. 그리고 전언에 의하면 과거 마을 주위로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신갈리(新葛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신갈리(新葛里)ㆍ갈산리(葛山里)ㆍ원동(元洞)ㆍ월정리(月汀里), 죽곡면(竹谷面)의 옥산리(玉山里), 두산면(頭山面)의 신평리(新坪里) 각 일부와 병합하여 월산리(月山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월산2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연안차씨가 터를 닦고 그후 김해김씨, 밀양박씨, 전주최씨 순으로 들어와 정착하였다고 한다. 현재 연안차씨는 살고 있지 않으며, 김해김씨, 밀양박씨, 전주최씨가 많이 살고 있다. 연안차씨 이후 입향하였다는 김해김씨는 삼현파이다. 그러나 마을에 보첩이 없어 정확한 입향 내력은 확인할 수 없다. 마을에는 김해김씨 9, 전주최씨 14, 밀양박씨 10, 광산김씨 3, 정씨 4, 강씨 3, 서씨 2, 임씨 2, 나씨 1, 윤씨 1, 민씨 1, 이씨 1호 등 총 5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12월 28일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 결산과 마을 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을 한다. 상포계는 과거에 조직되어 전해오고 있으며 전 가구가 가입되어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어 3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일 돕기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74년경에 가설되었다.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2가구, 기름보일러 42가구, 심야전기보일러 7가구이며,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공동창고는 1동 66㎡으로 1970년대에 건립하였다. 마을회관은 1동 2층 건물로 1980년대에 건립하였으며 동각(우산각)은 1990년대에 건립하였다. 이밖에 마을에서는 음력 1월 15일에서 2월 1일까지 10여명으로 구성된 풍물패들이 각 가정을 돌며 몇 년에 한번씩 지신밟기를 한다.
월산3리 : 월정(月汀)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월정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약 4㎞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37가구가 살고 있는 큰 마을인 ‘당산’, 3가구가 살고 있는 작은마을인 월정으로 나뉘어 있다. 마을 앞으로는 들판이 있고, 뒤로는 자그마한 야산이 있다. 그리고 마을 인근 지명으로는 쑥덕골(들), 진굴(들), 장구배미(들) 등이 있다. 이중 쑥덕골은 옛날 처음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던 곳으로 물이 부족하여 폐촌되었다. 이곳의 땅을 파면 기와편이 출토된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초변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갈산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신갈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빛가람동이 있다.
마을에는 40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과 뒤편에 펼쳐져 있고, 월산제와 진굴방죽 그리고 나주호의 물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에는 논 20㏊, 밭 10㏊가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ㆍ이모작을 하고 있다. 8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황인춘(작고)이 1960년대부터 시작하였다. 이밖에 5년 전부터 4가구가 복숭아를 재배해 오고 있다. 밭에서는 무ㆍ배추ㆍ수박 등을 재배하고 있는데 5년 전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변경한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교통은 월산1리 가라산마을에서 버스를 탄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조리형국이며 과거 쟁가리로 불리어 오다가 이후 월정으로 개칭하였다. 마을의 연혁은 2리 신갈마을과 같다. 전언에 의하면 영암군 신북면에서 살던 영암박씨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떠났다고 한다. 이후 장수황씨 호암공파 후손들이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에는 1979년에 세운 「소암황의헌선생추모비 沼巖黃義獻先生追慕碑」와 1986년에 세운 「소파황인술선생공적비 小坡黃仁述先生功績碑」가 있다. 마을에는 김해김씨 10, 장수황씨 10, 충주박씨 3, 광산김씨 3, 삭녕최씨 2, 정씨 2, 남씨 2, 진주강씨 1, 문씨 1, 양씨 1, 신씨 1, 손씨 1, 조씨 1, 홍씨 1, 이씨 1호 등 총 4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12월 3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사업토론 그리고 임원선출 등을 한다. 위친계는 1953년 조직되었으며, 전 가구가 가입되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어 25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말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2가구, 기름보일러 38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1동 80㎡으로 1995년에 건립하였는데 노인정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고 동각(우산각)은 1동으로 1980년대에 건립하였다. 이밖에 명절 때 풍물을 치면서 마을사람들이 흥겹게 노는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마을 어른들을 위해 효도관광을 시행하고 있다. 또한 월산제가 위험수위까지 도달하여 1961년 큰 홍수로 주민들이 대피하는 일이 있었다.
월산3리 : 초변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초변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약 5.5㎞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포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동쪽과 남쪽으로는 산포면 신도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월정마을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빛가람동이 있는데 그리고 마을 인근에 배메산이 있다. 마을에는 5가구, 14명이 거주하고 있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에 펼쳐져 있으며, 나주호의 물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에는 논 3㏊, 밭 3㏊가 있고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로 농사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5가구가 6년 전부터 배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밭에서는 고추ㆍ무ㆍ배추ㆍ수박 등을 재배하고 있는데 6년 전부터 과수원으로 변경하여 이용하는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교통은 불편한편으로 광주-산포간 버스를이용하고 주민들의 생필품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마트를 이용하고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샛가지로 불리워 오고 있으며 한자 표기상 초변이라고 하였다. 마을은 기존에 발행된 문헌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현재처럼 과거에도 마을의 규모가 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마을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월정마을에 속한 자연마을이다. 그리고 행정구역상으로는 월산3리 2반으로 되어 있다. 마을에는 윤씨 3, 박씨 1, 최씨 1호 등 총 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월정마을과 함께 하고 있다. 전기는 197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5가구이며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갈산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6㎞ 지점에 위치한다. 마을 앞으로 농어촌도로가 새로 개설되어 있고, 마을 뒤로 과수원과 들녘이 펼쳐있다. 인근 지명으로는 갈매굴ㆍ통생골ㆍ몰무대미 등이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월산2리와 3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죽촌리 야죽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봉황면 옥산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빛가람동이 있다.
마을에는 43가구, 1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입구와 뒤편에 펼쳐져 있고, 농업용수는 나주호의 물을 월산양수장을 이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논 2.5㏊,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3㏊가 있으며 토양은 사질양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고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수박ㆍ무 등을 많이 재배하였으나 8년 전부터 과수원으로 바꾸어 13호가 배를 재배하고 있다. 임기조(작고)가 15년 전에 시작하였고 복숭아는 4가구가 30여년 전부터 재배를 하고 있는데 많은 가구가 복숭아에서 배로 전환하였다. 이밖에 3가구가 8년 전부터 포도를 재배해 오고 있으며, 5가구가 10년 전부터 감을 재배해 오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초부터 8가구가 하우스에서 국화와 장미 그리고 고추ㆍ수박ㆍ오이 등을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매 시간마다 운행되고 있는 광주-세지면 동창간 버스를 이용한다. 이 버스가 운행되기 전에는 면소재지까지 걸어다녔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 주변에 칡이 많이 자생하여 갈뫼로 불리워 오다가 한자로 갈산(葛山)으로 변경되었다. 이 마을에 이와 얽힌 설화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갈산마을은 칡이 많이 번성한 야산으로 들 건너 나주시 토계리의 토끼가 들을 건너와서 갈산의 칡을 뜯어먹고 가니 토계마을은 천석 부자가 생겨나고 갈산마을은 가난하였다고 한다. 이후 일제시대에 호남선 철도가 생겨나자 토끼가 들을 건너올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토계마을은 가난하여지고 갈산마을은 점점 잘살게 되었다(○○○談).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갈산리(葛山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신갈리(新葛里)ㆍ갈산리(葛山里)ㆍ원동(元洞)ㆍ월정리(月汀里), 죽곡면(竹谷面) 옥산리(玉山里), 두산면(頭山面) 신평리(新坪里) 각 일부와 병합하여 월산리(月山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월산리 1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입향조에 대해 창녕조씨가 처음 터를 잡고 살았으며 그후 풍천임씨, 풍천홍씨가 이주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창녕조씨 집안에 보첩이 없어 내력을 확인할 수 없다. 마을에는 풍천임씨 18, 김씨 7, 이씨 5, 창녕조씨 4, 풍천홍씨 3, 정씨 2, 박씨 2, 양씨 1, 최씨 1호 등 총 43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12월 28일경에 개최하는데 마을자금의 결산과 사업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을 한다. 상조회는 196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39명의 회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경노회(노인회)는 1999년에 부녀회는 1960년대에 조직되어 35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일 돕기 등을 하고 있는데 과거에는 회원 집을 돌아가면서 장사를 하여 얻은 이윤을 경로잔치를 할 때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사는 오래 전에 중단되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1대 있었고,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2가구, 기름보일러 38가구, 심야전기보일러 3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 농기계보관창고는 99㎡으로 1999년에 건립하였다. 마을회관은 66㎡으로 1985년 건립되었으며 사무실과 노인정으로 이용되고 있다. 동각(우산각)은 1988년에 건립되었다. 상업활동으로는 마을 인근에 금성산나주배사업단ㆍ매나리나주배사업단의 저온창고와 배 포장지를 제조하고 있는 이화네트가 있다. 이밖에 1967년과 1968년의 가뭄, 그리고 1999년 태풍으로 과수와 하우스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월산2리 : 신갈(新葛)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신갈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6㎞ 지점에 위치한다. 마을 앞으로 농어촌도로가 새로 개설되어 있고, 마을 뒤로 과수원과 들녘이 펼쳐있다. 인근 지명으로는 갈매굴ㆍ통생골ㆍ몰무대미 등이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월산2리와 3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죽촌리 야죽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봉황면 옥산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빛가람동이 있다.
마을에는 43가구, 1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입구와 뒤편에 펼쳐져 있고, 농업용수는 나주호의 물을 월산양수장을 이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논 2.5㏊,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3㏊가 있으며 토양은 사질양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고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수박ㆍ무 등을 많이 재배하였으나 8년 전부터 과수원으로 바꾸어 13호가 배를 재배하고 있다. 임기조(작고)가 15년 전에 시작하였고 복숭아는 4가구가 30여년 전부터 재배를 하고 있는데 많은 가구가 복숭아에서 배로 전환하였다. 이밖에 3가구가 8년 전부터 포도를 재배해 오고 있으며, 5가구가 10년 전부터 감을 재배해 오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초부터 8가구가 하우스에서 국화와 장미 그리고 고추ㆍ수박ㆍ오이 등을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매 시간마다 운행되고 있는 광주-세지면 동창간 버스를 이용한다. 이 버스가 운행되기 전에는 면소재지까지 걸어다녔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소쿠리형국이며, 새로 터를 닦았다는 뜻에서 신갈이라 하였다. 그리고 전언에 의하면 과거 마을 주위로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신갈리(新葛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신갈리(新葛里)ㆍ갈산리(葛山里)ㆍ원동(元洞)ㆍ월정리(月汀里), 죽곡면(竹谷面)의 옥산리(玉山里), 두산면(頭山面)의 신평리(新坪里) 각 일부와 병합하여 월산리(月山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월산2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연안차씨가 터를 닦고 그후 김해김씨, 밀양박씨, 전주최씨 순으로 들어와 정착하였다고 한다. 현재 연안차씨는 살고 있지 않으며, 김해김씨, 밀양박씨, 전주최씨가 많이 살고 있다. 연안차씨 이후 입향하였다는 김해김씨는 삼현파이다. 그러나 마을에 보첩이 없어 정확한 입향 내력은 확인할 수 없다. 마을에는 김해김씨 9, 전주최씨 14, 밀양박씨 10, 광산김씨 3, 정씨 4, 강씨 3, 서씨 2, 임씨 2, 나씨 1, 윤씨 1, 민씨 1, 이씨 1호 등 총 5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12월 28일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 결산과 마을 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을 한다. 상포계는 과거에 조직되어 전해오고 있으며 전 가구가 가입되어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어 3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일 돕기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74년경에 가설되었다.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2가구, 기름보일러 42가구, 심야전기보일러 7가구이며,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공동창고는 1동 66㎡으로 1970년대에 건립하였다. 마을회관은 1동 2층 건물로 1980년대에 건립하였으며 동각(우산각)은 1990년대에 건립하였다. 이밖에 마을에서는 음력 1월 15일에서 2월 1일까지 10여명으로 구성된 풍물패들이 각 가정을 돌며 몇 년에 한번씩 지신밟기를 한다.
월산3리 : 월정(月汀)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월정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약 4㎞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37가구가 살고 있는 큰 마을인 ‘당산’, 3가구가 살고 있는 작은마을인 월정으로 나뉘어 있다. 마을 앞으로는 들판이 있고, 뒤로는 자그마한 야산이 있다. 그리고 마을 인근 지명으로는 쑥덕골(들), 진굴(들), 장구배미(들) 등이 있다. 이중 쑥덕골은 옛날 처음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던 곳으로 물이 부족하여 폐촌되었다. 이곳의 땅을 파면 기와편이 출토된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초변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갈산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신갈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빛가람동이 있다.
마을에는 40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과 뒤편에 펼쳐져 있고, 월산제와 진굴방죽 그리고 나주호의 물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에는 논 20㏊, 밭 10㏊가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ㆍ이모작을 하고 있다. 8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황인춘(작고)이 1960년대부터 시작하였다. 이밖에 5년 전부터 4가구가 복숭아를 재배해 오고 있다. 밭에서는 무ㆍ배추ㆍ수박 등을 재배하고 있는데 5년 전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변경한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교통은 월산1리 가라산마을에서 버스를 탄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조리형국이며 과거 쟁가리로 불리어 오다가 이후 월정으로 개칭하였다. 마을의 연혁은 2리 신갈마을과 같다. 전언에 의하면 영암군 신북면에서 살던 영암박씨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떠났다고 한다. 이후 장수황씨 호암공파 후손들이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에는 1979년에 세운 「소암황의헌선생추모비 沼巖黃義獻先生追慕碑」와 1986년에 세운 「소파황인술선생공적비 小坡黃仁述先生功績碑」가 있다. 마을에는 김해김씨 10, 장수황씨 10, 충주박씨 3, 광산김씨 3, 삭녕최씨 2, 정씨 2, 남씨 2, 진주강씨 1, 문씨 1, 양씨 1, 신씨 1, 손씨 1, 조씨 1, 홍씨 1, 이씨 1호 등 총 4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12월 3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의 결산과 사업토론 그리고 임원선출 등을 한다. 위친계는 1953년 조직되었으며, 전 가구가 가입되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어 25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말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2가구, 기름보일러 38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1동 80㎡으로 1995년에 건립하였는데 노인정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고 동각(우산각)은 1동으로 1980년대에 건립하였다. 이밖에 명절 때 풍물을 치면서 마을사람들이 흥겹게 노는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마을 어른들을 위해 효도관광을 시행하고 있다. 또한 월산제가 위험수위까지 도달하여 1961년 큰 홍수로 주민들이 대피하는 일이 있었다.
월산3리 : 초변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초변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약 5.5㎞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포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동쪽과 남쪽으로는 산포면 신도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월정마을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빛가람동이 있는데 그리고 마을 인근에 배메산이 있다. 마을에는 5가구, 14명이 거주하고 있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에 펼쳐져 있으며, 나주호의 물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에는 논 3㏊, 밭 3㏊가 있고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로 농사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5가구가 6년 전부터 배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밭에서는 고추ㆍ무ㆍ배추ㆍ수박 등을 재배하고 있는데 6년 전부터 과수원으로 변경하여 이용하는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교통은 불편한편으로 광주-산포간 버스를이용하고 주민들의 생필품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마트를 이용하고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샛가지로 불리워 오고 있으며 한자 표기상 초변이라고 하였다. 마을은 기존에 발행된 문헌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현재처럼 과거에도 마을의 규모가 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마을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월정마을에 속한 자연마을이다. 그리고 행정구역상으로는 월산3리 2반으로 되어 있다. 마을에는 윤씨 3, 박씨 1, 최씨 1호 등 총 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월정마을과 함께 하고 있다. 전기는 197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5가구이며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