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악리
- 날짜
- 202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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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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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동악리의 대부분이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 '빛가람동' 부지에 편입되어 2014년 현재는 과거 동악리에 거주하던 25세대 50여명의 이주민들이 (구)금천남초등학교 부지에 조성된 이주단지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래 내용은 2003년에 작성한 것으로 빛가람동에 편입 되기전 동악1리~3리의 소개내용입니다.
동악1리 : 상야(上夜)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상야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6.5㎞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전주이씨 집성촌으로, 마을의 동쪽으로는 산포면 신도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석전리와 광암리가 있다. 남쪽으로는 중야마을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석전리와 산포면 매성리가 있다. 마을에는 50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ㆍ배ㆍ무ㆍ수박 등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과 산포면에 펼쳐져 있으며 농업용수는 산포면 신도리에 있는 신도제와 다도댐 물을 이용하고 있어 부족하지 않다. 논 1.5㏊,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7㏊가 있는데 밭에서는 주로 무와 수박을 재배하고 있으나 많은 토지가 배를 재배하기 위해 과수원으로 바뀌고 있다.
농경지 토양은 논이 점질토, 밭(과수원)이 사질토이다. 그리고 대부분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10여 농가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이병연이 1980년대 초에 재배하기 시작하였고 8년 전부터 2가구가 복숭아 재배를, 6년 전부터 1가구가 감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가구가 포도를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광주-산포면 화지리간 버스가 1일 4회 본 마을을 경유하고 있어 이를 이용한다. 이 버스는 5년 전부터 운행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전에는 산포면 내기리까지 걸어다녔다. 생필품 구입은 교통이 편리한 남평장을 주로 이용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 이름은 뒷동산 지형이 옥등괘벽이라 하여 상야(上夜)라 하였다고 한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는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상야리(上夜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망악리(望岳里)ㆍ상야리(上夜里), 금마산면(金馬山面)의 황동(黃洞) 각 일부와 병합하여 동악리(洞岳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동악1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만 1789년 《호구총수》의 기록에 어천면 13개 마을 중 야산촌(夜山村)이라는 지명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현재의 동악1리와 2리로 포함되어 있는 상야ㆍ중야ㆍ하야가 분구되기 이전 옛 지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을은 전주이씨 집성촌이다.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전주이씨는 완창대군파(完昌大君派)로 입향조는 시조로부터 30세손(파조로부터 10세손)인 몽득(夢得)이다. 부인은 진주강씨이고, 묘는 세지면에 있다. 그는 남평 표리촌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몽득 이후 후손이 번창하여 현재 마을에는 시조로부터 43세손인 이삼규(남, 69세)와 일가(一家)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에는 전주이씨 40, 박씨 2, 홍씨 2, 최씨ㆍ김씨ㆍ황씨ㆍ정씨ㆍ윤씨ㆍ유씨 등 각 1호 총 50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1월 5일~10일 사이에 날을 받아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을 결산하고 사업을 토론하며 2년을 주기로 임원을 선출한다. 상포계는 15년 전에 조직되었으며 35가구가 가입되어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부녀회는 10여년 전에 조직되었으며 4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7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1대 있었으며, 일반전화는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4가구, 기름보일러 43가구, 심야전기 3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은 구멍가게 1, 떡 방앗간 1개소가 있다고 10여년 전부터 창호를 제작하는 목원산업과 6년 전부터 팽이와 새송이버섯을 재배하는 우전농원 등이 있다. 이밖에 마을공동창고는 1동 99㎡으로 1970년대에 건립하였다.
동악2리 : 중야(中夜)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중야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6㎞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앞과 뒤편으로는 농토와 과수원이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산포면 신도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광암리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하야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상야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18가구, 40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과 뒤편에 펼쳐져 있으며, 나주호의 물과 10여 개의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논 30㏊, 밭 20㏊가 있는데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가가 1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수박ㆍ무ㆍ배추 등을 재배하고 있다. 16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15년 전부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밖에 광주사람이 2001년부터 마을에서 인삼을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3년 전부터 운행되는 광주-나주간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과 남평장을 주로 이용한다. 마을 내에는 현재 풍천임씨 효자각과 금동교회가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을 율산(栗山)ㆍ야산(夜山) 또는 중배미라고도 부르는데 한자 표기 상 중야(中夜)라고 칭하였다. 1789년 《호구총수》에 어천면 13개 마을 중 야산촌(夜山村)이라는 지명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현재의 동악1리와 2리로 포함되어 있는 상야ㆍ중야ㆍ하야가 분구되기 이전 옛 지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동악2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에 입향한 성씨는 풍천임씨(豊川任氏) 감찰공파(監察公派)로 파조는 시조로부터 13세손인 유손(由遜)이며 마을 입향조는 시조로부터 17세손인 기지(器之)이다. 기지(1586~1656)의 자는 국화(國華), 호는 신곡(薪谷)으로 황주부사와 한림대간 그리고 이조좌랑 헌납을 역임하였다. 부인은 숙인 평양조씨이고 묘는 봉황면 오림리 서당동에 있다. 그는 경기도 양주에서 이거하였으며, 과거에는 본 마을에 율봉사(栗峰祠)가 있어 배향되었으나 오래되어 훼철되었다. 현재 중야와 하야마을에는 기지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시조로부터 28세손인 임기순(남, 76세)을 비롯하여 일가(一家)가 살고 있다. 문중관련 유적으로는 효자(孝子) 임세기(任世耆)의 정려각이 있다. 마을에는 풍천임씨 14, 황씨 2, 이씨 1, 남씨 1호 등 총 1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2구 전체적으로 12월 3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을 한다. 이 마을의 모임은 2구 전체적으로 조직되었는데 상포계는 40여명의 계원이 애경사 시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고 부녀회는 50여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의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청년회(우정회)는 6년 전에 조직되었는데 20여명의 회원이 마을 일 돕기와 봉사활동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7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가구, 기름보일러 16가구, 심야전기보일러 1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동악2리 : 하야(下夜)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하야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6㎞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농토와 과수원이 펼쳐져 있다. 동쪽으로는 산포면 신도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황동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월산리 월정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중야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21가구, 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주위에 펼쳐져 있고, 나주호의 물과 3개의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에는 논 20㏊, 밭 15㏊가 있고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는데 밭에서는 수박ㆍ무 등을 재배하고 있고 8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임창빈이 15년 전에 시작하였다고 한다. 교통은 1일 3회 마을을 경유하는 광주-나주간 버스를 이용하고 있는데 3년 전에는 버스가 다니는 도로까지 걸어다녔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과 남평장을 주로 이용한다. 이밖에 마을 안에는 1994년 건립한 「동악노인회장임남순공적비 洞岳老人會長任南淳功績碑」가 마을회관 앞에 세워져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을 하배미라고도 부르는데 한자 표기 상 하야(下夜)라고 칭하게 되었다. 1789년 《호구총수》에 어천면 13개 마을 중 야산촌(夜山村)이라는 지명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현재의 동악1리와 2리에 포함되어 있는 상야ㆍ중야ㆍ하야가 분구되기 이전 옛 지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동악2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입향한 성씨는 풍천임씨(豊川任氏) 감찰공파(監察公派)로 파조는 시조로부터 13세손인 유손(由遜)이고 마을 입향조는 시조로부터 17세손인 기지(器之)의 후손들이다. 기지(1586~1656)는 중야마을에 입향하였으나 그의 후손들이 인근인 본 마을로 진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마을에는 기지의 후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 시조로부터 28세손인 임기순(남, 76세)을 비롯하여 여러 집이 살고 있다. 마을에는 풍천임씨 13, 신씨 2, 정씨 1, 노씨 1, 김씨 1, 송씨 1, 변씨 1, 강씨 1호 등 총 2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ㆍ상포계ㆍ부녀회ㆍ청년회(우정회)는 중야마을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 전기는 197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21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은 1가구가 마을회관에서 동악리새마을슈퍼를 운영하고 있으며 마을 농기계보관창고는 1동으로 1996년 건립하였고 마을회관은 1동 83㎡으로 1987년 건립하였다.
동악3리 : 황동(黃洞)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황동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4㎞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옆으로는 농토와 과수원이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중야마을, 서쪽으로는 춘정마을이 있고, 남쪽으로는 월산리가, 북쪽으로는 석전리가 있다. 마을은 17가구, 4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옆에 펼쳐져 있는데, 논 6㏊, 밭 15㏊이고,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나주호의 물과 6개의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으며 밭에서는 수박ㆍ무 등을 재배하고 5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다. 배는 이삼주가 20여년 전에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밖에 3가구가 하우스를 이용하여 고추ㆍ오이ㆍ수박 등을 재배하고 있고 김필곤이 3년 전부터 팽이버섯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교통은 광주-나주간, 광주-봉황간 버스를 이용하고 있으며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이밖에 마을 안에는 오래된 공동우물이 있고, 관음사라는 자그마한 절이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예전에는 마을을 황구(누런개)로 불렀으나 황동(黃洞)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여기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황동리(黃洞里)가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망악리(望岳里)ㆍ상야리(上夜里), 금마산면(金馬山面)의 황동(黃洞) 각 일부와 병합하여 동악리(洞岳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동악2리로 편제되어 있다가 2002년 9월 1일 동악 3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에 처음 입향한 성씨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영해군파(寧海君派, 파조는 ?)이다. 마을 입향조는 시조로부터 38세손인 기묵(麒?)으로 기묵의 부인은 창원정씨이고, 묘는 금천면 월산리에 있다. 기묵 이후 후손이 번창하여 현재 시조로부터 44세손인 이삼주(남, 67세)와 일가(一家)가 살고 있다. 마을에는 전주이씨 9, 김씨 4, 한씨 1, 정씨 1, 문씨 1, 양씨 1호 등 총 17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ㆍ상포계ㆍ부녀회ㆍ청년회(우정회)는 2리와 3리가 함께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이는 2002년 9월에 3구가 2리에서 분구되었기 때문이다. 전기는 197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가구, 기름보일러 15가구, 심야전기보일러 1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동악3리 : 춘정(春亭)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춘정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3.8㎞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금천-봉황간 지방도로가 있다. 동쪽으로는 황동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신천리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죽촌리가 있고, 북쪽으로는 광암리가 있다. 마을에는 11가구, 25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데, 논 4㏊, 밭 15㏊이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이고 나주호의 물과 4개의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으며 밭에서는 수박ㆍ무 등을 재배하고 있고 2가구가 배를 재배하는데 20여년 전부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밖에 1가구가 5년 전부터 오리사육을 하고 있다.
교통은 편리한 편으로 광주-나주간, 광주-봉황간 버스를 이용하고,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공공기관으로 금천남초등학교가 있다. 이밖에 강화최씨(江華崔氏) 문중 제각이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1991년에 건립하였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의 이름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마을을 지나다가 마을 어귀에 있는 정자나무가 마음에 들어 춘정(春亭)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789년 《호구총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 등 문헌에 마을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 마을은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웃하고 있는 황동마을에 속한 자연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복 이후 동악2리로 편제되어 있다가 2002년 9월 1일 동악3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김해김씨(金海金氏)인 헌수가 광암리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헌수는 제보자인 김영춘(남, 56세)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마을에는 김해김씨 4, 최씨 2, 나씨 1, 남씨 1, 임씨 1, 광산김씨 1, 조씨 1호 등 총 1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ㆍ상포계ㆍ부녀회ㆍ청년회(우정회)는 2구와 3구가 함께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는 2002년 9월에 동악 3리가 2리에서 분구되었기 때문이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가구, 기름보일러 10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활동으로는 건강원 1, 샷슈 1, 가든(식당) 1, 양어장 1개소가 있다.
동악1리 : 상야(上夜)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상야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6.5㎞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전주이씨 집성촌으로, 마을의 동쪽으로는 산포면 신도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석전리와 광암리가 있다. 남쪽으로는 중야마을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석전리와 산포면 매성리가 있다. 마을에는 50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ㆍ배ㆍ무ㆍ수박 등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과 산포면에 펼쳐져 있으며 농업용수는 산포면 신도리에 있는 신도제와 다도댐 물을 이용하고 있어 부족하지 않다. 논 1.5㏊,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7㏊가 있는데 밭에서는 주로 무와 수박을 재배하고 있으나 많은 토지가 배를 재배하기 위해 과수원으로 바뀌고 있다.
농경지 토양은 논이 점질토, 밭(과수원)이 사질토이다. 그리고 대부분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10여 농가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이병연이 1980년대 초에 재배하기 시작하였고 8년 전부터 2가구가 복숭아 재배를, 6년 전부터 1가구가 감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가구가 포도를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광주-산포면 화지리간 버스가 1일 4회 본 마을을 경유하고 있어 이를 이용한다. 이 버스는 5년 전부터 운행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전에는 산포면 내기리까지 걸어다녔다. 생필품 구입은 교통이 편리한 남평장을 주로 이용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 이름은 뒷동산 지형이 옥등괘벽이라 하여 상야(上夜)라 하였다고 한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는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상야리(上夜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망악리(望岳里)ㆍ상야리(上夜里), 금마산면(金馬山面)의 황동(黃洞) 각 일부와 병합하여 동악리(洞岳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동악1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만 1789년 《호구총수》의 기록에 어천면 13개 마을 중 야산촌(夜山村)이라는 지명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현재의 동악1리와 2리로 포함되어 있는 상야ㆍ중야ㆍ하야가 분구되기 이전 옛 지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을은 전주이씨 집성촌이다.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전주이씨는 완창대군파(完昌大君派)로 입향조는 시조로부터 30세손(파조로부터 10세손)인 몽득(夢得)이다. 부인은 진주강씨이고, 묘는 세지면에 있다. 그는 남평 표리촌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몽득 이후 후손이 번창하여 현재 마을에는 시조로부터 43세손인 이삼규(남, 69세)와 일가(一家)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에는 전주이씨 40, 박씨 2, 홍씨 2, 최씨ㆍ김씨ㆍ황씨ㆍ정씨ㆍ윤씨ㆍ유씨 등 각 1호 총 50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1월 5일~10일 사이에 날을 받아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을 결산하고 사업을 토론하며 2년을 주기로 임원을 선출한다. 상포계는 15년 전에 조직되었으며 35가구가 가입되어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부녀회는 10여년 전에 조직되었으며 4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7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에 1대 있었으며, 일반전화는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4가구, 기름보일러 43가구, 심야전기 3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은 구멍가게 1, 떡 방앗간 1개소가 있다고 10여년 전부터 창호를 제작하는 목원산업과 6년 전부터 팽이와 새송이버섯을 재배하는 우전농원 등이 있다. 이밖에 마을공동창고는 1동 99㎡으로 1970년대에 건립하였다.
동악2리 : 중야(中夜)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중야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6㎞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앞과 뒤편으로는 농토와 과수원이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산포면 신도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광암리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하야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상야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18가구, 40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과 뒤편에 펼쳐져 있으며, 나주호의 물과 10여 개의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논 30㏊, 밭 20㏊가 있는데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가가 1모작을 하고 있다. 밭에서는 수박ㆍ무ㆍ배추 등을 재배하고 있다. 16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15년 전부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밖에 광주사람이 2001년부터 마을에서 인삼을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3년 전부터 운행되는 광주-나주간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과 남평장을 주로 이용한다. 마을 내에는 현재 풍천임씨 효자각과 금동교회가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을 율산(栗山)ㆍ야산(夜山) 또는 중배미라고도 부르는데 한자 표기 상 중야(中夜)라고 칭하였다. 1789년 《호구총수》에 어천면 13개 마을 중 야산촌(夜山村)이라는 지명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현재의 동악1리와 2리로 포함되어 있는 상야ㆍ중야ㆍ하야가 분구되기 이전 옛 지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동악2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에 입향한 성씨는 풍천임씨(豊川任氏) 감찰공파(監察公派)로 파조는 시조로부터 13세손인 유손(由遜)이며 마을 입향조는 시조로부터 17세손인 기지(器之)이다. 기지(1586~1656)의 자는 국화(國華), 호는 신곡(薪谷)으로 황주부사와 한림대간 그리고 이조좌랑 헌납을 역임하였다. 부인은 숙인 평양조씨이고 묘는 봉황면 오림리 서당동에 있다. 그는 경기도 양주에서 이거하였으며, 과거에는 본 마을에 율봉사(栗峰祠)가 있어 배향되었으나 오래되어 훼철되었다. 현재 중야와 하야마을에는 기지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시조로부터 28세손인 임기순(남, 76세)을 비롯하여 일가(一家)가 살고 있다. 문중관련 유적으로는 효자(孝子) 임세기(任世耆)의 정려각이 있다. 마을에는 풍천임씨 14, 황씨 2, 이씨 1, 남씨 1호 등 총 1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2구 전체적으로 12월 30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의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을 한다. 이 마을의 모임은 2구 전체적으로 조직되었는데 상포계는 40여명의 계원이 애경사 시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고 부녀회는 50여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그리고 마을 일 돕기 등의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청년회(우정회)는 6년 전에 조직되었는데 20여명의 회원이 마을 일 돕기와 봉사활동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7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가구, 기름보일러 16가구, 심야전기보일러 1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동악2리 : 하야(下夜)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하야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6㎞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농토와 과수원이 펼쳐져 있다. 동쪽으로는 산포면 신도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황동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월산리 월정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중야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21가구, 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주위에 펼쳐져 있고, 나주호의 물과 3개의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에는 논 20㏊, 밭 15㏊가 있고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는데 밭에서는 수박ㆍ무 등을 재배하고 있고 8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임창빈이 15년 전에 시작하였다고 한다. 교통은 1일 3회 마을을 경유하는 광주-나주간 버스를 이용하고 있는데 3년 전에는 버스가 다니는 도로까지 걸어다녔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과 남평장을 주로 이용한다. 이밖에 마을 안에는 1994년 건립한 「동악노인회장임남순공적비 洞岳老人會長任南淳功績碑」가 마을회관 앞에 세워져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을 하배미라고도 부르는데 한자 표기 상 하야(下夜)라고 칭하게 되었다. 1789년 《호구총수》에 어천면 13개 마을 중 야산촌(夜山村)이라는 지명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현재의 동악1리와 2리에 포함되어 있는 상야ㆍ중야ㆍ하야가 분구되기 이전 옛 지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동악2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입향한 성씨는 풍천임씨(豊川任氏) 감찰공파(監察公派)로 파조는 시조로부터 13세손인 유손(由遜)이고 마을 입향조는 시조로부터 17세손인 기지(器之)의 후손들이다. 기지(1586~1656)는 중야마을에 입향하였으나 그의 후손들이 인근인 본 마을로 진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마을에는 기지의 후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 시조로부터 28세손인 임기순(남, 76세)을 비롯하여 여러 집이 살고 있다. 마을에는 풍천임씨 13, 신씨 2, 정씨 1, 노씨 1, 김씨 1, 송씨 1, 변씨 1, 강씨 1호 등 총 2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ㆍ상포계ㆍ부녀회ㆍ청년회(우정회)는 중야마을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 전기는 197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21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은 1가구가 마을회관에서 동악리새마을슈퍼를 운영하고 있으며 마을 농기계보관창고는 1동으로 1996년 건립하였고 마을회관은 1동 83㎡으로 1987년 건립하였다.
동악3리 : 황동(黃洞)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황동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4㎞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옆으로는 농토와 과수원이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중야마을, 서쪽으로는 춘정마을이 있고, 남쪽으로는 월산리가, 북쪽으로는 석전리가 있다. 마을은 17가구, 4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옆에 펼쳐져 있는데, 논 6㏊, 밭 15㏊이고,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나주호의 물과 6개의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으며 밭에서는 수박ㆍ무 등을 재배하고 5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다. 배는 이삼주가 20여년 전에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밖에 3가구가 하우스를 이용하여 고추ㆍ오이ㆍ수박 등을 재배하고 있고 김필곤이 3년 전부터 팽이버섯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교통은 광주-나주간, 광주-봉황간 버스를 이용하고 있으며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이밖에 마을 안에는 오래된 공동우물이 있고, 관음사라는 자그마한 절이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예전에는 마을을 황구(누런개)로 불렀으나 황동(黃洞)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여기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황동리(黃洞里)가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망악리(望岳里)ㆍ상야리(上夜里), 금마산면(金馬山面)의 황동(黃洞) 각 일부와 병합하여 동악리(洞岳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동악2리로 편제되어 있다가 2002년 9월 1일 동악 3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에 처음 입향한 성씨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영해군파(寧海君派, 파조는 ?)이다. 마을 입향조는 시조로부터 38세손인 기묵(麒?)으로 기묵의 부인은 창원정씨이고, 묘는 금천면 월산리에 있다. 기묵 이후 후손이 번창하여 현재 시조로부터 44세손인 이삼주(남, 67세)와 일가(一家)가 살고 있다. 마을에는 전주이씨 9, 김씨 4, 한씨 1, 정씨 1, 문씨 1, 양씨 1호 등 총 17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ㆍ상포계ㆍ부녀회ㆍ청년회(우정회)는 2리와 3리가 함께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이는 2002년 9월에 3구가 2리에서 분구되었기 때문이다. 전기는 197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가구, 기름보일러 15가구, 심야전기보일러 1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동악3리 : 춘정(春亭)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춘정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3.8㎞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금천-봉황간 지방도로가 있다. 동쪽으로는 황동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신천리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죽촌리가 있고, 북쪽으로는 광암리가 있다. 마을에는 11가구, 25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데, 논 4㏊, 밭 15㏊이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이고 나주호의 물과 4개의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으며 밭에서는 수박ㆍ무 등을 재배하고 있고 2가구가 배를 재배하는데 20여년 전부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밖에 1가구가 5년 전부터 오리사육을 하고 있다.
교통은 편리한 편으로 광주-나주간, 광주-봉황간 버스를 이용하고,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공공기관으로 금천남초등학교가 있다. 이밖에 강화최씨(江華崔氏) 문중 제각이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1991년에 건립하였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의 이름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마을을 지나다가 마을 어귀에 있는 정자나무가 마음에 들어 춘정(春亭)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789년 《호구총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 등 문헌에 마을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 마을은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웃하고 있는 황동마을에 속한 자연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복 이후 동악2리로 편제되어 있다가 2002년 9월 1일 동악3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김해김씨(金海金氏)인 헌수가 광암리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헌수는 제보자인 김영춘(남, 56세)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마을에는 김해김씨 4, 최씨 2, 나씨 1, 남씨 1, 임씨 1, 광산김씨 1, 조씨 1호 등 총 1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ㆍ상포계ㆍ부녀회ㆍ청년회(우정회)는 2구와 3구가 함께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는 2002년 9월에 동악 3리가 2리에서 분구되었기 때문이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가구, 기름보일러 10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활동으로는 건강원 1, 샷슈 1, 가든(식당) 1, 양어장 1개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