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전리
- 날짜
- 202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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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0
- 등록자
- 관리자
석전1리 : 유전(酉田)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유전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4㎞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풍천임씨 집성촌으로 산포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쪽으로는 산포면이 있고, 서쪽으로는 석전리 2구와 3구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동악리가 있고, 북쪽으로는 유곡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40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ㆍ배ㆍ축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 속칭 ‘유전들’에 펼쳐져 있는데, 논 25㏊, 밭 30㏊로 유전제와 나주호의 물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논)와 황토(밭, 과수원)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밭과 과수원에서는 배ㆍ복숭아ㆍ깨ㆍ고추 등을 주로 재배하고 있는데 15~20년 전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하여 이용하고 있다. 20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임판재(작고)가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하였고 복숭아는 1가구만이 20여년 전부터 재배해 오고 있으나 과거에는 많은 농가에서 재배하였다. 그러나 10여년 전부터 복숭아 재배를 그만두고 모두 배 재배로 전환하였다. 가격이 하락되었기 때문이다. 이밖에 5가구가 젖소를 가구 당 100두씩 총 500여두 사육하고 있다. 교통은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유곡마을까지 걸어나가 버스를 이용하고 있고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과 남평장을 주로 이용한다. 이밖에 마을에 백련사(화엄종)가 소재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의 지형이 반월형으로 생겼다 하여 달밭(月田)이라 했으나 달밭의 발음이 닭밭으로 변형되어 불리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마을 동편에 있는 유전제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태라 하여 유전(酉田)이라 개칭하였다.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유전리(酉田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천석동(千石洞)ㆍ유전리(酉田里)ㆍ상야리(上夜里) 일부와 병합하여 석전리(石田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석전리 1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과거 이곳은 전주이씨의 터였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에 전주이씨는 거주하고 있지 않고 선산만이 남아 있다. 전주이씨 이후 풍천임씨가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풍천임씨(豊川任氏)는 감찰공파(監察公派)이다. 시조는 온(溫)이고 파조는 시조로부터 13세손인 유손(由遜)이며, 마을 입향조는 시조로부터 19세손인 세정(世鼎)이다. 세정(1647~1723)은 동악리 중야마을로 입향한 기지(器之)의 둘째 손자이다. 세정의 자는 대수(大受)이고 부인은 연안김씨와 덕수이씨이며 묘는 경기도에 있다. 세정 이후 자손들이 번창하여 현재 마을에는 시조로부터 28세손인 임용순(남, 85세, 제보자)과 일가(一家)들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에는 풍천임씨 30, 김씨 4, 박씨 2, 신씨 2, 손씨 1, 전씨 1호 등 총 4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2월 중순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의 결산과 마을 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을 선출한다. 동계는 1940년대에 조직되었는데, 40가구가 가입하여 마을발전과 친목 그리고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위친계는 193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30명의 계원이 애경사 시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30여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마을 일 돕기 그리고 경로잔치 등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70년대에 조직하여 6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마을 사업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40가구이다.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공동창고는 1동 165㎡으로 1970년대에 건립하였다. 마을회관은 1동 99㎡으로 1997년 건립하였으며 노인정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동각(우산각)은 건립중에 있다. 이밖에 마을에서는 매년 5월 8일 부녀회 주관으로 경로잔치를 실시하고 있다.
석전1리 : 유곡(油谷)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유곡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3.8㎞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포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쪽으로는 산포면이 있고, 서쪽으로는 석전2리와 3리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유전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촌곡리가 있다. 마을에는 16가구, 35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배이다. 농경지는 논 0.2㏊, 밭 15㏊가 마을 앞에 펼쳐져 있고, 유전제와 나주호의 물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논)와 황토(밭, 과수원)이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고, 밭과 과수원에서는 배를 주로 재배하고 있다. 15~20년 전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하여 이용하는 변화상을 보이고 있다.
현재 14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하였고 복숭아는 20여년 전부터 재배해 왔다고 하나 10여년 전부터 모두 배 재배로 전환하였다. 복숭아를 수입하여 가격이 하락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밖에 1가구가 돼지를 100여 마리 사육하고 있다. 교통은 좋은 편이다. 마을 뒤편이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으로 이곳 정류소에서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교통이 편리한 나주장과 남평장을 주로 이용한다. 이밖에 금천-시계간 도로 개설 때 문화재 발굴조사(2001~2002년 목포대학교박물관ㆍ동신대학교박물관 공동실시)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인 석기가 다량 발굴되었는데, 토기가마 1기(삼국시대), 수혈주거지 3기(삼국시대) 등이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이름을 과거에는 ‘지름실’이라 하였다. 이는 이곳에 디딜방아를 이용하여 기름을 짜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한자 표기로 유곡(油谷)으로 바꾸었다. 1789년 《호구총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 등에 마을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 마을은 현재처럼 과거에도 마을의 규모가 크지 않아 이웃하고 있는 유전마을에 속한 자연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석전1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에는 신안주씨 5, 김씨 3, 이씨 2, 최씨 1, 고씨 1, 박씨 1, 유씨 1, 전씨 1, 홍씨 1호 등 총 16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유전마을과 함께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16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 공동창고는 1동 50㎡으로 1970년대에 건립하였다.
석전2리 : 천석(千石)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천석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2.5㎞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유전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오강2리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광암1리가 있고, 북쪽으로는 죽등마을이 있다. 58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논 40㏊, 밭 20㏊로 마을 앞과 옆에 펼쳐져 있다. 마을 옆에 위치한 ‘각시앙굴(들)’은 논 가운데 우물이 있었는데 새색시가 목욕을 하다 빠져 죽어서 그때부터 각시앙굴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농경지는 천석제와 100여 개의 개인 관정을 이용하여 논과 과수원의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논)와 황토(밭과 과수원)이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그리고 50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정옥기(작고)가 30여년 전에 처음 시작하였다. 또한 마을의 13가구가 하우스를 이용하여 상추ㆍ오이ㆍ수박 등을 재배하고 있는데 이전에는 더 많은 가구가 하우스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으나 5년 전부터 가격하락과 노동력 부족으로 하우스 농사를 그만두고 배 재배로 전환하였다. 이밖에 1가구가 젖소를 70여두 사육하고 있고, 3가구가 한우를 90여두 사육하고 있다. 교통은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죽등마을까지 걸어나가 버스를 이용하고,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과 남평장을 주로 이용한다.
이 마을은 과거 어천면사무소가 위치한 행정중심지이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그 면사무소의 건물은 모두 해체되고 터만 남아 있다. 이외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1월 14일 저녁 7시에 노인회 주관으로 마을회관 옆에 있는 공동우물에서 우물제(식수제)를 지내고 있다. 제관은 1명이고, 풍물을 치며 노인회 자금으로 지낸다. 그리고 제의 대상이 되는 공동우물은 간이상수도로 개조되어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키(치)형국이라 한다. 마을의 우물이 석간수이며 그 수원이 풍부하여 천석(泉石)이라고 불리어 왔는데 일제강점기 때 천석(千石)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여기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천석리(千石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천석동(千石洞)ㆍ유전리(酉田里)ㆍ상야리(上夜里) 일부와 병합하여 석전리(石田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석전리 2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처음으로 입향한 성씨는 신안주씨 안천군파(능성파)이다. 시조로부터 20세손인 주철이 과거에 급제하여 함경도에서 나주에 부임하게 되었으며 이후 시조로부터 23세손인 주계헌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현재 마을에는 시조로부터 31세손인 주찬식(남, 마을이장, 제보자)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에는 신안주씨 2, 김씨 10, 정씨 10, 박씨 7, 최씨 6, 이씨 5, 강씨 4, 나씨 3, 장씨 3, 배씨 2, 서씨 2, 조씨 2, 백씨 1, 윤씨 1호 등 총 5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3월 말에 개최하는 농협보답대회가 끝난 후 시행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의 결산과 마을 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을 선출한다. 위친계는 196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27명의 계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고 젊은 사람들로 구성된 또 다른 위친계는 1995년에 조직되었으며, 20명의 계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천석과 죽등마을이 함께 197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30여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었으나 현재는 회원이 없어 유명무실한 상태이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3가구, 기름보일러 54가구, 심야전기보일러 1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공동창고는 1동 60㎡으로 1970년대에 건립하였다. 마을회관은 1동 60㎡으로 1990년대 중반에 건립하였다. 동각(우산각) 1동 있다. 이밖에 1999년 태풍 올가로 40여 동의 하우스가 파손되는 피해가 발생하였고, 2002년 태풍 루사로 과수의 낙과 피해가 심하였다.
석전2리 : 죽등(竹嶝)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죽등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2.4㎞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유전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수랑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천석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촌곡리 3구가 있다. 20가구, 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배이다. 밭(과수원) 15㏊가 있는데 토양은 황토로 배농사짓기에 적당하다. 18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고 정 기(작고)가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복숭아는 1가구가 40여년 전부터 재배해 오고 있고 1가구가 돼지를 100여 마리 사육하고 있다. 교통은 좋은 편이다. 마을 뒤편에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이 지나므로 이곳 정류소에서 버스를 이용한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과 남평장을 주로 이용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과거에는 ‘대포리등’ 또는 ‘큰등’이라고 하였다. 이는 이곳에 큰 등성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마을 주변에 대나무가 많아 죽등(竹嶝)으로 개칭하였다. 1789년 《호구총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 등의 문헌에는 이 마을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 마을은 현재처럼 과거에도 규모가 크지 않아 천석마을에 속한 자연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복후 본 마을은 석전2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로는 과거 마을 주변은 대부분 산이었는데 천석마을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거한 후 산을 과수원으로 개간하여 살았다고 한다. 마을에는 정씨 5, 김씨 5, 나씨 2, 박씨 2, 백씨 1, 구씨 1, 조씨 1, 장씨 1, 도씨 1, 임씨 1호 등 총 20가구가 거주하고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 총회와 부녀회는 천석마을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20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석전3리 : 수량(水良)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수량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1㎞ 지점에 위치하는데, 과수 농사 때문에 마을의 가구가 분산되어 길게 늘어서 있다. 동쪽으로는 죽등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오강리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광암리가 있고, 북쪽으로는 촌곡리가 있다. 36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배이다. 농경지는 논 3.5㏊, 밭 10㏊로 마을 앞에 펼쳐져 있으며, 나주호와 관정을 이용하여 논과 과수원의 농업용수를 관개하고 있다.
그리고 33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이재환이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하였다. 3가구가 포도를 재배하고 있는데 손백용이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하였다. 이밖에 1가구가 5~6년 전부터 하우스를 이용하여 장미를 재배하고 있다. 또한 1940년대 후반부터 복숭아 재배를 많이 하였다고 하는데 20여년 전부터 가격 하락 등으로 배 재배로 전환하였다. 교통은 좋은 편이다. 마을 뒤편에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이 통과하여 이곳 정류소에서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과 남평장을 주로 이용한다.
이밖에 배박물관 근처에 10여기의 비석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1기 만이 남아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까지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하며, 1940년대 초까지 서당이 개설되어 운영하였는데 이홍수(작고)가 훈장으로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 소재하는 공공기관으로는 (구)나주배박물관이 있고, 공공건물로는 나주배유통센타가 있다. 배박물관 안에는 마쓰후지 덴노쿠(松藤傳六)의 비석이 깨어진 채로 있고 「박준석선생공적비 朴俊奭先生功績碑」가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과거 마을 인근에 수렁이 많아 수량(水良)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1789년 《호구총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 등 문헌에 마을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 마을은 규모가 크지 않아 이웃하고 있는 석전2리 천석마을에 속한 자연마을이었다가 약 15년 전에 석전3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에는 경주이씨 - 천안전씨 - 전주이씨 순으로 입향하였으며, 과거에는 산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과수원으로 개간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경주이씨는 익재공파(益齋公派)로 입향조는 파조로부터 41세손인 홍수이다. 홍수는 일제강점기 때 인근인 촌곡리에서 과수재배를 위해 이곳으로 이거하였고 그는 이곳에서 서당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현재 그의 아들인 재환(남, 73세, 제보자)이 거주하고 있으며, 정착지는 석전리 423-11번지이다.
마을에는 경주이씨 2, 김씨 12, 전주이씨 5, 박씨 4, 문씨 3, 천안전씨 2, 손씨 2, 정씨 2, 전씨 2, 나씨 1, 손씨 1 호 등 총 36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로는 과거 마을 주변은 대부분 산이었는데 천석마을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거한 후 산을 과수원으로 개간하여 살았다고 한다. 마을에는 정씨 5, 김씨 5, 나씨 2, 박씨 2, 백씨 1, 구씨 1, 조씨 1, 장씨 1, 도씨 1, 임씨 1호 등 총 20가구가 거주하고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12월 30일에 개최하여 마을 자금의 결산과 마을 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을 선출한다. 상포계는 과거에 조직되었으며, 25가구가 가입되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청년회는 10여년 전에 조직되었으며 10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마을 사업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30가구이며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활동으로는 주유소 1, 카센터 1, 식당 1, 나주배판매장 1개소 등이 있다. 이밖에 동각(우산각)은 1동으로 15년 전에 건립하였다. 그리고 1999년 태풍 올가와 2002년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과수의 낙과 피해가 심하였다.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유전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4㎞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풍천임씨 집성촌으로 산포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쪽으로는 산포면이 있고, 서쪽으로는 석전리 2구와 3구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동악리가 있고, 북쪽으로는 유곡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40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ㆍ배ㆍ축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 속칭 ‘유전들’에 펼쳐져 있는데, 논 25㏊, 밭 30㏊로 유전제와 나주호의 물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논)와 황토(밭, 과수원)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밭과 과수원에서는 배ㆍ복숭아ㆍ깨ㆍ고추 등을 주로 재배하고 있는데 15~20년 전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하여 이용하고 있다. 20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임판재(작고)가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하였고 복숭아는 1가구만이 20여년 전부터 재배해 오고 있으나 과거에는 많은 농가에서 재배하였다. 그러나 10여년 전부터 복숭아 재배를 그만두고 모두 배 재배로 전환하였다. 가격이 하락되었기 때문이다. 이밖에 5가구가 젖소를 가구 당 100두씩 총 500여두 사육하고 있다. 교통은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유곡마을까지 걸어나가 버스를 이용하고 있고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과 남평장을 주로 이용한다. 이밖에 마을에 백련사(화엄종)가 소재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의 지형이 반월형으로 생겼다 하여 달밭(月田)이라 했으나 달밭의 발음이 닭밭으로 변형되어 불리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마을 동편에 있는 유전제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태라 하여 유전(酉田)이라 개칭하였다.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유전리(酉田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천석동(千石洞)ㆍ유전리(酉田里)ㆍ상야리(上夜里) 일부와 병합하여 석전리(石田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석전리 1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과거 이곳은 전주이씨의 터였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에 전주이씨는 거주하고 있지 않고 선산만이 남아 있다. 전주이씨 이후 풍천임씨가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풍천임씨(豊川任氏)는 감찰공파(監察公派)이다. 시조는 온(溫)이고 파조는 시조로부터 13세손인 유손(由遜)이며, 마을 입향조는 시조로부터 19세손인 세정(世鼎)이다. 세정(1647~1723)은 동악리 중야마을로 입향한 기지(器之)의 둘째 손자이다. 세정의 자는 대수(大受)이고 부인은 연안김씨와 덕수이씨이며 묘는 경기도에 있다. 세정 이후 자손들이 번창하여 현재 마을에는 시조로부터 28세손인 임용순(남, 85세, 제보자)과 일가(一家)들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에는 풍천임씨 30, 김씨 4, 박씨 2, 신씨 2, 손씨 1, 전씨 1호 등 총 4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2월 중순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의 결산과 마을 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을 선출한다. 동계는 1940년대에 조직되었는데, 40가구가 가입하여 마을발전과 친목 그리고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위친계는 193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30명의 계원이 애경사 시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30여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마을 일 돕기 그리고 경로잔치 등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70년대에 조직하여 6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마을 사업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40가구이다.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공동창고는 1동 165㎡으로 1970년대에 건립하였다. 마을회관은 1동 99㎡으로 1997년 건립하였으며 노인정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동각(우산각)은 건립중에 있다. 이밖에 마을에서는 매년 5월 8일 부녀회 주관으로 경로잔치를 실시하고 있다.
석전1리 : 유곡(油谷)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유곡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3.8㎞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포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쪽으로는 산포면이 있고, 서쪽으로는 석전2리와 3리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유전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촌곡리가 있다. 마을에는 16가구, 35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배이다. 농경지는 논 0.2㏊, 밭 15㏊가 마을 앞에 펼쳐져 있고, 유전제와 나주호의 물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논)와 황토(밭, 과수원)이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고, 밭과 과수원에서는 배를 주로 재배하고 있다. 15~20년 전부터 밭을 과수원으로 용도 변경하여 이용하는 변화상을 보이고 있다.
현재 14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하였고 복숭아는 20여년 전부터 재배해 왔다고 하나 10여년 전부터 모두 배 재배로 전환하였다. 복숭아를 수입하여 가격이 하락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밖에 1가구가 돼지를 100여 마리 사육하고 있다. 교통은 좋은 편이다. 마을 뒤편이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으로 이곳 정류소에서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교통이 편리한 나주장과 남평장을 주로 이용한다. 이밖에 금천-시계간 도로 개설 때 문화재 발굴조사(2001~2002년 목포대학교박물관ㆍ동신대학교박물관 공동실시)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인 석기가 다량 발굴되었는데, 토기가마 1기(삼국시대), 수혈주거지 3기(삼국시대) 등이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이름을 과거에는 ‘지름실’이라 하였다. 이는 이곳에 디딜방아를 이용하여 기름을 짜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한자 표기로 유곡(油谷)으로 바꾸었다. 1789년 《호구총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 등에 마을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 마을은 현재처럼 과거에도 마을의 규모가 크지 않아 이웃하고 있는 유전마을에 속한 자연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석전1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에는 신안주씨 5, 김씨 3, 이씨 2, 최씨 1, 고씨 1, 박씨 1, 유씨 1, 전씨 1, 홍씨 1호 등 총 16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유전마을과 함께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 초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16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 공동창고는 1동 50㎡으로 1970년대에 건립하였다.
석전2리 : 천석(千石)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천석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2.5㎞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유전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오강2리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광암1리가 있고, 북쪽으로는 죽등마을이 있다. 58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논 40㏊, 밭 20㏊로 마을 앞과 옆에 펼쳐져 있다. 마을 옆에 위치한 ‘각시앙굴(들)’은 논 가운데 우물이 있었는데 새색시가 목욕을 하다 빠져 죽어서 그때부터 각시앙굴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농경지는 천석제와 100여 개의 개인 관정을 이용하여 논과 과수원의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논)와 황토(밭과 과수원)이며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그리고 50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정옥기(작고)가 30여년 전에 처음 시작하였다. 또한 마을의 13가구가 하우스를 이용하여 상추ㆍ오이ㆍ수박 등을 재배하고 있는데 이전에는 더 많은 가구가 하우스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으나 5년 전부터 가격하락과 노동력 부족으로 하우스 농사를 그만두고 배 재배로 전환하였다. 이밖에 1가구가 젖소를 70여두 사육하고 있고, 3가구가 한우를 90여두 사육하고 있다. 교통은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죽등마을까지 걸어나가 버스를 이용하고,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과 남평장을 주로 이용한다.
이 마을은 과거 어천면사무소가 위치한 행정중심지이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그 면사무소의 건물은 모두 해체되고 터만 남아 있다. 이외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1월 14일 저녁 7시에 노인회 주관으로 마을회관 옆에 있는 공동우물에서 우물제(식수제)를 지내고 있다. 제관은 1명이고, 풍물을 치며 노인회 자금으로 지낸다. 그리고 제의 대상이 되는 공동우물은 간이상수도로 개조되어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키(치)형국이라 한다. 마을의 우물이 석간수이며 그 수원이 풍부하여 천석(泉石)이라고 불리어 왔는데 일제강점기 때 천석(千石)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여기에 어천면(魚川面) 31개 마을 중 천석리(千石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어천면의 천석동(千石洞)ㆍ유전리(酉田里)ㆍ상야리(上夜里) 일부와 병합하여 석전리(石田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석전리 2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처음으로 입향한 성씨는 신안주씨 안천군파(능성파)이다. 시조로부터 20세손인 주철이 과거에 급제하여 함경도에서 나주에 부임하게 되었으며 이후 시조로부터 23세손인 주계헌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현재 마을에는 시조로부터 31세손인 주찬식(남, 마을이장, 제보자)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에는 신안주씨 2, 김씨 10, 정씨 10, 박씨 7, 최씨 6, 이씨 5, 강씨 4, 나씨 3, 장씨 3, 배씨 2, 서씨 2, 조씨 2, 백씨 1, 윤씨 1호 등 총 5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3월 말에 개최하는 농협보답대회가 끝난 후 시행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의 결산과 마을 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을 선출한다. 위친계는 196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27명의 계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고 젊은 사람들로 구성된 또 다른 위친계는 1995년에 조직되었으며, 20명의 계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녀회는 천석과 죽등마을이 함께 197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30여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친목, 마을 일 돕기 등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었으나 현재는 회원이 없어 유명무실한 상태이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3가구, 기름보일러 54가구, 심야전기보일러 1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공동창고는 1동 60㎡으로 1970년대에 건립하였다. 마을회관은 1동 60㎡으로 1990년대 중반에 건립하였다. 동각(우산각) 1동 있다. 이밖에 1999년 태풍 올가로 40여 동의 하우스가 파손되는 피해가 발생하였고, 2002년 태풍 루사로 과수의 낙과 피해가 심하였다.
석전2리 : 죽등(竹嶝)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죽등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2.4㎞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유전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수랑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천석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촌곡리 3구가 있다. 20가구, 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배이다. 밭(과수원) 15㏊가 있는데 토양은 황토로 배농사짓기에 적당하다. 18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고 정 기(작고)가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복숭아는 1가구가 40여년 전부터 재배해 오고 있고 1가구가 돼지를 100여 마리 사육하고 있다. 교통은 좋은 편이다. 마을 뒤편에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이 지나므로 이곳 정류소에서 버스를 이용한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과 남평장을 주로 이용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과거에는 ‘대포리등’ 또는 ‘큰등’이라고 하였다. 이는 이곳에 큰 등성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마을 주변에 대나무가 많아 죽등(竹嶝)으로 개칭하였다. 1789년 《호구총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 등의 문헌에는 이 마을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 마을은 현재처럼 과거에도 규모가 크지 않아 천석마을에 속한 자연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복후 본 마을은 석전2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로는 과거 마을 주변은 대부분 산이었는데 천석마을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거한 후 산을 과수원으로 개간하여 살았다고 한다. 마을에는 정씨 5, 김씨 5, 나씨 2, 박씨 2, 백씨 1, 구씨 1, 조씨 1, 장씨 1, 도씨 1, 임씨 1호 등 총 20가구가 거주하고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 총회와 부녀회는 천석마을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20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석전3리 : 수량(水良)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수량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1㎞ 지점에 위치하는데, 과수 농사 때문에 마을의 가구가 분산되어 길게 늘어서 있다. 동쪽으로는 죽등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오강리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광암리가 있고, 북쪽으로는 촌곡리가 있다. 36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배이다. 농경지는 논 3.5㏊, 밭 10㏊로 마을 앞에 펼쳐져 있으며, 나주호와 관정을 이용하여 논과 과수원의 농업용수를 관개하고 있다.
그리고 33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이재환이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하였다. 3가구가 포도를 재배하고 있는데 손백용이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하였다. 이밖에 1가구가 5~6년 전부터 하우스를 이용하여 장미를 재배하고 있다. 또한 1940년대 후반부터 복숭아 재배를 많이 하였다고 하는데 20여년 전부터 가격 하락 등으로 배 재배로 전환하였다. 교통은 좋은 편이다. 마을 뒤편에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이 통과하여 이곳 정류소에서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과 남평장을 주로 이용한다.
이밖에 배박물관 근처에 10여기의 비석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1기 만이 남아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까지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하며, 1940년대 초까지 서당이 개설되어 운영하였는데 이홍수(작고)가 훈장으로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 소재하는 공공기관으로는 (구)나주배박물관이 있고, 공공건물로는 나주배유통센타가 있다. 배박물관 안에는 마쓰후지 덴노쿠(松藤傳六)의 비석이 깨어진 채로 있고 「박준석선생공적비 朴俊奭先生功績碑」가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과거 마을 인근에 수렁이 많아 수량(水良)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1789년 《호구총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4년에 행해진 행정구역개편 등 문헌에 마을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 마을은 규모가 크지 않아 이웃하고 있는 석전2리 천석마을에 속한 자연마을이었다가 약 15년 전에 석전3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에는 경주이씨 - 천안전씨 - 전주이씨 순으로 입향하였으며, 과거에는 산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과수원으로 개간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경주이씨는 익재공파(益齋公派)로 입향조는 파조로부터 41세손인 홍수이다. 홍수는 일제강점기 때 인근인 촌곡리에서 과수재배를 위해 이곳으로 이거하였고 그는 이곳에서 서당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현재 그의 아들인 재환(남, 73세, 제보자)이 거주하고 있으며, 정착지는 석전리 423-11번지이다.
마을에는 경주이씨 2, 김씨 12, 전주이씨 5, 박씨 4, 문씨 3, 천안전씨 2, 손씨 2, 정씨 2, 전씨 2, 나씨 1, 손씨 1 호 등 총 36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로는 과거 마을 주변은 대부분 산이었는데 천석마을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거한 후 산을 과수원으로 개간하여 살았다고 한다. 마을에는 정씨 5, 김씨 5, 나씨 2, 박씨 2, 백씨 1, 구씨 1, 조씨 1, 장씨 1, 도씨 1, 임씨 1호 등 총 20가구가 거주하고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12월 30일에 개최하여 마을 자금의 결산과 마을 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을 선출한다. 상포계는 과거에 조직되었으며, 25가구가 가입되어 애경사 때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청년회는 10여년 전에 조직되었으며 10명의 회원이 봉사활동과 마을 사업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30가구이며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활동으로는 주유소 1, 카센터 1, 식당 1, 나주배판매장 1개소 등이 있다. 이밖에 동각(우산각)은 1동으로 15년 전에 건립하였다. 그리고 1999년 태풍 올가와 2002년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과수의 낙과 피해가 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