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가리
- 날짜
- 2020.04.16
- 조회수
- 1070
- 등록자
- 관리자
신가1리 : 신촌(新村)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신촌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2.5㎞ 지점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송촌이 있고, 서쪽으로는 원곡1리 산당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촌곡1리 본촌이 있고, 북쪽으로는 이내와 동섬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70가구, 18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논 6㏊와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40㏊가 있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배와 포도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과 지석강변에 펼쳐져 있으며, 지석강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54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하니하라(埴原)라는 사람이 마을에 들어와 재배를 시작하였고 1960년대 초 정부에서 무상으로 배 묘목을 나누어 주어 35가구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배를 재배하였다. 포도는 28가구가 40여년 전에 재배하기 시작하였으며 복숭아는 2가구가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1일 2회(아침과 저녁) 버스가 마을 앞을 지나고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금천면 삼거리(사거리)로 걸어 나가 버스를 이용한다.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마을 입구에는 「참봉김해김창식처공인진주강씨정열비 參奉金海金昌植妻恭人晉州姜氏貞烈碑」가 있으며, 마을회관 앞에는 오래된 공동우물이 있었는데 현재는 메워진 상태이다. 그리고 배를 재배하던 일본인의 집이 현재 남아 있어 김동주가 지붕을 개조하여 거주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말이 달리는 형국이라 하여 인근에서는 지마매(또는 금마매)로 불리우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마을이 폐허가 되었는데 창녕조씨를 비롯하여 여러 성씨가 입향하면서 새로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여 신촌(新村)이라 칭하게 되었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호구총수》(1789년)로 금마산면(金馬山面)의 4개 마을 중 한 마을로 ‘신촌(新村)’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금마산면 12개 마을 중 신촌리(新村里)라는 지명이 보이고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금마산면의 당가리(唐加里)ㆍ송촌(松村)ㆍ신촌리(新村里) 일부와 광주군(光州郡) 대지면(大枝面) 이천리(伊川里)가 병합하여 신가리(新加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신가리 1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염씨가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하는데 그 증거로 마을 인근에 지금도 염씨의 선산이 자리하고 있다. 그후 신씨들이 이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마을은 폐허가 되었고 이후 창녕조씨가 들어왔고, 다음으로 전주이씨와 한양조씨 등 여러 성씨가 이거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제보자 : 조성근).
입향한 창녕조씨(昌寧曺氏)는 시랑공파(侍郞公派)로 파조는 한룡(漢龍)이고, 마을에는 파조로부터 13세손인 조영규(남, 71세, 제보자)가 살고 있다. 그러나 제보자는 어느 조상이 언제 이 마을에 들어왔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다. 마을에는 창녕조씨 3, 이씨 16, 김씨 15, 조씨 9, 한양조씨 6, 박씨 4, 남씨 3, 배씨 2, 정씨 2, 황씨 2, 고씨ㆍ강씨ㆍ나씨ㆍ손씨ㆍ장씨ㆍ전씨ㆍ최씨ㆍ홍씨 각 1호 등 총 7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음력 12월 15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 등을 한다. 마을에서는 총회를 동계라고 하며 총회가 끝나면 5명의 유사가 음식을 준비하여 마을잔치를 행한다. 신송회는 1980년대에 조직되었는데 48명의 회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와 유사 10명을 중심으로 5월 8일 어버이날 행사를 개최한다.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3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마을 일 돕기 그리고 ‘며느리봉사대’를 조직하여 독거노인들을 봉양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95년 재조직되었으며 15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사업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70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은 주유소 1, 샷슈 1호 등이다. 마을회관은 1동 76㎡으로 1996년 건립하였으며 노인정과 사무실로 이용하고 있다. 동각은 지마정(芝馬亭)이란 명칭으로 1994년 건립하였다. 지마정 앞에는 가 있는데 추강이 우산각 건립에 공이 있어 마을 주민들이 세운 것이다.
신가2리 : 송촌(松村)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송촌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2.5㎞ 지점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유촌이 있고, 서쪽으로는 신촌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촌곡리 2구 추동과 신추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이천마을이 있다. 그리고 지난날 마을 인근 ‘절골’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18가구, 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논 3㏊, 과수원과 밭 10㏊가 있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과 지석강변에 펼쳐져 있고, 지석강과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논과 밭은 대부분 과수원으로 변경하여 이용하고 있으며, 토양은 점질토와 사질토로 농사짓기에 좋다. 15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30여년 전에 이향민이 시작하였다. 2가구가 10여년 전부터 하우스를 이용하여 고추ㆍ수박ㆍ호박ㆍ방울토마토 등을 재배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다. 교통은 불편하다. 1일 2회(아침과 저녁) 버스가 마을 앞을 지나고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금천면 삼거리(사거리)로 걸어 나가 버스를 탄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 뒷산에 소나무가 많이 있었으므로 마을 이름을 송촌(松村)이라 칭하게 되었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으로 금마산면(金馬山面) 12개 마을 중 송촌리(松村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신가2리로 편제되어 현재에이른다.
입향조는 경주최씨 영사정파이다. 마을에는 제보자 최수창(남, 80세)이 살고 있으며, 마을에 소재하고 있는 선산에는 그의 9대조 묘가 있다. 마을에는 경주최씨 5, 김씨 6, 윤씨 2, 이씨 2, 박씨 1, 반씨 1, 용씨 1 등 총 1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조직은 2리와 같이 하고 있는데 마을총회는 매년 12월 말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 등을 한다. 또 이 무렵 각 반별로 마을회의를 따로 실시하고 있다. 부녀회는 1970년대 조직되었으며 45명의 회원이 친목과 마을 일 돕기 그리고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90년에 조직되었으며 30여명의 회원이 면행사(체육대회) 참가와 친목, 그리고 마을사업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9년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2가구, 기름보일러 16가구이며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월비정(月飛亭)이라는 동각은 1982년 건립하였다. 과거 이 마을에 살았던 김금순(金今順)이 마을에 공이 있어 그의 택호를 따라 월비정이라 하였다. 이밖에 5월 8일 어버이날에는 2리 전체적으로 경로잔치를 베푼다.
신가2리 : 유촌(柳村)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유촌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3㎞ 지점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당가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송촌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촌곡2리 추동과 신추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이천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19가구, 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논 7㏊, 과수원과 밭 8㏊가 있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과 지석강변에 펼쳐져 있으며, 유촌제와 지석강 물 그리고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관개하고 있다. 논과 밭은 대부분 과수원으로 변경하여 이용하고 있으며, 토양은 점질토와 사질토로 농사짓기에 좋다. 11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30여년 전에 임동만과 최귀석이 시작하였다. 4가구가 10여년 전부터 마을 앞에서 하우스로 고추ㆍ수박ㆍ호박ㆍ방울토마토 등을 재배하여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교통은 불편하다. 1일 2회(아침과 저녁) 버스가 마을 앞을 지나고,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금천면 삼거리(사거리)로 걸어 나가 버스를 이용한다.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옛날 영산강 제방이 축조되기 전에는 버드나무가 많다 하여 ‘버드내’로 불리워 오다가 유촌(柳村)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789년 《호구총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 등에는 마을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마을이 행정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작았기 때문일 것이다. 광복 이후 신가2리로 편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강화최씨와 전주이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강화최씨는 혜안공파이고, 전주이씨는 양녕대군파이다. 입향한 전주이씨는 파조로부터 16세손인 현선(鉉善)이 당가마을에서 이거하였다. 현선(1847~1899)의 부인은 진주장씨이고 묘는 당가마을 앞산에 있다. 마을에는 전주이씨 3, 강화최씨 4, 경주최씨 4, 평택임씨 3, 김씨 3, 강씨 1, 송씨 1호 등 총 19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송촌, 유촌, 당가마을이 함께하고 있다(송촌편 참고). 전기는 1969년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2가구, 기름보일러 17가구이며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2000년에 건립하여 사무실과 노인정으로 사용하고 있고 동각은 1990년 건립하였다. 이밖에 5월 8일 어버이날에는 2구 전체적으로 경로잔치를 행한다.
신가3리 : 이천(伊川)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이천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3㎞ 지점에 위치한다. 마을 뒤로는 지석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유촌과 당가마을이 있다. 서쪽으로는 원곡리가 있고 남쪽으로는 신촌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동섬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35가구, 9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과 지석강변에 펼쳐져 있어, 지석강의 이천보(伊川洑)와 지하수를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고 마을에는 논 20㏊와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2㏊가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과 이모작을 하고 있다. 7가구가 10여년 전부터 배를 재배해 오고 있고, 포도는 5가구가 5년 전부터 재배해 오고 있으며 복숭아도 5가구가 5년 전부터 재배해 오고 있다. 또한 10여 가구가 1980년대부터 하우스를 이용하여 시설원예작물을 하고 있는데 풋고추ㆍ애호박ㆍ피망ㆍ수박 등이다.
교통은 1일 1회(아침) 버스가 마을 앞을 지나고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금천면 삼거리(사거리)로 걸어 나가 버스를 이용한다.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힌다. 이밖에 옛날의 우물터가 지석강 주변에 지금도 남아 있으며, 이곳은 과거에 지석강(드들강)의 배(船)터로 추정되는 지역이기도 하다(김경수, ??영산강 삼백오십리??, 향지사, 249쪽). 또한 신광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배형국이라 하여 이내라고 불리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지석강 제방이 축조되면서 이천이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때문에 주민들은 지금도 ‘이내’라고 부른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에 의하면 광주군(光州郡) 대지면(大枝面) 9개 마을 중 이천리(伊川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금마산면의 당가리(唐加里)ㆍ송촌(松村)ㆍ신촌리(新村里) 일부와 광주군 대지면 이천리(伊川里)가 병합하여 신가리(新加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3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경주최씨 충열공파 최원서(崔元瑞)가 광산군 대촌에서 살던 중 흉년을 맞아 이곳으로 이거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제보자인 최명동(남, 47세)과 그의 일가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마을에 보첩이 없는 관계로 자세한 내력은 파악할 길이 없다. 마을에는 경주최씨 16, 김씨 7, 조씨 3, 이씨 2, 장씨 1, 전씨 1, 박씨 1, 백씨 1, 양씨 1, 표씨 1, 신씨 1가구 등 총 3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12월 말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 등을 한다. 부녀회는 1반과 2반이 함께 197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4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마을 일 돕기 그리고 봉사활동 등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1반과 2반이 함께 1990년에 조직되었으며 30여명의 회원이 면행사(체육대회) 참가와 친목, 그리고 마을사업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가구, 기름보일러 31가구, 심야전기보일러 3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은 구멍가게 1개소, 공장 1개소 등이다. 이밖에 30여년 전부터 운영하여 오던 정미소 1개소가 8년 전에 폐쇄되었다. 이 정미소는 최병동이 운영하였다. 마을회관은 현재 신축 중에 있으며, 1996년에 건립한 금천농협농산물간이집하장이 있다. 동각은 1동으로 1992년에 건립되었다. 이외 신가1양수장이 마을 안에 있다. 마을에서는 1반과 2반이 함께 매년 5월 8일 어버이 날에 경로잔치를 열고 있는데 마을자금으로 실시한다. 그리고 여름에는 1반과 2반 전체 주민이 여름 휴가를 떠난다.
신가3리 : 동섬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동섬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5㎞ 지점에 위치한다. 마을 앞으로는 지석강이 흐르고, 뒤편으로는 영산강(극락강)이 흐르고 있다. 동쪽으로는 광산구 대촌동 승촌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노안면이 있다. 남쪽으로는 지석강 건너 이천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영산강(극락강) 건너 광산구가 있다.
마을에는 20가구, 55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시설원예작물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과 지석강변 그리고 영산강(극락강)변에 펼쳐져 있으며, 지하수를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논 7㏊와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11㏊가 있다. 농경지 토양은 사질토로 농사 짓기에 적당하여 대부분의 농가가 일ㆍ이모작을 하고 있다. 한 가구만이 5년 전부터 배를 재배해 오고 있고 20가구 중 6가구가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13가구는 1970년대 중반부터 하우스를 이용하여 시설원예작물을 하고 있다. 하우스에서는 고추ㆍ호박ㆍ토마토ㆍ피망ㆍ수박 등을 사계절 내내 재배한다. 이밖에 밭에서는 무와 배추를 재배하고 있으며, 벼농사가 끝난 논에서는 돌미나리를 재배하고 있는데 마을주민 2가구와 노안주민들이 토지를 빌려서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불편한 편이다.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광산구 대촌동 승촌마을까지 2km정도 걸어가서 광주간 14번 버스를 이용하고 있고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을 이용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과거 둑이 막아지기 전에는 섬이었다. 그리고 인근에서는 돈을 많이 버는 마을이라 하여 ‘돈섬’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행정명칭 상 ‘돈섬’을 ‘동섬’으로 고쳐 칭하였다. 1789년 《호구총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 등에는 마을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마을이 약 60여년 전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마을은 형성 이후 신가3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60여년 전에 기러기떼가 많아 하곡 보리순을 뜯어먹는 것을 막기 위해 김해김씨 김옥술(남, 69세)의 숙부 김자연(남, 작고)이 지석강변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살게 된 것이 시초이며 그후 타지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김해김씨 6, 이씨 4, 서씨 3, 최씨 2, 백씨 1, 강씨 1, 임씨 1, 문씨 1, 유씨 1가구 등 총 2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ㆍ부녀회ㆍ청년회는 이천마을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 이밖에 마을자치운영회가 조직되어 있는데 반상회와 같은 것으로 마을 대소사와 관련된 여러가지 일을 의논하고 있다. 전기는 1974년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가구, 기름보일러 19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동각은 현재 건설 중에 있으며, 마을에서는 이천과 함께 매년 5월 8일 어버이날에 경로잔치를 행해 오고 있다. 이 마을은 1989년 영산강(극락강) 제방이 터져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신가4리 : 당가(唐加)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4㎞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포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국가지원지방도 49호선이 지나고 있고, 뒤로는 지석강이 흐르고 있다. 과거에는 상촌과 중촌마을이 당가마을의 뒤쪽에 있었다고 하며, 당가를 하촌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상촌과 중촌 두 마을은 모두 폐촌되고 없다.(제보자 : 이항수, 남, 70세) 동쪽으로는 산포면이 있고, 서쪽으로는 유촌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촌곡3리가 있고, 북쪽으로는 지석강과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촌동 승촌이 있다.
마을에는 35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논 7㏊, 과수원과 밭 18㏊가 있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과 지석강변에 펼쳐져 있으며, 당가제와 지석강 물 그리고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논과 밭은 대부분 과수원으로 변경하여 이용하고 있다. 농경지는 경지정리를 하였으며, 토양은 점토로 농사짓기에 알맞다. 25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30여년 전에 시작하였다. 광복 직후 김순태(남, 작고)가 복숭아 재배를 시작하여 여러 가구가 참여하였으나 10~20여년 전부터 가격 하락으로 배 재배로 전환하였다. 이밖에 한우를 사육하는 1가구가 있다. 30여년 전까지 마을주민 몇 명이 양철과 판자로 만든 작은 배를 가지고 지석강에서 붕어와 잉어를 잡아 판매하기도 하였다. 교통은 불편한 편이다. 인근의 광산구 대촌동 승촌마을까지 걸어가서 14번 버스를 이용한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을 이용하고 있다.
마을과 인근 지역에는 중요한 문화유적이 많이 있다. 금천-시계간 도로 개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인 석기가 다량 발굴되었으며, 석관(곽)묘 11기(청동기시대), 토기가마 7기(삼국시대), 수혈유구 5기(삼국시대), 토광묘 1기(삼국시대)가 발굴되었다. 이처럼 당가에서 삼국시대의 대형토기가마 및 관련시설인 토기를 제작하던 공방지가 새로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가마의 구조적 특징은 고대 토기 생산양식의 연구를 위한 자료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여겨진다(박철원, ??동신대학교박물관 보고서??, 2002년). 또한 전주이씨 집단묘역을 조성하면서 지표면에서 토기편이 다량으로 드러났다. 유물로 발형토기 구연부편, 개배와 발형토기 저부 등 다량의 회청색경질, 회색연질토기편이 수습되었다. 한편 마을에는 「전감역이공성운시혜불망비 前監役李公聖雲施惠不忘碑」가 있다. 이성운은 천석군부자라고 하며, 이 비는 산포면ㆍ금천면ㆍ남평면 소작인 일동이 병자년에 세운 것이다. 지석강변에 1985년에 세워진 「신가교가설기념비 新加橋架設記念碑」가 있다. 이밖에 마을에는 과거 금마산면사무소가 소재하고 있었으나 그 터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가마솥형국이다. 때문에 과거에는 솥에 구멍을 낸다고 하여 개인 우물을 파지 못하게 하였다. 지명은 옛날 당나라시대부터 마을이 있었다고 전해오는 구전에 의해 마을 이름을 당가(唐加)라고 칭하였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789년 《호구총수》로 금마산면(金馬山面)의 4개 마을 중 한 마을로 ‘당가산리 唐加山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그후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금마산면 12개 마을 중 당가리(唐加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금마산면의 당가리(唐加里)ㆍ송촌(松村)ㆍ신촌리(新村里) 일부와 광주군(光州郡) 대지면(大枝面) 이천리(伊川里)가 병합하여 신가리(新加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신가2리로 편제되었다 2011년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에는 강화최씨 17, 전주이씨 8, 김해김씨 6, 황씨 1, 유씨 1, 배씨 1, 임씨 1호 등 총 3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신촌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2.5㎞ 지점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송촌이 있고, 서쪽으로는 원곡1리 산당마을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촌곡1리 본촌이 있고, 북쪽으로는 이내와 동섬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70가구, 18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논 6㏊와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40㏊가 있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배와 포도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과 지석강변에 펼쳐져 있으며, 지석강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을 하고 있다. 54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하니하라(埴原)라는 사람이 마을에 들어와 재배를 시작하였고 1960년대 초 정부에서 무상으로 배 묘목을 나누어 주어 35가구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배를 재배하였다. 포도는 28가구가 40여년 전에 재배하기 시작하였으며 복숭아는 2가구가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1일 2회(아침과 저녁) 버스가 마을 앞을 지나고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금천면 삼거리(사거리)로 걸어 나가 버스를 이용한다.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마을 입구에는 「참봉김해김창식처공인진주강씨정열비 參奉金海金昌植妻恭人晉州姜氏貞烈碑」가 있으며, 마을회관 앞에는 오래된 공동우물이 있었는데 현재는 메워진 상태이다. 그리고 배를 재배하던 일본인의 집이 현재 남아 있어 김동주가 지붕을 개조하여 거주하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말이 달리는 형국이라 하여 인근에서는 지마매(또는 금마매)로 불리우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마을이 폐허가 되었는데 창녕조씨를 비롯하여 여러 성씨가 입향하면서 새로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여 신촌(新村)이라 칭하게 되었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호구총수》(1789년)로 금마산면(金馬山面)의 4개 마을 중 한 마을로 ‘신촌(新村)’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금마산면 12개 마을 중 신촌리(新村里)라는 지명이 보이고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금마산면의 당가리(唐加里)ㆍ송촌(松村)ㆍ신촌리(新村里) 일부와 광주군(光州郡) 대지면(大枝面) 이천리(伊川里)가 병합하여 신가리(新加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신가리 1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염씨가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하는데 그 증거로 마을 인근에 지금도 염씨의 선산이 자리하고 있다. 그후 신씨들이 이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마을은 폐허가 되었고 이후 창녕조씨가 들어왔고, 다음으로 전주이씨와 한양조씨 등 여러 성씨가 이거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제보자 : 조성근).
입향한 창녕조씨(昌寧曺氏)는 시랑공파(侍郞公派)로 파조는 한룡(漢龍)이고, 마을에는 파조로부터 13세손인 조영규(남, 71세, 제보자)가 살고 있다. 그러나 제보자는 어느 조상이 언제 이 마을에 들어왔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다. 마을에는 창녕조씨 3, 이씨 16, 김씨 15, 조씨 9, 한양조씨 6, 박씨 4, 남씨 3, 배씨 2, 정씨 2, 황씨 2, 고씨ㆍ강씨ㆍ나씨ㆍ손씨ㆍ장씨ㆍ전씨ㆍ최씨ㆍ홍씨 각 1호 등 총 7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음력 12월 15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 등을 한다. 마을에서는 총회를 동계라고 하며 총회가 끝나면 5명의 유사가 음식을 준비하여 마을잔치를 행한다. 신송회는 1980년대에 조직되었는데 48명의 회원이 애경사 때 상부상조와 유사 10명을 중심으로 5월 8일 어버이날 행사를 개최한다. 부녀회는 197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3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마을 일 돕기 그리고 ‘며느리봉사대’를 조직하여 독거노인들을 봉양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95년 재조직되었으며 15명의 회원이 친목과 봉사활동 그리고 마을사업 등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기름보일러 70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은 주유소 1, 샷슈 1호 등이다. 마을회관은 1동 76㎡으로 1996년 건립하였으며 노인정과 사무실로 이용하고 있다. 동각은 지마정(芝馬亭)이란 명칭으로 1994년 건립하였다. 지마정 앞에는 가 있는데 추강이 우산각 건립에 공이 있어 마을 주민들이 세운 것이다.
신가2리 : 송촌(松村)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송촌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2.5㎞ 지점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유촌이 있고, 서쪽으로는 신촌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촌곡리 2구 추동과 신추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이천마을이 있다. 그리고 지난날 마을 인근 ‘절골’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18가구, 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논 3㏊, 과수원과 밭 10㏊가 있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과 지석강변에 펼쳐져 있고, 지석강과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논과 밭은 대부분 과수원으로 변경하여 이용하고 있으며, 토양은 점질토와 사질토로 농사짓기에 좋다. 15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30여년 전에 이향민이 시작하였다. 2가구가 10여년 전부터 하우스를 이용하여 고추ㆍ수박ㆍ호박ㆍ방울토마토 등을 재배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다. 교통은 불편하다. 1일 2회(아침과 저녁) 버스가 마을 앞을 지나고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금천면 삼거리(사거리)로 걸어 나가 버스를 탄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 뒷산에 소나무가 많이 있었으므로 마을 이름을 송촌(松村)이라 칭하게 되었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으로 금마산면(金馬山面) 12개 마을 중 송촌리(松村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신가2리로 편제되어 현재에이른다.
입향조는 경주최씨 영사정파이다. 마을에는 제보자 최수창(남, 80세)이 살고 있으며, 마을에 소재하고 있는 선산에는 그의 9대조 묘가 있다. 마을에는 경주최씨 5, 김씨 6, 윤씨 2, 이씨 2, 박씨 1, 반씨 1, 용씨 1 등 총 1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조직은 2리와 같이 하고 있는데 마을총회는 매년 12월 말일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 자금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 등을 한다. 또 이 무렵 각 반별로 마을회의를 따로 실시하고 있다. 부녀회는 1970년대 조직되었으며 45명의 회원이 친목과 마을 일 돕기 그리고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1990년에 조직되었으며 30여명의 회원이 면행사(체육대회) 참가와 친목, 그리고 마을사업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9년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2가구, 기름보일러 16가구이며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월비정(月飛亭)이라는 동각은 1982년 건립하였다. 과거 이 마을에 살았던 김금순(金今順)이 마을에 공이 있어 그의 택호를 따라 월비정이라 하였다. 이밖에 5월 8일 어버이날에는 2리 전체적으로 경로잔치를 베푼다.
신가2리 : 유촌(柳村)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유촌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3㎞ 지점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당가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송촌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촌곡2리 추동과 신추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이천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19가구, 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논 7㏊, 과수원과 밭 8㏊가 있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앞과 지석강변에 펼쳐져 있으며, 유촌제와 지석강 물 그리고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관개하고 있다. 논과 밭은 대부분 과수원으로 변경하여 이용하고 있으며, 토양은 점질토와 사질토로 농사짓기에 좋다. 11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30여년 전에 임동만과 최귀석이 시작하였다. 4가구가 10여년 전부터 마을 앞에서 하우스로 고추ㆍ수박ㆍ호박ㆍ방울토마토 등을 재배하여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교통은 불편하다. 1일 2회(아침과 저녁) 버스가 마을 앞을 지나고,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금천면 삼거리(사거리)로 걸어 나가 버스를 이용한다.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옛날 영산강 제방이 축조되기 전에는 버드나무가 많다 하여 ‘버드내’로 불리워 오다가 유촌(柳村)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789년 《호구총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 등에는 마을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마을이 행정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작았기 때문일 것이다. 광복 이후 신가2리로 편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강화최씨와 전주이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강화최씨는 혜안공파이고, 전주이씨는 양녕대군파이다. 입향한 전주이씨는 파조로부터 16세손인 현선(鉉善)이 당가마을에서 이거하였다. 현선(1847~1899)의 부인은 진주장씨이고 묘는 당가마을 앞산에 있다. 마을에는 전주이씨 3, 강화최씨 4, 경주최씨 4, 평택임씨 3, 김씨 3, 강씨 1, 송씨 1호 등 총 19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송촌, 유촌, 당가마을이 함께하고 있다(송촌편 참고). 전기는 1969년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2가구, 기름보일러 17가구이며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2000년에 건립하여 사무실과 노인정으로 사용하고 있고 동각은 1990년 건립하였다. 이밖에 5월 8일 어버이날에는 2구 전체적으로 경로잔치를 행한다.
신가3리 : 이천(伊川)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이천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3㎞ 지점에 위치한다. 마을 뒤로는 지석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유촌과 당가마을이 있다. 서쪽으로는 원곡리가 있고 남쪽으로는 신촌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동섬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35가구, 9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과 지석강변에 펼쳐져 있어, 지석강의 이천보(伊川洑)와 지하수를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고 마을에는 논 20㏊와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2㏊가 있다. 농경지 토양은 점질토와 황토로 농사짓기에 적당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가가 일모작과 이모작을 하고 있다. 7가구가 10여년 전부터 배를 재배해 오고 있고, 포도는 5가구가 5년 전부터 재배해 오고 있으며 복숭아도 5가구가 5년 전부터 재배해 오고 있다. 또한 10여 가구가 1980년대부터 하우스를 이용하여 시설원예작물을 하고 있는데 풋고추ㆍ애호박ㆍ피망ㆍ수박 등이다.
교통은 1일 1회(아침) 버스가 마을 앞을 지나고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금천면 삼거리(사거리)로 걸어 나가 버스를 이용한다.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ㆍ영산포장ㆍ마트를 이용힌다. 이밖에 옛날의 우물터가 지석강 주변에 지금도 남아 있으며, 이곳은 과거에 지석강(드들강)의 배(船)터로 추정되는 지역이기도 하다(김경수, ??영산강 삼백오십리??, 향지사, 249쪽). 또한 신광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배형국이라 하여 이내라고 불리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지석강 제방이 축조되면서 이천이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때문에 주민들은 지금도 ‘이내’라고 부른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에 의하면 광주군(光州郡) 대지면(大枝面) 9개 마을 중 이천리(伊川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금마산면의 당가리(唐加里)ㆍ송촌(松村)ㆍ신촌리(新村里) 일부와 광주군 대지면 이천리(伊川里)가 병합하여 신가리(新加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3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경주최씨 충열공파 최원서(崔元瑞)가 광산군 대촌에서 살던 중 흉년을 맞아 이곳으로 이거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제보자인 최명동(남, 47세)과 그의 일가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마을에 보첩이 없는 관계로 자세한 내력은 파악할 길이 없다. 마을에는 경주최씨 16, 김씨 7, 조씨 3, 이씨 2, 장씨 1, 전씨 1, 박씨 1, 백씨 1, 양씨 1, 표씨 1, 신씨 1가구 등 총 3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는 매년 12월 말에 개최한다. 총회에서는 마을자금 결산과 마을사업 토론 그리고 2년을 주기로 임원선출 등을 한다. 부녀회는 1반과 2반이 함께 1970년대에 조직되었으며 40여명의 회원이 친목과 마을 일 돕기 그리고 봉사활동 등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1반과 2반이 함께 1990년에 조직되었으며 30여명의 회원이 면행사(체육대회) 참가와 친목, 그리고 마을사업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전기는 1960년대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행정전화가 1970년대,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가구, 기름보일러 31가구, 심야전기보일러 3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상업은 구멍가게 1개소, 공장 1개소 등이다. 이밖에 30여년 전부터 운영하여 오던 정미소 1개소가 8년 전에 폐쇄되었다. 이 정미소는 최병동이 운영하였다. 마을회관은 현재 신축 중에 있으며, 1996년에 건립한 금천농협농산물간이집하장이 있다. 동각은 1동으로 1992년에 건립되었다. 이외 신가1양수장이 마을 안에 있다. 마을에서는 1반과 2반이 함께 매년 5월 8일 어버이 날에 경로잔치를 열고 있는데 마을자금으로 실시한다. 그리고 여름에는 1반과 2반 전체 주민이 여름 휴가를 떠난다.
신가3리 : 동섬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동섬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5㎞ 지점에 위치한다. 마을 앞으로는 지석강이 흐르고, 뒤편으로는 영산강(극락강)이 흐르고 있다. 동쪽으로는 광산구 대촌동 승촌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노안면이 있다. 남쪽으로는 지석강 건너 이천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영산강(극락강) 건너 광산구가 있다.
마을에는 20가구, 55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시설원예작물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과 지석강변 그리고 영산강(극락강)변에 펼쳐져 있으며, 지하수를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논 7㏊와 과수원을 포함하여 밭 11㏊가 있다. 농경지 토양은 사질토로 농사 짓기에 적당하여 대부분의 농가가 일ㆍ이모작을 하고 있다. 한 가구만이 5년 전부터 배를 재배해 오고 있고 20가구 중 6가구가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13가구는 1970년대 중반부터 하우스를 이용하여 시설원예작물을 하고 있다. 하우스에서는 고추ㆍ호박ㆍ토마토ㆍ피망ㆍ수박 등을 사계절 내내 재배한다. 이밖에 밭에서는 무와 배추를 재배하고 있으며, 벼농사가 끝난 논에서는 돌미나리를 재배하고 있는데 마을주민 2가구와 노안주민들이 토지를 빌려서 재배하고 있다.
교통은 불편한 편이다.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광산구 대촌동 승촌마을까지 2km정도 걸어가서 광주간 14번 버스를 이용하고 있고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을 이용한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과거 둑이 막아지기 전에는 섬이었다. 그리고 인근에서는 돈을 많이 버는 마을이라 하여 ‘돈섬’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행정명칭 상 ‘돈섬’을 ‘동섬’으로 고쳐 칭하였다. 1789년 《호구총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 등에는 마을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마을이 약 60여년 전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마을은 형성 이후 신가3리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언에 의하면 60여년 전에 기러기떼가 많아 하곡 보리순을 뜯어먹는 것을 막기 위해 김해김씨 김옥술(남, 69세)의 숙부 김자연(남, 작고)이 지석강변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살게 된 것이 시초이며 그후 타지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김해김씨 6, 이씨 4, 서씨 3, 최씨 2, 백씨 1, 강씨 1, 임씨 1, 문씨 1, 유씨 1가구 등 총 2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조직과 근ㆍ현대적 변화
마을총회ㆍ부녀회ㆍ청년회는 이천마을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 이밖에 마을자치운영회가 조직되어 있는데 반상회와 같은 것으로 마을 대소사와 관련된 여러가지 일을 의논하고 있다. 전기는 1974년에 가설되었고 전화는 일반전화가 1980년대에 들어왔다. 연료는 연탄보일러 1가구, 기름보일러 19가구이고 취사연료는 대부분의 가구에서 LPG를 사용하고 있다.
동각은 현재 건설 중에 있으며, 마을에서는 이천과 함께 매년 5월 8일 어버이날에 경로잔치를 행해 오고 있다. 이 마을은 1989년 영산강(극락강) 제방이 터져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신가4리 : 당가(唐加)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4㎞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포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국가지원지방도 49호선이 지나고 있고, 뒤로는 지석강이 흐르고 있다. 과거에는 상촌과 중촌마을이 당가마을의 뒤쪽에 있었다고 하며, 당가를 하촌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상촌과 중촌 두 마을은 모두 폐촌되고 없다.(제보자 : 이항수, 남, 70세) 동쪽으로는 산포면이 있고, 서쪽으로는 유촌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촌곡3리가 있고, 북쪽으로는 지석강과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촌동 승촌이 있다.
마을에는 35가구,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논 7㏊, 과수원과 밭 18㏊가 있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산물은 쌀과 배이다. 농경지는 마을 인근과 지석강변에 펼쳐져 있으며, 당가제와 지석강 물 그리고 관정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논과 밭은 대부분 과수원으로 변경하여 이용하고 있다. 농경지는 경지정리를 하였으며, 토양은 점토로 농사짓기에 알맞다. 25가구가 배를 재배하고 있는데 30여년 전에 시작하였다. 광복 직후 김순태(남, 작고)가 복숭아 재배를 시작하여 여러 가구가 참여하였으나 10~20여년 전부터 가격 하락으로 배 재배로 전환하였다. 이밖에 한우를 사육하는 1가구가 있다. 30여년 전까지 마을주민 몇 명이 양철과 판자로 만든 작은 배를 가지고 지석강에서 붕어와 잉어를 잡아 판매하기도 하였다. 교통은 불편한 편이다. 인근의 광산구 대촌동 승촌마을까지 걸어가서 14번 버스를 이용한다. 주민들의 생필품 구입은 나주장ㆍ남평장을 이용하고 있다.
마을과 인근 지역에는 중요한 문화유적이 많이 있다. 금천-시계간 도로 개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인 석기가 다량 발굴되었으며, 석관(곽)묘 11기(청동기시대), 토기가마 7기(삼국시대), 수혈유구 5기(삼국시대), 토광묘 1기(삼국시대)가 발굴되었다. 이처럼 당가에서 삼국시대의 대형토기가마 및 관련시설인 토기를 제작하던 공방지가 새로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가마의 구조적 특징은 고대 토기 생산양식의 연구를 위한 자료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여겨진다(박철원, ??동신대학교박물관 보고서??, 2002년). 또한 전주이씨 집단묘역을 조성하면서 지표면에서 토기편이 다량으로 드러났다. 유물로 발형토기 구연부편, 개배와 발형토기 저부 등 다량의 회청색경질, 회색연질토기편이 수습되었다. 한편 마을에는 「전감역이공성운시혜불망비 前監役李公聖雲施惠不忘碑」가 있다. 이성운은 천석군부자라고 하며, 이 비는 산포면ㆍ금천면ㆍ남평면 소작인 일동이 병자년에 세운 것이다. 지석강변에 1985년에 세워진 「신가교가설기념비 新加橋架設記念碑」가 있다. 이밖에 마을에는 과거 금마산면사무소가 소재하고 있었으나 그 터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지명유래와 마을연혁
마을은 가마솥형국이다. 때문에 과거에는 솥에 구멍을 낸다고 하여 개인 우물을 파지 못하게 하였다. 지명은 옛날 당나라시대부터 마을이 있었다고 전해오는 구전에 의해 마을 이름을 당가(唐加)라고 칭하였다.
문헌상 마을의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 1789년 《호구총수》로 금마산면(金馬山面)의 4개 마을 중 한 마을로 ‘당가산리 唐加山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그후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금마산면 12개 마을 중 당가리(唐加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해진 행정구역개편으로 금마산면의 당가리(唐加里)ㆍ송촌(松村)ㆍ신촌리(新村里) 일부와 광주군(光州郡) 대지면(大枝面) 이천리(伊川里)가 병합하여 신가리(新加里)가 되고, 금천면(金川面) 소속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본 마을은 신가2리로 편제되었다 2011년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에는 강화최씨 17, 전주이씨 8, 김해김씨 6, 황씨 1, 유씨 1, 배씨 1, 임씨 1호 등 총 3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