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리
- 날짜
- 2020.04.16
- 조회수
- 794
- 등록자
- 관리자
총 면적은 222만여㎡으로 다시면의 소재지 통에 있는 중심리로 문평천이 만든 해발 10∼15m 퇴적토 위에 들어섰다. 문평천을 중심으로 중앙마을, 신용, 흑암마을은 동편에 있는데 평야지로 높은 산이나 구릉이 없고, 영동, 초동마을은 문평천의 서편에 있는데 두 마을은 뒷편으로 얕으막한 산등을 두고 자리하고 있다. 영동리는, 1구 신용(申用·新龍)·중앙(中央), 2구 흑암(黑岩), 3구 초동(草洞)·영촌(永村)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영동리 1구 신용(申用·新龍)마을
마을형성은 1850년 李浩吉(이호길)이 가흥리 용흥마을에서 이곳으로 와서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지명유래는 새로 마을을 이루었다는 의미로 처음에 새신(新)자와 용흥(龍興)의 용(龍)자를 각각 취하여 신용(新龍)으로 했는데 후일 한자 표기가 간략화 되면서 신용으로 되었다고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다시신협, 다시새마을금고, 다시중학교, 농협창고, 최병철소장 고문서, 마을회관 등이 있다. ☞ 중앙(中央)마을, 마을형성은 1910년 千基成(천기성)이 다시면 죽지마을에서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부터 점차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지명유래는 신용마을의 일부로 1920년경에는 5호가 거주, 1930년께 백룡제 축조와 다시역이 개통되면서 점차 역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1953년경 다시면사무소가 있는 곳이라 하여 다시면의 중심이 되므로 중앙동으로 이름을 정하였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구)다시면사무소, 다시역, 나도금공적비, 나주배꽃정보화센터 등이 있다.
영동리 2구 흑암(黑岩)마을
마을형성은 1820년경 李泰運(이태운)이 문동리 반계마을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와서 거주하면서 마을이 점차 형성되었으며, 지명유래는 마을 입구에 커다란 검은바위(고인돌) 3개가 있으므로 흑암마을이라 하였다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 3기, 당산나무 약 180년, 흑암정(동각) 등이 있다.
영동리 3구 초동(草洞)마을
마을형성은 고대국가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며 행주기씨가 거주하였고, 함평이씨가 이 마을에 들어온 것은 1450년경에 李克明(이극명)이 시량에서 살다 이곳으로 왔서 마을이 형성됨. 지명유래는 예전에는 샛골이라 부렀는데 이는 사잇골이란 뜻이다. 즉 산 구릉과 구릉사이에 있는 사잇골의 의미가 있는 것인데 이것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사이는 새로 축약되고 새는 곧 풀을 의미하여 풀초(草)자를 써서 초동이라 한 것이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수다면사무소터, 포충각, 남파정, 금사정, 남사정, 왕자사부죽오당김선생 유허비, 마을회관 등이 있다. ☞ 영촌(永村)마을, 마을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조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 지명유래는 역촌(가마꾼 마을)이었던 것이 영촌으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보산정사(전남문화재 제131호), 보산사, 무열사(지방기념물 제57호), 현충각 등이 있다.
영동리 1구 신용(申用·新龍)마을
마을형성은 1850년 李浩吉(이호길)이 가흥리 용흥마을에서 이곳으로 와서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지명유래는 새로 마을을 이루었다는 의미로 처음에 새신(新)자와 용흥(龍興)의 용(龍)자를 각각 취하여 신용(新龍)으로 했는데 후일 한자 표기가 간략화 되면서 신용으로 되었다고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다시신협, 다시새마을금고, 다시중학교, 농협창고, 최병철소장 고문서, 마을회관 등이 있다. ☞ 중앙(中央)마을, 마을형성은 1910년 千基成(천기성)이 다시면 죽지마을에서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부터 점차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지명유래는 신용마을의 일부로 1920년경에는 5호가 거주, 1930년께 백룡제 축조와 다시역이 개통되면서 점차 역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1953년경 다시면사무소가 있는 곳이라 하여 다시면의 중심이 되므로 중앙동으로 이름을 정하였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구)다시면사무소, 다시역, 나도금공적비, 나주배꽃정보화센터 등이 있다.
영동리 2구 흑암(黑岩)마을
마을형성은 1820년경 李泰運(이태운)이 문동리 반계마을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와서 거주하면서 마을이 점차 형성되었으며, 지명유래는 마을 입구에 커다란 검은바위(고인돌) 3개가 있으므로 흑암마을이라 하였다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 3기, 당산나무 약 180년, 흑암정(동각) 등이 있다.
영동리 3구 초동(草洞)마을
마을형성은 고대국가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며 행주기씨가 거주하였고, 함평이씨가 이 마을에 들어온 것은 1450년경에 李克明(이극명)이 시량에서 살다 이곳으로 왔서 마을이 형성됨. 지명유래는 예전에는 샛골이라 부렀는데 이는 사잇골이란 뜻이다. 즉 산 구릉과 구릉사이에 있는 사잇골의 의미가 있는 것인데 이것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사이는 새로 축약되고 새는 곧 풀을 의미하여 풀초(草)자를 써서 초동이라 한 것이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수다면사무소터, 포충각, 남파정, 금사정, 남사정, 왕자사부죽오당김선생 유허비, 마을회관 등이 있다. ☞ 영촌(永村)마을, 마을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조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 지명유래는 역촌(가마꾼 마을)이었던 것이 영촌으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보산정사(전남문화재 제131호), 보산사, 무열사(지방기념물 제57호), 현충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