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태리
- 날짜
- 202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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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0
- 등록자
- 관리자
총 면적은 745만여㎡으로 북쪽에 백룡산의 우람함을 바탕으로 문평천의 들판 높드리땅에 자리잡고 있다. 다시면의 중앙에 해당된 위치로 광목간 신작로와 철도가 있어 더불어 발전하다가 1970년대 국도 1호선이 확장되면서 정류장이 북쪽(현 위치)으로 이동한 뒤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월태리는, 1구 대용(大用)·쌍암(雙岩), 2구 월명(月明), 3구 원동(元洞), 4구 월천(月川), 5구 영룡(永龍)마을로 구성되어있다
월태리 1구 대용(大用)마을
마을형성은 1820년경에 밀양박씨가 5호 정도 살았으나, 1932년에 백용저수지가 생긴 후 점차 마을이 형성됨, 지명유래는 마을에 숲이 우거져 있는 숲안으로 불리웠고 표기상 수반(樹半)이라 했다고 한다. 또 백룡산 아래에 위치하고 다시면에 속했기 때문에 다룡촌(多龍村)이라 부른 뒤 1935년 마을이 크게 형성되면서 대용(大用)이라 하기도 했고, 대룡촌(大龍村)이라 부르기도 했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다시면사무소, 다시파출소, 다시우체국, 다시초등학교, 다시복지회관, 다시노인당, 예비군다시중대, 농민상담소, 다시농협, 다시천주교회, 이민선 소장 고문서, 마을회관 등이 있다. ☞ 쌍암촌(雙岩)마을, 마을 뒷편 박남박씨 세장산 빗돌 있는 곳에 고인돌이 있어서 이름했다 한다. 여러개의 뜸이 있었는데 유황, 대반, 청평, 류죽으로 구분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 17기, 김기홍소장 고문서 등이 있다.
월태리 2구 월명(月明)마을
마을형성은 이조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함평이씨가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는 조선시대에 나주목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마침 마을 뒷편에 떠오르는 달이 유난히 밝아 이곳을 월명이라 칭하고 마을이름을 월명실이라 했다고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 17기(이대호 포도밭 7기, 이양교 포도밭 6기, 기타 1기), 선돌(마을 앞에 높이 2m, 둘레 70cm), 석불좌상, 망사재, 마을회관 등이 있다.
월태리 3구 원동(元洞)마을
마을형성은 이조시대 전의이씨가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됨. 지명유래는 삼국통일시 신라에 원병왔던 당나라 대군이 물러가면서 복암사를 불지르고 횡포하여 동리앞에다 인마의 수급을 묻자 이에 분함을 참지 못한 백제의 백성들이 인마의 수급을 발굴하여 제를 지내고 원한을 달래어 줬다하여 怨洞(원동)이라 불리어 오다 원동으로 개칭하였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 6기(마을 좌측 전의이씨 세장산에 있음), 신사터, 지금은 없어진 개계원터, 마을회관 등이있다.
월태리 4구 월천(月川)마을
마을형성은 1935년에 고성이씨 이기권이 초동마을에서 살다가 이곳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함, 지명유래는 마을 앞으로 냇가가 굽어 흐르는데 그 냇가변에 마을이 형성되어 돌은내라 부른 것이 달내가 되고 한자로 표기하면서 월천이라 한 것이다. 냇물이 달에 비친다하여 월천이라 했다고 전하기도 하며 마을 형태가 반달 같다하여 월천이라 했다고도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현대의원, 마을회관 등이 있다.
월태리 5구 영룡(永龍)마을
마을형성은 나주나씨 나천기가 1560년경에 나주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와서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함. 지명유래는 처음에는 영하촌이라 하였고, 그 후 용계(龍溪)마을 영안(永安)마을이라 하였으며, 일제시대에 영계, 광복후에는 다시 영룡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 6기(마을 입구 구릉상), 옹관묘(나주나씨 문산에 4기가 있음), 나상철 소장 고문서, 마을회관 등이 있다.
월태리 1구 대용(大用)마을
마을형성은 1820년경에 밀양박씨가 5호 정도 살았으나, 1932년에 백용저수지가 생긴 후 점차 마을이 형성됨, 지명유래는 마을에 숲이 우거져 있는 숲안으로 불리웠고 표기상 수반(樹半)이라 했다고 한다. 또 백룡산 아래에 위치하고 다시면에 속했기 때문에 다룡촌(多龍村)이라 부른 뒤 1935년 마을이 크게 형성되면서 대용(大用)이라 하기도 했고, 대룡촌(大龍村)이라 부르기도 했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다시면사무소, 다시파출소, 다시우체국, 다시초등학교, 다시복지회관, 다시노인당, 예비군다시중대, 농민상담소, 다시농협, 다시천주교회, 이민선 소장 고문서, 마을회관 등이 있다. ☞ 쌍암촌(雙岩)마을, 마을 뒷편 박남박씨 세장산 빗돌 있는 곳에 고인돌이 있어서 이름했다 한다. 여러개의 뜸이 있었는데 유황, 대반, 청평, 류죽으로 구분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 17기, 김기홍소장 고문서 등이 있다.
월태리 2구 월명(月明)마을
마을형성은 이조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함평이씨가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는 조선시대에 나주목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마침 마을 뒷편에 떠오르는 달이 유난히 밝아 이곳을 월명이라 칭하고 마을이름을 월명실이라 했다고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 17기(이대호 포도밭 7기, 이양교 포도밭 6기, 기타 1기), 선돌(마을 앞에 높이 2m, 둘레 70cm), 석불좌상, 망사재, 마을회관 등이 있다.
월태리 3구 원동(元洞)마을
마을형성은 이조시대 전의이씨가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됨. 지명유래는 삼국통일시 신라에 원병왔던 당나라 대군이 물러가면서 복암사를 불지르고 횡포하여 동리앞에다 인마의 수급을 묻자 이에 분함을 참지 못한 백제의 백성들이 인마의 수급을 발굴하여 제를 지내고 원한을 달래어 줬다하여 怨洞(원동)이라 불리어 오다 원동으로 개칭하였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 6기(마을 좌측 전의이씨 세장산에 있음), 신사터, 지금은 없어진 개계원터, 마을회관 등이있다.
월태리 4구 월천(月川)마을
마을형성은 1935년에 고성이씨 이기권이 초동마을에서 살다가 이곳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함, 지명유래는 마을 앞으로 냇가가 굽어 흐르는데 그 냇가변에 마을이 형성되어 돌은내라 부른 것이 달내가 되고 한자로 표기하면서 월천이라 한 것이다. 냇물이 달에 비친다하여 월천이라 했다고 전하기도 하며 마을 형태가 반달 같다하여 월천이라 했다고도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현대의원, 마을회관 등이 있다.
월태리 5구 영룡(永龍)마을
마을형성은 나주나씨 나천기가 1560년경에 나주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와서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함. 지명유래는 처음에는 영하촌이라 하였고, 그 후 용계(龍溪)마을 영안(永安)마을이라 하였으며, 일제시대에 영계, 광복후에는 다시 영룡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 6기(마을 입구 구릉상), 옹관묘(나주나씨 문산에 4기가 있음), 나상철 소장 고문서, 마을회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