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흥리
- 날짜
- 2020.04.16
- 조회수
- 792
- 등록자
- 관리자
총 면적은 241만여㎡에 이른다. 1970년대 신석기시대 벼꽃가루가 가흥리 앞들에서 발견된 바 일찍이 농경문화가 형성된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대박산을 중심으로 뻗어 내린 등성이에는 명혈이 맺혀 있어서인지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가흥리는, 1구 정가(正佳), 2구 신흥(新興, 龍興, 新基, 영창머리)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가흥리 1구 정가(正佳)마을
마을형성은 고대국가시대부터 마을이 있었으나 조선시대 흥성장씨와 330년전 신안주씨가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음. 지명유래는 원래 수다면 당시 맨가에 위치한 마을이라 정가태(정가, 상촌이라 하던 것을 줄여 정가 촌이라 한 것으로 마을 앞의 들을 이에 따라 가상들이라 불렀다. 한자표기는 편의상 차용하여 쓴 것으로 풀이된다. 마을을 세분하면 양달(정가), 응달(안골)로 구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느티나무(1610년께 신안주씨 주사(株士)가 심은 나무로 1982년 12월 3일 나주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일문사, 신안주공유애비, 선돌, 마을회관 등이 있다. ☞ 보물이 있는 풍정마을 : 면 소재지에서 정가마을에 못미처 위치해 있는데 원래 죽오당 김건이 가흥리 280번지에 소축한 풍정(楓亭)이란 정자가 있어 마을이름을 풍정이라 하였다. 풍정은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으며 그 지명만 남았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최윤하 소장 고문서(무숙공 최희량장군의 임란첩보서목으로 보물 제660호로 1972년 4월 지정, 최희량장군 교지를 비롯 다수의 고문서가 있다), 최을휴 소장 고문서(1894년 나주목사 민종열이 발급한 수다면향약소장천정기), 최희량장군생가터(가흥리 270번지 최윤하 집 뒤 대밭에 있다) 등이 있다.
가흥리 2구 신흥(新興)마을
마을형성 연대는 미상이나 대체로 조선시대초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지명유래는 원래 신기, 용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용흥(龍興)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다가 1968년 신기 마을의 신(新)자를 다시 취하고 용흥 마을의 흥(興)자를 각기 취하여 신흥마을이라 한 것이다. 마을에서는 대박산이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데 용이 일어나는 형국이라 마을이름을 용흥(龍興)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무숙사(가흥리 453-2번지에 있으며 무숙공 최희량(1560∼1652)장군을 모신 사우이다. 1984년 5월 국비 1억5천만원으로 건립했다), 최희량장순신도비(지방기념물 제53호로 가흥리 369번지에 있으며 1901년 8월에 건립하였다), 충일사터, 삼선생 유허비(이순신, 최희량, 정여린 삼인에 대한 기록이 있음), 삼주정터, 비은정터, 여견재, 신석기시대유적, 이계근소장고문서, 대박재, 모재흥성장공효행비, 연자방아(돌로 만든 방아) 등이 있다.
가흥리 1구 정가(正佳)마을
마을형성은 고대국가시대부터 마을이 있었으나 조선시대 흥성장씨와 330년전 신안주씨가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음. 지명유래는 원래 수다면 당시 맨가에 위치한 마을이라 정가태(정가, 상촌이라 하던 것을 줄여 정가 촌이라 한 것으로 마을 앞의 들을 이에 따라 가상들이라 불렀다. 한자표기는 편의상 차용하여 쓴 것으로 풀이된다. 마을을 세분하면 양달(정가), 응달(안골)로 구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느티나무(1610년께 신안주씨 주사(株士)가 심은 나무로 1982년 12월 3일 나주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일문사, 신안주공유애비, 선돌, 마을회관 등이 있다. ☞ 보물이 있는 풍정마을 : 면 소재지에서 정가마을에 못미처 위치해 있는데 원래 죽오당 김건이 가흥리 280번지에 소축한 풍정(楓亭)이란 정자가 있어 마을이름을 풍정이라 하였다. 풍정은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으며 그 지명만 남았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최윤하 소장 고문서(무숙공 최희량장군의 임란첩보서목으로 보물 제660호로 1972년 4월 지정, 최희량장군 교지를 비롯 다수의 고문서가 있다), 최을휴 소장 고문서(1894년 나주목사 민종열이 발급한 수다면향약소장천정기), 최희량장군생가터(가흥리 270번지 최윤하 집 뒤 대밭에 있다) 등이 있다.
가흥리 2구 신흥(新興)마을
마을형성 연대는 미상이나 대체로 조선시대초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지명유래는 원래 신기, 용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용흥(龍興)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다가 1968년 신기 마을의 신(新)자를 다시 취하고 용흥 마을의 흥(興)자를 각기 취하여 신흥마을이라 한 것이다. 마을에서는 대박산이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데 용이 일어나는 형국이라 마을이름을 용흥(龍興)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무숙사(가흥리 453-2번지에 있으며 무숙공 최희량(1560∼1652)장군을 모신 사우이다. 1984년 5월 국비 1억5천만원으로 건립했다), 최희량장순신도비(지방기념물 제53호로 가흥리 369번지에 있으며 1901년 8월에 건립하였다), 충일사터, 삼선생 유허비(이순신, 최희량, 정여린 삼인에 대한 기록이 있음), 삼주정터, 비은정터, 여견재, 신석기시대유적, 이계근소장고문서, 대박재, 모재흥성장공효행비, 연자방아(돌로 만든 방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