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리
- 날짜
- 2020.04.16
- 조회수
- 1016
- 등록자
- 관리자
총 면적은 463여만㎡으로 다시면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리로 영산강을 경계로 왕곡, 공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풍수지리상 와우형국이었다고 저하나 금호 박인천이 거북형국이라고 하였다. 즉 거북이가 물속으로 들어가려는 형국으로 소요정이 그 머리이며, 돌캐산 다섯 봉우리가 거북의 알이다. 또 동산의 창고터가 발로 일명 사석바우라 한다. 죽산리는, 1구 죽지(竹池), 2구 산두(山頭), 3구 조등(鳥嶝), 4구 절구(杵九), 5구 화동(化洞)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죽산리 1구 죽지(竹池)마을
마을형성은 함평이씨 이종인이 초동마을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벼슬을 하다가 낙향하면서 지금 이곳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고 자손을 낳아 마을이 점차 형성되었다 함. 지명유래는 대못이라 부르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죽지라 한 것이다. 대못은 연못안에 작은 섬이 있고 그 곳에 대나무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충열각, 열녀각, 대못, 이유근유허비, 소요정, 첨모재, 류중천공로비, 이계익공로비, 백옥당, 사당 이재영 소장 고문서, 고사인이계익무본선덕비 등이 있다.
죽산리 2구 산두(山頭)마을
마을형성은 이조말 주씨가 살았으며 금녕김씨가 마을에 들어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함. 지명유래는 용이 일어난다 하여 용흥(龍興)이라 불렀는데 그 후 마을의 위치가 산머리에 위치하므로 산두라 하였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효자삼성당김년김씨형종기행비, 마을회관 등이 있다.
죽산리 3구 조등(鳥嶝)마을
마을형성은 1925년에 이해암이 영산강변에 황무지를 개간하고 그해 보리 60섬을 해들이자 그 소문이 퍼져 농토 없는 가난한 농가들이 모여들었다함. 지명유래는 지형이 새등처럼 생겨서 마을이름을 조등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1925년경에 설촌된 마을인데 1974년 11월 영산강의 범람으로 인해 현재의 마을터로 집단 이주하였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인수재(함평이씨 이극해의 재실), 임종무 소장 고문서(구운몽 가곡, 일소록), 마을회관 등이 있다.
죽산리 4구 절구(杵九)마을
마을형성은 1650년경에 김해김씨가 이곳에 처음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함. 지명유래는 약 300년 전에 流配(유배)온 어느 개감이 마을형태가 마치 절구통 같이 생겼다하여 절구라 칭하였다고 한다. 옛 우물터 상수도 안에 절구같이 생긴 학독이 들어있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입석 1기(장군석이라 한다), 당산나무(귀목나무 400년), 마을회관 등이 있다.
죽산리 5구 화동(化洞)마을
마을형성은 500년전에 고흥에서 아산이씨 할머니가 남편과 며느리를 잃고 이곳으로 와서 함평이씨를 다시 며느리로 들여 자손을 번성시켰음. 마을지명은 마을이 배 형국이다. 마을앞까지 배가 드나드는 죽포(竹浦), 선두촌(船頭村)이라 하였으며 그 후 일제시대에 고흥류씨 선산이 홍화동에 있다하여 화동이라 하다가 일제말기에 한자를 간략화하여 화동으로 표기하였다고 하며, 외지에서는 마을 이름을 장춘정이라고 불렀다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장춘정(지방기념물 제201호, 류충정의 정각), 숭모재(고흥류씨 만호 파의배위 아산이씨의 재실(류충정의 조모)), 추원재(고흥류씨 광국공신(선계변무의공) 남호공 류은의 재각), 월계정(고흥유씨 류인명의 정각), 전선소, 고인돌(5기 - 우암춘 뒷산에 있다), 입석(3개), 느티나무(수령 330년된 나무 3구루), 팽나무(수령 330년된 나무 3구루), 은행나무(수령 500년된 나무 1구루), 죽포면사무소터(죽산리 888번지에 있었다. - 최영호 소유 밭), 통정대부도호부사 장춘공유장비, 죽산양수장, 마을회관 등이 있다.
죽산리 1구 죽지(竹池)마을
마을형성은 함평이씨 이종인이 초동마을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벼슬을 하다가 낙향하면서 지금 이곳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고 자손을 낳아 마을이 점차 형성되었다 함. 지명유래는 대못이라 부르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죽지라 한 것이다. 대못은 연못안에 작은 섬이 있고 그 곳에 대나무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충열각, 열녀각, 대못, 이유근유허비, 소요정, 첨모재, 류중천공로비, 이계익공로비, 백옥당, 사당 이재영 소장 고문서, 고사인이계익무본선덕비 등이 있다.
죽산리 2구 산두(山頭)마을
마을형성은 이조말 주씨가 살았으며 금녕김씨가 마을에 들어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함. 지명유래는 용이 일어난다 하여 용흥(龍興)이라 불렀는데 그 후 마을의 위치가 산머리에 위치하므로 산두라 하였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효자삼성당김년김씨형종기행비, 마을회관 등이 있다.
죽산리 3구 조등(鳥嶝)마을
마을형성은 1925년에 이해암이 영산강변에 황무지를 개간하고 그해 보리 60섬을 해들이자 그 소문이 퍼져 농토 없는 가난한 농가들이 모여들었다함. 지명유래는 지형이 새등처럼 생겨서 마을이름을 조등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1925년경에 설촌된 마을인데 1974년 11월 영산강의 범람으로 인해 현재의 마을터로 집단 이주하였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인수재(함평이씨 이극해의 재실), 임종무 소장 고문서(구운몽 가곡, 일소록), 마을회관 등이 있다.
죽산리 4구 절구(杵九)마을
마을형성은 1650년경에 김해김씨가 이곳에 처음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함. 지명유래는 약 300년 전에 流配(유배)온 어느 개감이 마을형태가 마치 절구통 같이 생겼다하여 절구라 칭하였다고 한다. 옛 우물터 상수도 안에 절구같이 생긴 학독이 들어있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입석 1기(장군석이라 한다), 당산나무(귀목나무 400년), 마을회관 등이 있다.
죽산리 5구 화동(化洞)마을
마을형성은 500년전에 고흥에서 아산이씨 할머니가 남편과 며느리를 잃고 이곳으로 와서 함평이씨를 다시 며느리로 들여 자손을 번성시켰음. 마을지명은 마을이 배 형국이다. 마을앞까지 배가 드나드는 죽포(竹浦), 선두촌(船頭村)이라 하였으며 그 후 일제시대에 고흥류씨 선산이 홍화동에 있다하여 화동이라 하다가 일제말기에 한자를 간략화하여 화동으로 표기하였다고 하며, 외지에서는 마을 이름을 장춘정이라고 불렀다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장춘정(지방기념물 제201호, 류충정의 정각), 숭모재(고흥류씨 만호 파의배위 아산이씨의 재실(류충정의 조모)), 추원재(고흥류씨 광국공신(선계변무의공) 남호공 류은의 재각), 월계정(고흥유씨 류인명의 정각), 전선소, 고인돌(5기 - 우암춘 뒷산에 있다), 입석(3개), 느티나무(수령 330년된 나무 3구루), 팽나무(수령 330년된 나무 3구루), 은행나무(수령 500년된 나무 1구루), 죽포면사무소터(죽산리 888번지에 있었다. - 최영호 소유 밭), 통정대부도호부사 장춘공유장비, 죽산양수장, 마을회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