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당리
- 날짜
- 2020.04.16
- 조회수
- 843
- 등록자
- 관리자
총 면적은 301만㎡이며, 청림산의 남동쪽에 있는 무제봉 능선이 남쪽으로 뻗어내려있으며, 서쪽으로 고막원천을 건너면 함평군 학교면 석정리, 남쪽은 영산강 건너 공산면 백사, 신곡리와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동당리는, 1구 두만(斗滿), 2구 동백(冬栢, 堂村), 3구 청림(靑林化丁)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동당리 1구 두만(斗滿)마을
마을형성은 500년전에 정씨들이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그 후 팀진최씨가 마을에 이주하면서 주축을 이루고 있음. 지명유래는 마을 뒷산이 남쪽으로 내밀려 감싸 두머니라 칭했으나 이를 한자로 옮기면서 두만이라고 했다. 마을에서는 월서(月西, 당산메)마을과 두만(豆滿)마을을 합하여 두만마을의 만자와 월서 마을의 월자를 각각 취하여 만월(滿月)이라고도 부른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산7번지에 23여기가 산재해 있다), 사당(祠堂 - 1770년 최수인이 동당리 113번지에 건립한 최진명 사당이다), 삼청당(탐진최씨 진한의 재각), 영사재(탐진최씨 최진명의 재각), 관경재(탐진최씨 최진명의 재각), 두호재(최진명이 후학을 가르친 서당(1965년 훼철되었다), 선돌, 최영오 소장 고문서, 동각, 마을회관 등이 있다.
동당리 2구 백촌(冬栢, 堂村)마을
초록빛 잔디 한가운데 돌로정교하게 깎아놓은 울타리 가운데 세워진 문촌공 이광선장군 충의비
유래는 금성산의 서쪽 청림산 구릉지에 500년전 하동정씨가 터를 잡아 마을 복판 석관수(石串水)주변에 동백나무가 울창하여 동백정(冬栢汀)이라 하고, 뒷산 서당(書堂)의 글소리가 울리니 당촌(堂村)이라 하였다.
이조말엽 최씨, 양씨도 살았으며 1608년 나주고을 개선장군(凱旋將軍) 함평이씨 문촌공 이광선장군 후손들이 1650년경부터 입촌(入村)하여 자작일촌(自作一村)마을로 지금에 이르며 양 마을을 통합 백촌(柏村)마을이라 한다. 마을 내 유물로는 석관정(石串汀) 나루터 강상(江上)절벽위에 함평이씨 석관(石串) 진충(盡忠)이 신녕 현감을 퇴임한 후 1530년 창건한 석관정(石串亭), 마을입구 우람하게 서 있는 임란공신 병참 이광선장군 충의비(장군의 이치, 행주대첩 행적), 영사재(문촌공 제실), 문촌회관(문촌공 후손들의 집회장), 포열각(이대헌의 처 나주나씨 열녀각(烈女閣)), 이광선 장군 추모비(장군의 거룩한 얼을 추앙) 마을회관이 있고,
고서(古書)로는 후손들이 중히 여기던 이광선장군의 교지(1599) 4점 및 선무원종공신녹권(1605)은 문화재급으로 광주박물관에 기탁되어 전시중이다. 또한 1728년 분무원종공신 수면당 이시창(李時昌 : 병참 광선 현손), 1919년 독립지사(志士) 호은 이계술(李啓述 : 兵參 光先 12세손, 栢村 敦珪의 親孫)의 생가(生家)이고 마을 앞 동촌저수지는 강태공들에게 잘 알려진 곳이다.
동당리 3구 청림(靑林化丁)마을
지명유래는 영산강 유로가 굽이 돌기에 꽃쟁이(化丁)이라 했다가 마을 주위에 나무가 많고 숲속에 마을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숲이 많다하여 청림(靑林)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샛골나이(중요무형문화재 제28호), 면나무(팽나무로 수령 250년, 수고 16m, 둘레 3.0m로 1982년 12월 3일에 지정되었다), 모인재(탐진최씨 사촌 최사물의 재각), 고인돌, 마을회관 등이 있다.
동당리 1구 두만(斗滿)마을
마을형성은 500년전에 정씨들이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그 후 팀진최씨가 마을에 이주하면서 주축을 이루고 있음. 지명유래는 마을 뒷산이 남쪽으로 내밀려 감싸 두머니라 칭했으나 이를 한자로 옮기면서 두만이라고 했다. 마을에서는 월서(月西, 당산메)마을과 두만(豆滿)마을을 합하여 두만마을의 만자와 월서 마을의 월자를 각각 취하여 만월(滿月)이라고도 부른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산7번지에 23여기가 산재해 있다), 사당(祠堂 - 1770년 최수인이 동당리 113번지에 건립한 최진명 사당이다), 삼청당(탐진최씨 진한의 재각), 영사재(탐진최씨 최진명의 재각), 관경재(탐진최씨 최진명의 재각), 두호재(최진명이 후학을 가르친 서당(1965년 훼철되었다), 선돌, 최영오 소장 고문서, 동각, 마을회관 등이 있다.
동당리 2구 백촌(冬栢, 堂村)마을
초록빛 잔디 한가운데 돌로정교하게 깎아놓은 울타리 가운데 세워진 문촌공 이광선장군 충의비
유래는 금성산의 서쪽 청림산 구릉지에 500년전 하동정씨가 터를 잡아 마을 복판 석관수(石串水)주변에 동백나무가 울창하여 동백정(冬栢汀)이라 하고, 뒷산 서당(書堂)의 글소리가 울리니 당촌(堂村)이라 하였다.
이조말엽 최씨, 양씨도 살았으며 1608년 나주고을 개선장군(凱旋將軍) 함평이씨 문촌공 이광선장군 후손들이 1650년경부터 입촌(入村)하여 자작일촌(自作一村)마을로 지금에 이르며 양 마을을 통합 백촌(柏村)마을이라 한다. 마을 내 유물로는 석관정(石串汀) 나루터 강상(江上)절벽위에 함평이씨 석관(石串) 진충(盡忠)이 신녕 현감을 퇴임한 후 1530년 창건한 석관정(石串亭), 마을입구 우람하게 서 있는 임란공신 병참 이광선장군 충의비(장군의 이치, 행주대첩 행적), 영사재(문촌공 제실), 문촌회관(문촌공 후손들의 집회장), 포열각(이대헌의 처 나주나씨 열녀각(烈女閣)), 이광선 장군 추모비(장군의 거룩한 얼을 추앙) 마을회관이 있고,
고서(古書)로는 후손들이 중히 여기던 이광선장군의 교지(1599) 4점 및 선무원종공신녹권(1605)은 문화재급으로 광주박물관에 기탁되어 전시중이다. 또한 1728년 분무원종공신 수면당 이시창(李時昌 : 병참 광선 현손), 1919년 독립지사(志士) 호은 이계술(李啓述 : 兵參 光先 12세손, 栢村 敦珪의 親孫)의 생가(生家)이고 마을 앞 동촌저수지는 강태공들에게 잘 알려진 곳이다.
동당리 3구 청림(靑林化丁)마을
지명유래는 영산강 유로가 굽이 돌기에 꽃쟁이(化丁)이라 했다가 마을 주위에 나무가 많고 숲속에 마을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숲이 많다하여 청림(靑林)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샛골나이(중요무형문화재 제28호), 면나무(팽나무로 수령 250년, 수고 16m, 둘레 3.0m로 1982년 12월 3일에 지정되었다), 모인재(탐진최씨 사촌 최사물의 재각), 고인돌, 마을회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