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곡리
- 날짜
- 2020.04.16
- 조회수
- 818
- 등록자
- 관리자
총 면적은 274만여㎡에 이르며, 해발 30∼50m쯤인 구릉지에 기대고 양지바른 남동향을 취하면서 동네가 자리하고 있다. 가장 서쪽에 있는 동촌은 옷갓등(33m) 자락에 등을 대고 동쪽 대양뫼에서 나온 새양골과 가식골 남쪽 황새골에서 나온 물이 적신 들을 남쪽에 두고 있다. 동곡리는 1구 동촌(東村), 2구 대곡(大谷)·횡산(橫山), 3구 월곡(月谷), 4구 시계(市溪), 5구 월성(月星)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동곡리 1구 동촌(東村)마을
마을형성은 오랜 옛날 고대국가시대부터 마을이 있었으나 그 년대는 미상이고 1595년 수성최씨 십삼대때부터 거주하여 마을이 형성돔. 지명유래는 원래 수다의 본촌 마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동촌 마을이라 하였다. 당삿굴은 동촌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고, 샘모실은 당삿굴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신기(새터)라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지석[고인돌](돌곡재에 12기가 있다[돌칼, 돌도끼가 마을 뒷산 옥갓 등에서 출토되었다]), 최택현선생순국유덕비(학교면 석정에서 일본 헌병과 싸우다 48세에 순절한 최택현(1862∼1907)을 기린 빗돌), 효열부유인수성최씨효열비, 경사재(함평이씨 참의공 이현의 재각), 동산재(흥성장씨 참봉공의 재각), 사당(1700년에 지은 수성최씨 종가집 사당), 이계학소장고문서, 최병학소장고문서와 연자방아, 마을창고, 회관 등이 있다.
동곡리 2구 대곡(大谷)마을
마을형성은 고려시대때부터 김씨, 정씨, 이씨가 살았으며 그 후 점차 마을이 형성되었음. 지명유래는 원래 물한실이라 부르며 큰마을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한실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대곡이라 한 것이다. 마을에서는 물안실은 수다촌(水多村)으로, 물안실은 물한실로 변하고 다시 한실, 대곡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비자나무(마을 동각 옆에 있으며, 수령은 500~700년으로 본다), 선돌(立石 - 마을 앞에 배맨돌이 있고 마을안에 3기가 있다. 동각 옆에 있는 것은 높이 94cm쯤 되고 선독거리 느티나무 옆에 있는 것은 높이 70cm, 폭 40cm쯤 된다. 정복림 배밭에도 1기가 있다), 연자방아, 정자, 마을회관 등이 있다. ☞ 회산(橫山)마을, 원래 비들메라 부른다. 이는 둘러진 산기슭에 위치함에 붙여진 이름으로 비들메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횡산으로 표기하다 오늘에 이르렀다. 주민들은 고려시대에 횡산소(橫山所)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동곡리 고분군(문화재자료 제219호)이 동곡리 210번지 이준호 집 뒤 조산에 있다.
동곡리 3구 월곡(月谷)마을
마을형성은 이조중기 밀양박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지명유래는 마을 뒷산이 달 모양 비슷하다하여 월곡이라 칭(稱)했다고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대림개발(옛 박금서 땅이던 점등 27번지 일대 6만여㎡에 10만주가 넘는 오엽송이 20년전에 나주 금천에서 온 김옥수에 의해 가꾸어져 있다), 현재는 없어진 기와 점터, 동각, 마을회관 등이 있다.
동곡리 4구 시계(市溪)마을
마을형성은 원래 월곡마을이였으나 1952년에 신용마을에 있던 시장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시장주위로 점차 주택이 들어서게 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는 원래 월곡마을 일부로 저습지, 일부는 하천부지, 일부는 철도부지인 밭이었던 곳을 1952년 신용마을에 있던 장터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시장 주변으로 점차 들어서게 되어 1970년 월곡마을에서 분리되어 마을앞에 하천이 시냇물이 흐른다하여 마을이름을 시계라 했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정부도정공장, 양곡창고 6동, 다시면 5일시장 등이 있다.
동곡리 5구 월성(月星)마을
마을형성은 1935년경에 이 마을에 3호가 거주하며 지내다 그 후 1955년경에 서상식을 비롯하여 다수가 과수원을 경작코자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됨. 지명유래는 원래 반달고장이라 했다. 마을에서는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월영동(月影洞)이라 하였는데 마을이 형성되면서 마을 이름이 달그늘에서 살아야 되겠느냐 마을명을 바꾸자 하여 월성으로 개칭하였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월성배작목반저온저장고, 마을회관 등이 있다.
동곡리 1구 동촌(東村)마을
마을형성은 오랜 옛날 고대국가시대부터 마을이 있었으나 그 년대는 미상이고 1595년 수성최씨 십삼대때부터 거주하여 마을이 형성돔. 지명유래는 원래 수다의 본촌 마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동촌 마을이라 하였다. 당삿굴은 동촌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고, 샘모실은 당삿굴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신기(새터)라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지석[고인돌](돌곡재에 12기가 있다[돌칼, 돌도끼가 마을 뒷산 옥갓 등에서 출토되었다]), 최택현선생순국유덕비(학교면 석정에서 일본 헌병과 싸우다 48세에 순절한 최택현(1862∼1907)을 기린 빗돌), 효열부유인수성최씨효열비, 경사재(함평이씨 참의공 이현의 재각), 동산재(흥성장씨 참봉공의 재각), 사당(1700년에 지은 수성최씨 종가집 사당), 이계학소장고문서, 최병학소장고문서와 연자방아, 마을창고, 회관 등이 있다.
동곡리 2구 대곡(大谷)마을
마을형성은 고려시대때부터 김씨, 정씨, 이씨가 살았으며 그 후 점차 마을이 형성되었음. 지명유래는 원래 물한실이라 부르며 큰마을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한실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대곡이라 한 것이다. 마을에서는 물안실은 수다촌(水多村)으로, 물안실은 물한실로 변하고 다시 한실, 대곡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비자나무(마을 동각 옆에 있으며, 수령은 500~700년으로 본다), 선돌(立石 - 마을 앞에 배맨돌이 있고 마을안에 3기가 있다. 동각 옆에 있는 것은 높이 94cm쯤 되고 선독거리 느티나무 옆에 있는 것은 높이 70cm, 폭 40cm쯤 된다. 정복림 배밭에도 1기가 있다), 연자방아, 정자, 마을회관 등이 있다. ☞ 회산(橫山)마을, 원래 비들메라 부른다. 이는 둘러진 산기슭에 위치함에 붙여진 이름으로 비들메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횡산으로 표기하다 오늘에 이르렀다. 주민들은 고려시대에 횡산소(橫山所)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동곡리 고분군(문화재자료 제219호)이 동곡리 210번지 이준호 집 뒤 조산에 있다.
동곡리 3구 월곡(月谷)마을
마을형성은 이조중기 밀양박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지명유래는 마을 뒷산이 달 모양 비슷하다하여 월곡이라 칭(稱)했다고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대림개발(옛 박금서 땅이던 점등 27번지 일대 6만여㎡에 10만주가 넘는 오엽송이 20년전에 나주 금천에서 온 김옥수에 의해 가꾸어져 있다), 현재는 없어진 기와 점터, 동각, 마을회관 등이 있다.
동곡리 4구 시계(市溪)마을
마을형성은 원래 월곡마을이였으나 1952년에 신용마을에 있던 시장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시장주위로 점차 주택이 들어서게 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는 원래 월곡마을 일부로 저습지, 일부는 하천부지, 일부는 철도부지인 밭이었던 곳을 1952년 신용마을에 있던 장터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시장 주변으로 점차 들어서게 되어 1970년 월곡마을에서 분리되어 마을앞에 하천이 시냇물이 흐른다하여 마을이름을 시계라 했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정부도정공장, 양곡창고 6동, 다시면 5일시장 등이 있다.
동곡리 5구 월성(月星)마을
마을형성은 1935년경에 이 마을에 3호가 거주하며 지내다 그 후 1955년경에 서상식을 비롯하여 다수가 과수원을 경작코자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됨. 지명유래는 원래 반달고장이라 했다. 마을에서는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월영동(月影洞)이라 하였는데 마을이 형성되면서 마을 이름이 달그늘에서 살아야 되겠느냐 마을명을 바꾸자 하여 월성으로 개칭하였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월성배작목반저온저장고, 마을회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