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리
- 등록일 2020.04.17 10:33
- 조회수 1224
- 등록자 관리자
면소재지인 신석에서 영산포로 가는 버스를 타고 20여분 쯤 가면, 봉황면의 서북쪽 끝 마을인 신동리에 이른다. 신동리는 서쪽으로는 황용리와 접해 있고, 동북쪽으로는 영산포와 접해 있다. 본래 남평군 욱곡면의 지역으로서 방동, 장산리, 탑동, 두음리 일부와 죽곡면 신점리를 병합하여 1914년 행정구역개편 당시 신동리라 하여 나주군 봉황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신동리는 1구 신정, 2구 두음, 3구 탑동, 장산의 3개구의 편성되어 있다.
장산(長山) 마을
장산마을은 면소재지인 신석에서 영산포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나오는 마을로서 마을의 서쪽으로는 방동마을이 위치하고, 북쪽으로는 영산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어귀에 들어서면 김해김씨 세장비가 마을에 들어오는 손 님들을 반가이 맞고 있으며, 포장된 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면 옛스런 기와집들이 어우러져 있는 작고 아담한 마을이 나오는데, 마을의 뒷편에는 작은 산들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고, 마을의 앞에는 평야가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임산형태의 마을이다. 이 마을은 본래 남평군 욱곡면 장산리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나주군 봉황면 신동리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그 이전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 마을은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종표(朴種表)가 19세기 중반에 금천면 신천리에서 살다가 이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장산마을은 원래가 노루가 앉아 있는 형국이라 하여 노루봉이라 하였는데, 산 옆에 있다하여 처음 이름을 장산(獐山)이라 하였는데 행정구역 개편당시 봉황면 황용리의 긴 산의 말미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장산(長山)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자생조직은 1940년에 창립된 동계가 있으며, 참여인원은 14명이다. 마을의 총인구는 68명으로 남자 35명, 여자 33명이며, 총 면적은 0.16㎢로, 전 0.02㎢, 답 0.09㎢, 임야 0.04㎢. 기타 0.01㎢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의 주요 산업과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과수농사를 짓고 있는 주민이 있고, 성씨로는 밀양박씨 4호, 경주이씨 2호, 김해김씨 3호. 기타 5호가 있다.
방동마을
방동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영산포 가는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20여분 정도 가다보면 나오는데, 도로의 서쪽에 붙어있다. 덕치다리에서 내려 마을에 들어오면 정면에 철천에서 영산포로 흐르는 신동천이 있는데 하천을 중심으로 하여 마을 사람들의 생활터전인 농경지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남쪽으로는 탑동마을, 서쪽으로는 장산마을이 위치하고, 북쪽으로는 마을 뒤편 야산으로 오르는 샛길 하나를 사이로 행정구역상 완전히 다른 나주시 영강동으로 편입된 두 가구가 자리잡고 있다.
방동마을은 1789년 편찬된 호구총수라는 책자에 욱곡면 방동마을이라 보여 이미 200여년 전에도 마을의 규모가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방행정구역 일람에 따르면 남평군 욱곡면 내기리로 되어 있고, 1917년에 간행된 조선면리동 일람에는 나주군에 편입되어 나주군 신동리 방동마을로 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에서 살펴보면 마을 이름이 방동과 내기 두가지였음을 알 수 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현재의 마을에서 남쪽으로 100여m 떨어져 있는 밭주변에 ‘내기'라는 마을이 있었고, 그곳이 경주이씨(慶州李氏)의 본터였다고 전해진다. 내기에서 마지막까지 거주하던 가구가 약 45년 전에 이주함으로써 지금은 모두 밭으로 개간되었는데, 호미질을 하면 기왓장과 서까래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방동 마을의 최초 입향 성씨와 입향 연대는 알려진 바 없으나, 경주이씨(慶州李氏)들이 마을의 터를 잡아 형성하였다고 전해질 뿐이다.
마을의 지명이 방동으로 불리우게 된 유래는 예부터 이 마을에서 자란 사람은 모두가 예쁘고 착한 사람이 된다고 하여 마을터를 잡을 당시에 ‘방동(芳洞)'이라고 칭하였다고 하며, 또한 마을 뒷산의 모양이 꽃처럼 아름다워서 꽃다울 방(芳)자를 써서 방동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이 마을은 마을 앞 평야가 모두 강이었으며, 번창한 마을이었다고 전해지나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 마을에 전해지는 민속으로는 베를 짤 때 부르는 베틀노래가 있다. 마을의 동계는 1980년에 친목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마을의 총인구는 33명으로 남자 17명, 여자 16명이다. 마을의 9가구 모두가 농가이며, 총면적은 0.10㎢로, 전 0.01㎢, 답 0.06㎢, 임야 0.02㎢, 기타 0.01㎢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산업은 쌀농사이며, 성씨로는 경주이씨 4호, 김해김씨 2호, 밀양박씨 2호, 인동장씨 1호가 있다.
탑동마을
탑동마을은 면소재지인 신석에서 영산포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두음마을 앞에서 내려 서쪽으로 좌우로 논이 펼쳐져 있는 길을 따라 5백여m 정도 들어가면 20여호가 모여 사는 아담한 마을이다. 마을을 들어서면 따박솔, 따박나무, 기름솔나무라 불리우는 해송의 일종인 노송 3그루가 마을을 지키는 파수병인양 서 있는 모습이 마을의 기상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마을의 정면에는 논이 펼쳐져 있고, 마을길을 따라 내려가면 철천에서 영산강으로 흐르는 신동천이라 불리우는 하천이 흐르며, 마을의 남서북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만 터져 있는 지형적인 관계로 겨울에 매우 따뜻한 곳이기도 하다. 마을의 서쪽으로는 세지마을이 있고, 북쪽으로 방동마을이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두음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탑동마을의 최초 입향년대와 입향조는 파악할 수 없고, 신안주씨(新案朱氏)가 임진왜란 당시까지 살았다고 전하나, 현재는 한 가구도 거주하지 않고 있으며, 1760년경에 밀양박씨 (密陽朴氏) 박흥진(朴興鎭)(1752~1814)이 영암군 시종면에서 살다가 당시 국란이 있어 이곳 탑동에 이거하여 터를 잡게되어 마을이 형성되고 오늘에 이르렀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연대 미상이나 고려시대 때 이 마을에 절을 창건할 때 석탑을 세워 재앙을 물리치도록 기원하기 위해 많은 석탑을 세웠기 때문에 탑이 있는 마을, 즉 탑동이라 칭하였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마을에는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한 동계가 있으며. 총 인구 98명 중 남자가 52명, 여자가 46명에 이른다. 총 면적은 0.21㎢로, 전 0.04㎢, 답 0.10㎢, 임야 0.05㎢, 기타 0.02㎢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의 총 20가구 중 19호가 농가이고 1호가 비농가이며, 주소득원은 쌀농사이고, 밀양박씨 9호, 성산김씨 4호, 전주최씨 2호, 기타 5호가 거주하고 있다.
두음 마을
두음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영산포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가면 나오는 마을로 도로변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의 앞쪽에는 철천에서 영산강으로 흐르는 신동천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황용리 와룡마을이 있다. 마을의 뒷쪽으로는 신정마을이 위치하고 있는데, 교통편이 매우 편리하다 두음마을은 본래 남평군 욱곡면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봉황면 신동리에 편입되었다.
마을의 최초 입향성씨와 개촌 년대는 확실히 알려진 바 없으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500여년 전에 앞 강을 사이에 두고 제주양씨(濟州梁氏)와 순흥안씨(順興安氏)가 거주하였다고 하고, 후에 나주나씨(羅州羅氏)와 현풍곽씨(玄風郭氏) 등이 입향하여 큰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현풍곽씨(玄風郭氏)가 이 마을에 들어온 연유는 조선조 광해군 때 벼슬을 하던 곽맹종(郭孟宗, 1490~1548)이 역적이라는 모함을 받고 낙향하여 이 마을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두음'이라는 명칭 이전에 신정마을과 함께 ‘둔병'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현재도 둔병과 두음이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둔병이라는 명칭은 아기장수 전설에 연유된 것으로 보이며, 아기장수의 병사들이 이곳에서 주둔하고 있었다고 해서 둔병이라고 칭하였다는데 병사들이 주둔하여 있는 곳이면 말소리가 난다해서 말두(斗)자 소리음(音)자를 써서 둔병에서 두음으로 개칭되었다고 전해지나 언제 개칭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한편 예전에는 이 마을 앞 평야가 모두 강이었으며, 마을 앞까지 군함이 들어와 정박했었다고 전해지며, 1976년 경지정리 때에 배조각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출토되어, 배조각으로 지은 집도 있었다고 한다. 두음 마을의 역사유적으로는 흥덕장씨효열비각(興德長氏孝烈碑閣)이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 팔작지붕이며, 비각 총 높이는 180㎝, 너비 47㎝, 폭 18㎝였으나, 현재는 퇴락하여 비석만이 남아있다. 남편인 곽성채(郭成采, 1863~1896)가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경을 헤매자, 그의 부인이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남편에게 먹여, 며칠간이나 죽음에서 구해냈으나, 끝내 소생치 못하고 사망하였다 한다. 이에 이 부인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개가하지 않고 시부모를 극진히 모셔 마을 사람들이 남평향교에 청원하여 1911년에 현재의 위치인 마을 중앙부에 효열비를 세워주었다 한다.
마을에는 1954년 조직된 동계와 1960년 조직된 상부계, 1976년 조직된 부녀회가 있다. 동계는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는 총회로서 백여년 전부터 전해져 오던 것으로 이농으로 인하여 깨져버리고, 다시 새롭게 만든 동계가 시행되고 있다. 모임은 매년 3월중에 가지며, 동계의 예산과 마을내의 제반사항을 토의한다. 마을의 민속으로는 당산제가 있었고, 민간신앙으로 조앙단지를 모시고 있는 집이 여러 가구 있었다. 조왕단지는 햅쌀을 넣어 성주님에게 바쳐 집안의 우환을 없애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는데 손 없는 날을 택하여, 단지에서 쌀을 퍼내어 밥을 짓는다고 한다. 또한 마을의 큰 굿을 주관하던 단골이 세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기독교의 전파로 다른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총 인구는 203명에 이른다. 이 중 남자는 98명, 여자는 105명이며. 마을의 총 면적은 0.45㎢이다. 이 중 전 0.05㎢, 답 0.12㎢, 임야 0.12㎢, 기타 0.03㎢가 해당되며, 마을 사람들의 주요산업은 쌀과 콩 재배이며, 특작물로는 담배와 인초가 있다. 마을 가구중 반남정씨는 9호, 현풍곽씨는 10호, 제주양씨 3호, 기타 24호가 살고 있다.
신정마을
신정마을은 면소재지 신석에서 영산포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15분정도 가면 나오는데 버스에서 내려 두음마을을 지나 약 300m 정도 잘 포장된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옹기굽는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나는 평화스러움이 넘쳐 흐르는 마을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생활환경이 아파트문화로 바뀌면서 옹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없어, 옹기굽는 연기는 더 이상 볼 수 없으며, 마을안에 있던 50미터 정도의 옹기굴은 퇴락한 채 방치되어 있다. 신정마을은 본래 남평군 죽곡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나주군 봉황면에 편입되었고, 그 전의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이 마을의 개촌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전주이씨(全州李氏), 김해김씨(金海金氏), 제주양씨(濟州梁氏)등이 차례로 들어와 큰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지명 유래는 마을 형국이 밥을 짓는 솥형국이라고 해서 소정국이라고도 하고, 옹기를 굽는다고 해서, 예전에는 ‘신점' 혹은 ‘점등'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나 자유당 말기 때 신정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한편 예전에는 남평에서 서울로 가는 가장 큰길이며, 가까운 길이어서 고을 원님들이 서울로 가는 길에 꼭 쉬었다가는 마을이라고 하여 작은 한양이라고도 불리웠다. 두음과 함께 둔병리라고도 불리었다고 전한다.
신정마을에서 생산된 명물옹기는 나주군의 전역과 전남지방 일부에 공급되었는데, 마을 형국이 밥을 짓는 솥 형국이라 마을에 불을 피우면 마을이 부강하게 된다고 하여 전주이씨가 처음 살때부터 굽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와 함께 마을에 옹기의 재료로 쓰이는 진흙과 나무가 지천으로 널려있는 입지적인 조건도 옹기를 만들게 된 주요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마을의 동계는 1950년에 조직되었으며. 현재 참여인원은 48명이며, 1976년에 조직된 청년회와 부녀회가 있다. 마을의 기본현황은 총인구 253명 중 남자가 127명, 여자가 126명이며, 총면적은 0.39㎢이다. 이 중 전 0.09㎢, 답 0.13㎢, 임야 0.16㎢, 기타 0.01㎢가 해당되며, 총 48가구 중 농가는 44호, 비농가는 4호가 있다. 마을의 주요 산업은 쌀과 콩 재배이고,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다. 특작물로는 수박을 재배하고 있으며. 마을의 주요 성씨로는, 김해김씨 20호, 경주이씨 10호, 제주양씨 12호, 기타 6호가 있다.
장산(長山) 마을
장산마을은 면소재지인 신석에서 영산포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나오는 마을로서 마을의 서쪽으로는 방동마을이 위치하고, 북쪽으로는 영산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어귀에 들어서면 김해김씨 세장비가 마을에 들어오는 손 님들을 반가이 맞고 있으며, 포장된 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면 옛스런 기와집들이 어우러져 있는 작고 아담한 마을이 나오는데, 마을의 뒷편에는 작은 산들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고, 마을의 앞에는 평야가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임산형태의 마을이다. 이 마을은 본래 남평군 욱곡면 장산리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나주군 봉황면 신동리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그 이전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 마을은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종표(朴種表)가 19세기 중반에 금천면 신천리에서 살다가 이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장산마을은 원래가 노루가 앉아 있는 형국이라 하여 노루봉이라 하였는데, 산 옆에 있다하여 처음 이름을 장산(獐山)이라 하였는데 행정구역 개편당시 봉황면 황용리의 긴 산의 말미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장산(長山)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자생조직은 1940년에 창립된 동계가 있으며, 참여인원은 14명이다. 마을의 총인구는 68명으로 남자 35명, 여자 33명이며, 총 면적은 0.16㎢로, 전 0.02㎢, 답 0.09㎢, 임야 0.04㎢. 기타 0.01㎢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의 주요 산업과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과수농사를 짓고 있는 주민이 있고, 성씨로는 밀양박씨 4호, 경주이씨 2호, 김해김씨 3호. 기타 5호가 있다.
방동마을
방동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영산포 가는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20여분 정도 가다보면 나오는데, 도로의 서쪽에 붙어있다. 덕치다리에서 내려 마을에 들어오면 정면에 철천에서 영산포로 흐르는 신동천이 있는데 하천을 중심으로 하여 마을 사람들의 생활터전인 농경지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남쪽으로는 탑동마을, 서쪽으로는 장산마을이 위치하고, 북쪽으로는 마을 뒤편 야산으로 오르는 샛길 하나를 사이로 행정구역상 완전히 다른 나주시 영강동으로 편입된 두 가구가 자리잡고 있다.
방동마을은 1789년 편찬된 호구총수라는 책자에 욱곡면 방동마을이라 보여 이미 200여년 전에도 마을의 규모가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방행정구역 일람에 따르면 남평군 욱곡면 내기리로 되어 있고, 1917년에 간행된 조선면리동 일람에는 나주군에 편입되어 나주군 신동리 방동마을로 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에서 살펴보면 마을 이름이 방동과 내기 두가지였음을 알 수 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현재의 마을에서 남쪽으로 100여m 떨어져 있는 밭주변에 ‘내기'라는 마을이 있었고, 그곳이 경주이씨(慶州李氏)의 본터였다고 전해진다. 내기에서 마지막까지 거주하던 가구가 약 45년 전에 이주함으로써 지금은 모두 밭으로 개간되었는데, 호미질을 하면 기왓장과 서까래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방동 마을의 최초 입향 성씨와 입향 연대는 알려진 바 없으나, 경주이씨(慶州李氏)들이 마을의 터를 잡아 형성하였다고 전해질 뿐이다.
마을의 지명이 방동으로 불리우게 된 유래는 예부터 이 마을에서 자란 사람은 모두가 예쁘고 착한 사람이 된다고 하여 마을터를 잡을 당시에 ‘방동(芳洞)'이라고 칭하였다고 하며, 또한 마을 뒷산의 모양이 꽃처럼 아름다워서 꽃다울 방(芳)자를 써서 방동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이 마을은 마을 앞 평야가 모두 강이었으며, 번창한 마을이었다고 전해지나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 마을에 전해지는 민속으로는 베를 짤 때 부르는 베틀노래가 있다. 마을의 동계는 1980년에 친목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마을의 총인구는 33명으로 남자 17명, 여자 16명이다. 마을의 9가구 모두가 농가이며, 총면적은 0.10㎢로, 전 0.01㎢, 답 0.06㎢, 임야 0.02㎢, 기타 0.01㎢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산업은 쌀농사이며, 성씨로는 경주이씨 4호, 김해김씨 2호, 밀양박씨 2호, 인동장씨 1호가 있다.
탑동마을
탑동마을은 면소재지인 신석에서 영산포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두음마을 앞에서 내려 서쪽으로 좌우로 논이 펼쳐져 있는 길을 따라 5백여m 정도 들어가면 20여호가 모여 사는 아담한 마을이다. 마을을 들어서면 따박솔, 따박나무, 기름솔나무라 불리우는 해송의 일종인 노송 3그루가 마을을 지키는 파수병인양 서 있는 모습이 마을의 기상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마을의 정면에는 논이 펼쳐져 있고, 마을길을 따라 내려가면 철천에서 영산강으로 흐르는 신동천이라 불리우는 하천이 흐르며, 마을의 남서북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만 터져 있는 지형적인 관계로 겨울에 매우 따뜻한 곳이기도 하다. 마을의 서쪽으로는 세지마을이 있고, 북쪽으로 방동마을이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두음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탑동마을의 최초 입향년대와 입향조는 파악할 수 없고, 신안주씨(新案朱氏)가 임진왜란 당시까지 살았다고 전하나, 현재는 한 가구도 거주하지 않고 있으며, 1760년경에 밀양박씨 (密陽朴氏) 박흥진(朴興鎭)(1752~1814)이 영암군 시종면에서 살다가 당시 국란이 있어 이곳 탑동에 이거하여 터를 잡게되어 마을이 형성되고 오늘에 이르렀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연대 미상이나 고려시대 때 이 마을에 절을 창건할 때 석탑을 세워 재앙을 물리치도록 기원하기 위해 많은 석탑을 세웠기 때문에 탑이 있는 마을, 즉 탑동이라 칭하였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마을에는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한 동계가 있으며. 총 인구 98명 중 남자가 52명, 여자가 46명에 이른다. 총 면적은 0.21㎢로, 전 0.04㎢, 답 0.10㎢, 임야 0.05㎢, 기타 0.02㎢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의 총 20가구 중 19호가 농가이고 1호가 비농가이며, 주소득원은 쌀농사이고, 밀양박씨 9호, 성산김씨 4호, 전주최씨 2호, 기타 5호가 거주하고 있다.
두음 마을
두음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영산포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가면 나오는 마을로 도로변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의 앞쪽에는 철천에서 영산강으로 흐르는 신동천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황용리 와룡마을이 있다. 마을의 뒷쪽으로는 신정마을이 위치하고 있는데, 교통편이 매우 편리하다 두음마을은 본래 남평군 욱곡면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봉황면 신동리에 편입되었다.
마을의 최초 입향성씨와 개촌 년대는 확실히 알려진 바 없으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500여년 전에 앞 강을 사이에 두고 제주양씨(濟州梁氏)와 순흥안씨(順興安氏)가 거주하였다고 하고, 후에 나주나씨(羅州羅氏)와 현풍곽씨(玄風郭氏) 등이 입향하여 큰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현풍곽씨(玄風郭氏)가 이 마을에 들어온 연유는 조선조 광해군 때 벼슬을 하던 곽맹종(郭孟宗, 1490~1548)이 역적이라는 모함을 받고 낙향하여 이 마을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두음'이라는 명칭 이전에 신정마을과 함께 ‘둔병'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현재도 둔병과 두음이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둔병이라는 명칭은 아기장수 전설에 연유된 것으로 보이며, 아기장수의 병사들이 이곳에서 주둔하고 있었다고 해서 둔병이라고 칭하였다는데 병사들이 주둔하여 있는 곳이면 말소리가 난다해서 말두(斗)자 소리음(音)자를 써서 둔병에서 두음으로 개칭되었다고 전해지나 언제 개칭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한편 예전에는 이 마을 앞 평야가 모두 강이었으며, 마을 앞까지 군함이 들어와 정박했었다고 전해지며, 1976년 경지정리 때에 배조각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출토되어, 배조각으로 지은 집도 있었다고 한다. 두음 마을의 역사유적으로는 흥덕장씨효열비각(興德長氏孝烈碑閣)이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 팔작지붕이며, 비각 총 높이는 180㎝, 너비 47㎝, 폭 18㎝였으나, 현재는 퇴락하여 비석만이 남아있다. 남편인 곽성채(郭成采, 1863~1896)가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경을 헤매자, 그의 부인이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남편에게 먹여, 며칠간이나 죽음에서 구해냈으나, 끝내 소생치 못하고 사망하였다 한다. 이에 이 부인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개가하지 않고 시부모를 극진히 모셔 마을 사람들이 남평향교에 청원하여 1911년에 현재의 위치인 마을 중앙부에 효열비를 세워주었다 한다.
마을에는 1954년 조직된 동계와 1960년 조직된 상부계, 1976년 조직된 부녀회가 있다. 동계는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는 총회로서 백여년 전부터 전해져 오던 것으로 이농으로 인하여 깨져버리고, 다시 새롭게 만든 동계가 시행되고 있다. 모임은 매년 3월중에 가지며, 동계의 예산과 마을내의 제반사항을 토의한다. 마을의 민속으로는 당산제가 있었고, 민간신앙으로 조앙단지를 모시고 있는 집이 여러 가구 있었다. 조왕단지는 햅쌀을 넣어 성주님에게 바쳐 집안의 우환을 없애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는데 손 없는 날을 택하여, 단지에서 쌀을 퍼내어 밥을 짓는다고 한다. 또한 마을의 큰 굿을 주관하던 단골이 세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기독교의 전파로 다른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총 인구는 203명에 이른다. 이 중 남자는 98명, 여자는 105명이며. 마을의 총 면적은 0.45㎢이다. 이 중 전 0.05㎢, 답 0.12㎢, 임야 0.12㎢, 기타 0.03㎢가 해당되며, 마을 사람들의 주요산업은 쌀과 콩 재배이며, 특작물로는 담배와 인초가 있다. 마을 가구중 반남정씨는 9호, 현풍곽씨는 10호, 제주양씨 3호, 기타 24호가 살고 있다.
신정마을
신정마을은 면소재지 신석에서 영산포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15분정도 가면 나오는데 버스에서 내려 두음마을을 지나 약 300m 정도 잘 포장된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옹기굽는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나는 평화스러움이 넘쳐 흐르는 마을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생활환경이 아파트문화로 바뀌면서 옹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없어, 옹기굽는 연기는 더 이상 볼 수 없으며, 마을안에 있던 50미터 정도의 옹기굴은 퇴락한 채 방치되어 있다. 신정마을은 본래 남평군 죽곡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나주군 봉황면에 편입되었고, 그 전의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이 마을의 개촌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전주이씨(全州李氏), 김해김씨(金海金氏), 제주양씨(濟州梁氏)등이 차례로 들어와 큰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지명 유래는 마을 형국이 밥을 짓는 솥형국이라고 해서 소정국이라고도 하고, 옹기를 굽는다고 해서, 예전에는 ‘신점' 혹은 ‘점등'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나 자유당 말기 때 신정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한편 예전에는 남평에서 서울로 가는 가장 큰길이며, 가까운 길이어서 고을 원님들이 서울로 가는 길에 꼭 쉬었다가는 마을이라고 하여 작은 한양이라고도 불리웠다. 두음과 함께 둔병리라고도 불리었다고 전한다.
신정마을에서 생산된 명물옹기는 나주군의 전역과 전남지방 일부에 공급되었는데, 마을 형국이 밥을 짓는 솥 형국이라 마을에 불을 피우면 마을이 부강하게 된다고 하여 전주이씨가 처음 살때부터 굽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와 함께 마을에 옹기의 재료로 쓰이는 진흙과 나무가 지천으로 널려있는 입지적인 조건도 옹기를 만들게 된 주요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마을의 동계는 1950년에 조직되었으며. 현재 참여인원은 48명이며, 1976년에 조직된 청년회와 부녀회가 있다. 마을의 기본현황은 총인구 253명 중 남자가 127명, 여자가 126명이며, 총면적은 0.39㎢이다. 이 중 전 0.09㎢, 답 0.13㎢, 임야 0.16㎢, 기타 0.01㎢가 해당되며, 총 48가구 중 농가는 44호, 비농가는 4호가 있다. 마을의 주요 산업은 쌀과 콩 재배이고,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다. 특작물로는 수박을 재배하고 있으며. 마을의 주요 성씨로는, 김해김씨 20호, 경주이씨 10호, 제주양씨 12호, 기타 6호가 있다.
- 담당부서 봉황면 총무
- 전화 061-339-3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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