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리
- 날짜
-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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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0
- 등록자
- 관리자
나주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8㎞, 남평에서 남쪽으로 약 8㎞지점, 그리고 본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4㎞쯤에 위치한 장성리는 동쪽으로는 건지산과 마주보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용전리, 북쪽으로는 옥산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장성리는 호구총수에서 남평현 죽곡리 장성동으로 나타나 1914년 지방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장성리, 두함리, 다각리 일부를 병합하여 나주군 봉황면에 편입 현재에 이른다. 장성리는 장자못을 경계로 1구 장성마을과 2구 두함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또한 장성리는 도로변에 위치한 관계로 교통이 편리한 편이며, 주민들 대부분이 농경에 종사하고 있고, 담배, 수박등의 특용작물과 축산으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장성마을
나주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8㎞, 남평에서 남쪽으로 약 8㎞, 그리고 면소재지인 신석마을에서 약 4㎞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장성마을은 본 마을인 장성과 새터라 불리우는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의 동쪽은 건지산과 마주하며, 서쪽으로는 용전리 용전마을과 남쪽으로는 장자못을 사이에 두고 두함마을과 인접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유곡리 낙동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의 면적은 182여만 ㎡인데 논이 약50만㎡, 밭이 약 24만㎡, 임야가 약 106만㎡이었던 것이 야산개발로 인하여 밭의 면적이 56만㎡으로 늘어났다. 이 마을이 120여 호가 넘는 큰 마을로 융성할 수 있는 요건은 논, 밭, 임야의 비율이 30:30:30 %로, 논과 밭의 토질이 비옥하고 화학비료가 없었던 옛날에 쌀, 보리 목화, 콩 등의 주, 의, 식생활에 풍부한 주곡을 생산했고, 인근에 건지산이 있어 땔감 구하기가 용이한 환경을 갖춘 마을로 주민들이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
또한 주민들의 개척정신이 강하여 일제시대부터 일본, 만주, 서울 등 각 지역에 진출하여 상업 및 사업에 종사하며, 인근 주변 마을의 농토까지 많이 확보하게 되자, 부유한 친척을 찾아 타지역에서 주민들이 이주해 와서 현재와 같이 큰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장성마을의 형성에 있어서 정확한 연혁은 알 수 없으나,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조선조 선조 25년 임진왜란 후 약 300여년전, 난을 피해 거의 같은 무렵에 평택임씨(平澤林氏), 현풍곽씨(玄風郭氏), 옥천조씨(玉川趙氏), 광산노씨(光山盧氏)가 정착하였다고 하며, 이는 현재 각 문중에 보관된 족보의 연호와 일치하며 대략 1600년 경이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평택임씨(平澤林氏)는 관해공파(觀海公派) 5세손인 언선(彦善)이 화순에서 거주하다가 죽자, 그의 부인 해주최씨가 가족을 이끌고 철야로 이주하였으나 그곳에서 살지 못하고 지금의 장성마을로 이주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현풍곽씨(玄風郭氏)의 시조로부터 23세손인 해미군파(海美君派)인 만필(萬弼)이 광주시 광산구 임곡 산막동에서 당시 난을 피하여 가족과 함께 정처없이 떠돌다 정착한 곳이 정성마을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옥천조씨(玉川趙氏) 판관공파(判官公派)의 9세손인 중추부사 운복이 영암군 시종면에서 살다가 이주해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는 교통의 요지였다. 마을 동쪽의 남북을 가로지른 도로는 지금의 영암, 강진, 해남, 장흥 등 남부지방에서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는 사람과 대상인 보부상들의 중요한 통행로로 오늘의 국도에 준한다. 지금은 아스팔트가 포장되어 광주에서 남평을 경유해 20분 정도 소요후 이 곳에 이를 수 있으며, 서쪽으로는 금천 삼거리로 통하는 신작로가 1920년에 개통하여 우마차가 통행하고 나주, 영산포, 광주 각 방면으로 물량 수송을 하는데 편리하여 산업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현재는 군내버스가 수시로 다닌다.
이 마을 주민들은 정착하면서부터 남달리 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이 대단하였다. 후손들의 교육을 위하여 이조때부터 마을 뒤편에 높은 터를 잡아 유일한 교육기관으로 서당을 짓자, 각지에서 학동들이 몰려들었다. 당시에는 부자집 행랑채에서 훈장을 모셔와 그 마을 학동 몇몇이 공부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오늘날의 학교와 버금가는 단독건물에 훈장을 모셔와 지역인재 양성에 기여했다.
1930년대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 서당이 폐쇄하기에 이르자, 마을 앞 동각에 간이학교를 세워 신학과 한학을 가르쳤는데 이 학교 교사 조선생의 강의는 소문이 나서 봉황면 일원에서는 물론 송현리에 살고 있는 일본인까지 이 간이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42년에는 이 간이학교마저 폐쇄하게 되었지만, 이 마을 선조들의 교육열은 봉황국민학교로 자녀들을 진학시켜 일제 식민지하에서 우리 조선 사람으로는 중학교에 입학하기가 힘들었는데도 이 마을 곽재옥이 광주농업학교에 합격하는 영광을 갖기도 하였다.
장성이라는 지명유래는 처음 이 마을에 정착한 평택임씨(平澤林氏), 현풍곽씨(玄風郭氏), 옥천조씨(玉川趙氏)가 합의하여 역사가 있는 한 유구히 번성하여 갈 터전이라 하여 장성(長盛)이라 칭했다는 설과 과거 이 마을 앞에 장승이 있어서 장성이라 칭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이 마을의 민속으로는 1960년대까지 연중행사와 같이 제일 농사를 잘 지은 농가의 만드리 (벼농사의 4번째 끝 논메기) 날에, 풍년에 감사하고 1년동안 농사일에 고생한 일꾼들과 마을 전체 농사꾼을 위로하는 잔치인 풍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현대식 영농에 밀려 옛 풍장은 하지 않고 있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951년에 조직된 상조계에 72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1963년 청장년들의 친목을 위해 조직된 장화계가 40여명의 마을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운영되고 있고, 정축생 동갑들의 친목도모를 위한 동갑계가 1976년 조직되었다. 마을에는 남자 330명, 여자 220명 등 총인구가 550명에 달하는 큰 마을로서, 총 면적은 0.59㎢로, 이 중 전 0.28㎢, 답 0.28㎢, 임야 0.02㎢, 기타 0.01㎢에 달한다. 큰 마을답게 총 96가구가 살고 있는데, 이 중 농가는 94호, 비농가는 2호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산업과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담배와 수박등의 특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주요 성씨는 김해김씨 19호, 평택임씨 21호, 옥천조씨 11호와 기타 성씨 45호가 거주하고 있다.
두함마을(斗含)
면소재지인 신석마을에서 북쪽으로 약 3㎞쯤 떨어진 금봉선 지방도변에 위치한 두함마을은 동쪽으로는 건지산과 마주보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용전리, 북쪽으로는 장성골 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년 전에 양성이씨(陽城李氏)인 이언국(李彦國)이 전라북도 태인에서 임진왜란 후 나주 흥룡동으로 와서 나주고을을 유람하던 중 지형과 형세가 수려한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후 전주이씨 양원군파(楊原君派) 11세손인 종필(鍾弼)은 나주 세지면에서 살다가 양성이씨(陽城李氏) 집안과 결혼하면서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 후 김해김씨(金海金氏), 경주이씨(慶州李氏) 등이 차례로 들어와 마을이 차츰 크게 형성되었다. 그러나 구전으로는 양성이씨(陽城李氏) 이전에 백씨들이 살았다고도 한다. 오래된 마을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증거로는 마을 주변의 논이나 밭을 깊이 파보면 기와장이나 주춧돌 등의 집터 흔적이 나타나는 것을 들 수 있다.
두함(斗含)이라는 이름은 1789년에 간행된 호구총서에 남평현(南平縣) 죽곡면(竹谷面) 두함동(斗含洞)으로 처음 나오고, 지방행정구역일람에도 두함리(斗含里)로 되어 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봉황면 장성리(長盛里)에 편입되었다. 두함(斗含)이라는 명칭은 마을의 지형이 동서로 분리되어 있는데 서촌은 말(斗) 형국이고 동촌은 含(머금은 꽃) 형국이라 하여 두함동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한편으로 두흥동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말(斗) 속에 담긴 재물이 밖으로 흐르지 않고 차곡차곡 불어나는 부흥 마을에서 연유된 듯 하다.
1940년대 말까지만 해도 주민 전체가 지극히 곤란한 빈촌이었는데 이는 사방이 막혀 있어야 한 말이 북쪽이 툭 터져 있기에 물질이 흘러버린다는 이치 때문에 빈곤을 면할 수 없었다. 다행히 1943년에 장성마을과 두함동의 중간쯤 되는 들녘에 큰 저수지를 막게 되어 사방이 막힌 완전한 말을 형성하므로 그때부터 마을에 부가 축적되고 부자가 속출하고 부촌으로 변모되었다고 한다. 과거 이 마을에는 선독골이라 불리우는 곳에 입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고, 지명만 전해져온다.
마을의 민속으로는 줄다리기와 마을 공동샘이 있다. 마을에는 1900년에 조직된 상부계가 있고, 참여인원은 30명에 이른다. 마을의 기본현황은 총 인구수 285명에 남자 140명, 여자 145명이며. 총 면적은 1.25㎢이며, 이 중 전 0.26㎢, 답 0.50㎢, 임야 0.47㎢, 기타 0.02㎢가 해당되고, 총 52가구중 농가는 50호, 비농가는 2호다. 마을의 주요산업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수박, 무, 참깨 등을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양성이씨 13호, 김해김씨 9호, 전주이씨 7호, 기타 성씨가 23호에 해당된다.
장성마을
나주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8㎞, 남평에서 남쪽으로 약 8㎞, 그리고 면소재지인 신석마을에서 약 4㎞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장성마을은 본 마을인 장성과 새터라 불리우는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의 동쪽은 건지산과 마주하며, 서쪽으로는 용전리 용전마을과 남쪽으로는 장자못을 사이에 두고 두함마을과 인접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유곡리 낙동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의 면적은 182여만 ㎡인데 논이 약50만㎡, 밭이 약 24만㎡, 임야가 약 106만㎡이었던 것이 야산개발로 인하여 밭의 면적이 56만㎡으로 늘어났다. 이 마을이 120여 호가 넘는 큰 마을로 융성할 수 있는 요건은 논, 밭, 임야의 비율이 30:30:30 %로, 논과 밭의 토질이 비옥하고 화학비료가 없었던 옛날에 쌀, 보리 목화, 콩 등의 주, 의, 식생활에 풍부한 주곡을 생산했고, 인근에 건지산이 있어 땔감 구하기가 용이한 환경을 갖춘 마을로 주민들이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
또한 주민들의 개척정신이 강하여 일제시대부터 일본, 만주, 서울 등 각 지역에 진출하여 상업 및 사업에 종사하며, 인근 주변 마을의 농토까지 많이 확보하게 되자, 부유한 친척을 찾아 타지역에서 주민들이 이주해 와서 현재와 같이 큰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장성마을의 형성에 있어서 정확한 연혁은 알 수 없으나,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조선조 선조 25년 임진왜란 후 약 300여년전, 난을 피해 거의 같은 무렵에 평택임씨(平澤林氏), 현풍곽씨(玄風郭氏), 옥천조씨(玉川趙氏), 광산노씨(光山盧氏)가 정착하였다고 하며, 이는 현재 각 문중에 보관된 족보의 연호와 일치하며 대략 1600년 경이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평택임씨(平澤林氏)는 관해공파(觀海公派) 5세손인 언선(彦善)이 화순에서 거주하다가 죽자, 그의 부인 해주최씨가 가족을 이끌고 철야로 이주하였으나 그곳에서 살지 못하고 지금의 장성마을로 이주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현풍곽씨(玄風郭氏)의 시조로부터 23세손인 해미군파(海美君派)인 만필(萬弼)이 광주시 광산구 임곡 산막동에서 당시 난을 피하여 가족과 함께 정처없이 떠돌다 정착한 곳이 정성마을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옥천조씨(玉川趙氏) 판관공파(判官公派)의 9세손인 중추부사 운복이 영암군 시종면에서 살다가 이주해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는 교통의 요지였다. 마을 동쪽의 남북을 가로지른 도로는 지금의 영암, 강진, 해남, 장흥 등 남부지방에서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는 사람과 대상인 보부상들의 중요한 통행로로 오늘의 국도에 준한다. 지금은 아스팔트가 포장되어 광주에서 남평을 경유해 20분 정도 소요후 이 곳에 이를 수 있으며, 서쪽으로는 금천 삼거리로 통하는 신작로가 1920년에 개통하여 우마차가 통행하고 나주, 영산포, 광주 각 방면으로 물량 수송을 하는데 편리하여 산업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현재는 군내버스가 수시로 다닌다.
이 마을 주민들은 정착하면서부터 남달리 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이 대단하였다. 후손들의 교육을 위하여 이조때부터 마을 뒤편에 높은 터를 잡아 유일한 교육기관으로 서당을 짓자, 각지에서 학동들이 몰려들었다. 당시에는 부자집 행랑채에서 훈장을 모셔와 그 마을 학동 몇몇이 공부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오늘날의 학교와 버금가는 단독건물에 훈장을 모셔와 지역인재 양성에 기여했다.
1930년대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 서당이 폐쇄하기에 이르자, 마을 앞 동각에 간이학교를 세워 신학과 한학을 가르쳤는데 이 학교 교사 조선생의 강의는 소문이 나서 봉황면 일원에서는 물론 송현리에 살고 있는 일본인까지 이 간이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42년에는 이 간이학교마저 폐쇄하게 되었지만, 이 마을 선조들의 교육열은 봉황국민학교로 자녀들을 진학시켜 일제 식민지하에서 우리 조선 사람으로는 중학교에 입학하기가 힘들었는데도 이 마을 곽재옥이 광주농업학교에 합격하는 영광을 갖기도 하였다.
장성이라는 지명유래는 처음 이 마을에 정착한 평택임씨(平澤林氏), 현풍곽씨(玄風郭氏), 옥천조씨(玉川趙氏)가 합의하여 역사가 있는 한 유구히 번성하여 갈 터전이라 하여 장성(長盛)이라 칭했다는 설과 과거 이 마을 앞에 장승이 있어서 장성이라 칭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이 마을의 민속으로는 1960년대까지 연중행사와 같이 제일 농사를 잘 지은 농가의 만드리 (벼농사의 4번째 끝 논메기) 날에, 풍년에 감사하고 1년동안 농사일에 고생한 일꾼들과 마을 전체 농사꾼을 위로하는 잔치인 풍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현대식 영농에 밀려 옛 풍장은 하지 않고 있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951년에 조직된 상조계에 72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1963년 청장년들의 친목을 위해 조직된 장화계가 40여명의 마을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운영되고 있고, 정축생 동갑들의 친목도모를 위한 동갑계가 1976년 조직되었다. 마을에는 남자 330명, 여자 220명 등 총인구가 550명에 달하는 큰 마을로서, 총 면적은 0.59㎢로, 이 중 전 0.28㎢, 답 0.28㎢, 임야 0.02㎢, 기타 0.01㎢에 달한다. 큰 마을답게 총 96가구가 살고 있는데, 이 중 농가는 94호, 비농가는 2호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산업과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담배와 수박등의 특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주요 성씨는 김해김씨 19호, 평택임씨 21호, 옥천조씨 11호와 기타 성씨 45호가 거주하고 있다.
두함마을(斗含)
면소재지인 신석마을에서 북쪽으로 약 3㎞쯤 떨어진 금봉선 지방도변에 위치한 두함마을은 동쪽으로는 건지산과 마주보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용전리, 북쪽으로는 장성골 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년 전에 양성이씨(陽城李氏)인 이언국(李彦國)이 전라북도 태인에서 임진왜란 후 나주 흥룡동으로 와서 나주고을을 유람하던 중 지형과 형세가 수려한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후 전주이씨 양원군파(楊原君派) 11세손인 종필(鍾弼)은 나주 세지면에서 살다가 양성이씨(陽城李氏) 집안과 결혼하면서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 후 김해김씨(金海金氏), 경주이씨(慶州李氏) 등이 차례로 들어와 마을이 차츰 크게 형성되었다. 그러나 구전으로는 양성이씨(陽城李氏) 이전에 백씨들이 살았다고도 한다. 오래된 마을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증거로는 마을 주변의 논이나 밭을 깊이 파보면 기와장이나 주춧돌 등의 집터 흔적이 나타나는 것을 들 수 있다.
두함(斗含)이라는 이름은 1789년에 간행된 호구총서에 남평현(南平縣) 죽곡면(竹谷面) 두함동(斗含洞)으로 처음 나오고, 지방행정구역일람에도 두함리(斗含里)로 되어 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봉황면 장성리(長盛里)에 편입되었다. 두함(斗含)이라는 명칭은 마을의 지형이 동서로 분리되어 있는데 서촌은 말(斗) 형국이고 동촌은 含(머금은 꽃) 형국이라 하여 두함동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한편으로 두흥동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말(斗) 속에 담긴 재물이 밖으로 흐르지 않고 차곡차곡 불어나는 부흥 마을에서 연유된 듯 하다.
1940년대 말까지만 해도 주민 전체가 지극히 곤란한 빈촌이었는데 이는 사방이 막혀 있어야 한 말이 북쪽이 툭 터져 있기에 물질이 흘러버린다는 이치 때문에 빈곤을 면할 수 없었다. 다행히 1943년에 장성마을과 두함동의 중간쯤 되는 들녘에 큰 저수지를 막게 되어 사방이 막힌 완전한 말을 형성하므로 그때부터 마을에 부가 축적되고 부자가 속출하고 부촌으로 변모되었다고 한다. 과거 이 마을에는 선독골이라 불리우는 곳에 입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고, 지명만 전해져온다.
마을의 민속으로는 줄다리기와 마을 공동샘이 있다. 마을에는 1900년에 조직된 상부계가 있고, 참여인원은 30명에 이른다. 마을의 기본현황은 총 인구수 285명에 남자 140명, 여자 145명이며. 총 면적은 1.25㎢이며, 이 중 전 0.26㎢, 답 0.50㎢, 임야 0.47㎢, 기타 0.02㎢가 해당되고, 총 52가구중 농가는 50호, 비농가는 2호다. 마을의 주요산업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수박, 무, 참깨 등을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양성이씨 13호, 김해김씨 9호, 전주이씨 7호, 기타 성씨가 23호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