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곡리
- 날짜
-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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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남평군 욱곡면의 지역으로서 욱실 또는 욱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반암리, 본욱리, 비조리, 소밤리, 홍동, 예동을 병합하여 욱곡리라 하고 나주군 봉황면에 편입되었다. 1955년도에 욱곡1구에는 반암과 욱실마을, 욱곡2구에는 예동, 홍동, 월정망을로 구분되었는데, 1988년도에 흥동, 월정을 2구로, 예동, 비조마을을 3구로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각 마을의 주요성씨를 보면, 반암마을에는 청주한씨(淸州韓씨), 욱실마을은 경주김씨(慶州金氏), 흥동과 예동마을은 안동권씨(安東權氏)가 대중을 이루고 있다. 욱곡리에 속해 있는 마을들은 대부분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으며, 특작물로 과수재배도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어질고 온순하며, 서로를 위할 줄 아는 후덕한 사람들이다.
반암마을
반암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4㎞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마을 어귀에는 소반바위가 자리하고 있고, 마을 앞 멀리로 영암 월출산이 바라다 보이며, 20여 가구 남짓한 단아한 마을이다. 청주한씨(淸州韓氏), 이천서씨(利川徐氏), 김해김씨(金海金氏) 등 여러 성씨가 거주하고 있으나, 최초의 입향성씨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대략 청주한씨, 이천서씨가 차례로 입촌하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을 앞에 소반 모양의 바위가 있어 소반바위로 인해 마을 이름을 반암(般岩)이라고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조선조 말기 이 마을에 터를 잡을 때, 큰 바위가 많아 정지작업이 지연되고 있을 때. 마침 지나가던 장사가 바위를 치워 터를 닦으니 마을의 전모가 아름답고 견고해서 반암이라 칭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 마을은 소반이 밥상모양과 같다하여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다. 마을에는 마을 사람들간의 친목 도모를 위한 동계가 조직되어 있으며. 총인구는 92명이다. 이 중 남자가 44명, 여자가 48명이며, 총 면적은 0.61㎢이다. 이 중 전 0.13㎢, 답 0.14㎢, 임야 0.30㎢, 기타 0.04㎢가 해당되며 가구 20호 전부가 농사를 짓는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소득원은 쌀농사이고, 특작물로는 땅콩을 심고 있다. 마을에 거주하는 성씨로는 청주한씨 5호, 이천서씨 5호, 김해김씨 2호, 기타 8호가 있다.
욱실마을
욱실마을은 나주시청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11㎞, 면소재지에서 약 4㎞ 떨어진 곳에 있다. 욱실마을을 거쳐 영산강으로 합류하는 신동천이 마을 앞을 흐르고 이 하천을 건너 10분 정도 걸어가면 우산각을 맞은편으로 해서 뒤로는 판자등과 비슷한 형태의 뒷산을 배경으로 단아하게 정리된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1680년경 정읍현감과 옥과현감을 지낸 경주김씨(慶州金氏) 50세손인 상회(尙晦)의 7대 아들인 정하(鼎夏)가 현재 욱실마을로 처음 입향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1700년경 나주나씨(羅州羅氏) 습독공파(習讀公派) 18세손인 만남(晩楠)이 이 미을로 입향 정착하였고, 이후 김해김씨(金海金氏), 탐진최씨(耽津崔氏) 등도 차례로 들어와 차츰 마을이 크게 형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에는 친목도모를 위해 1896년에 조직된 동계와 1976년에 조직된 부녀회가 있으며, 참여인원은 45명, 25명에 이른다. 마을의 총인구는 남자 49명, 여저 56명으로 총 105명이며. 총 면적은 0.97㎢다. 이 중 전 0.32㎢, 답 0.30㎢, 임야 0.30㎢, 기타 0.04㎢가 해당되며, 총 가구중 40호는 농가이고 5호는 비농가이다. 마을의 주요 소득원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배과수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의 성씨로는 김해김씨 7호, 나주나씨 6호, 탐진최씨 2호, 기타 30호가 있다.
예동마을
예동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5㎞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마을 입지조건으로는 평야에 속하며, 토질은 사질양토에 속한다. 마을의 형태는 호랑이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고 하는데 옛날 마을 앞에 있는 언덕에서 황토가 자주 넘어오므로 마을 사람들이 그 곳을 개간하여 배나무를 심어 숲이 우거지게 만들어 호랑이가 이 숲을 이용해 뛰어 놀기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원래 이 마을은 남평군 욱곡면에 속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봉황면 욱곡리 2구에 편입되었으며, 그 후 1988년에 봉황면 욱곡 3구로 바뀌었다. 이 마을의 아주 옛날은 알 길이 없고, 집성촌은 이루지 못하고 텃골이다, 빈텃골이다, 상꼬머리다 하는 곳에 몇 채의 인가가 여기저기 살고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던 것이 조선조 초의 문신 권근(權近)의 맏아들 권천이 세종 5년(1943년)에 나주목사를 지내고 그의 5세손인 남평현감 권현과 그의 아들, 화순현감이었던 그의 아들 권준이 임진왜란을 맞아 나주땅인 공수면 성남마을(現, 공산면 화성리 성남마을)로 피난하여 여기서 누대가 세거하였는데 권함이 11대조인 남평현감영세불망비(南平縣監永世不忘碑)(현 남평초등학교 보존)가 있는 남평땅으로 이주코자 1813년에 現 예동마을에 정착하고 마을 이름을 구례동이라 지었다 한다.
그 후, 성남마을에 괴질이 번져 영암이나 장흥지방은 물론 각 지방에 흩어졌던 권씨들이 1820년부터 차츰 예동마을에 입주하게 되어, 구례동 상하촌에는 권씨가 1백여년간 집성촌을 이루어 한때는 60여호가 넘는 번성을 이루었다 한다. 상하촌 전체가 76호중 권씨가 49호를 차지했는데, 1970년대부터 차츰 도시로 이주해 줄어드는 추세다. 조선조 말 안동 권씨가 입촌하던 당시 이 마을 사람들은 품행이 단정하고 예의가 바른 바 지금으로부터는 약 150년전 타지역 사람들이 구례동(久禮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는 구례동 또는 예동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마을의 총 인구는 180명이며, 이 중 남자가 86명, 여자가 94명이다. 총 면적은 0.76㎢로, 전 0.21㎢, 답 0.30㎢, 임야 0.22㎢, 기타 0.03㎢이다. 마을의 주요 산업은 쌀농사이며, 주소득원은 쌀농사와 배 과수농사이다. 성씨로는 안동권씨 25호, 하음봉씨 2호, 기타 13호가 있다.
흥동마을
흥동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약 5㎞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욱곡 3구인 예동마을과는 논 하나를 경계로 인접해 있다. 원래 이 마을은 남평면 욱곡리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나주군 봉황면 욱곡리 3구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13년께 성남마을에서 안동권씨 권함이 예동으로 옮겨왔고, 예동에서 동쪽 아래편 약 300m 지점에 형국이 조각달같이 생겼다하여 월정 (月丁)라 하는 곳에서 1820년께 의병장 권녕회의 선대가 터를 잡고 살게 되었는데, 권녕회 의병장은 이곳에서 1885년에 출생하였다. 그런데 윗마을인 예동과 월정마을 사이에 동네가 형성되어 주로 권씨가 입주하였는데 새로 흥했다하여 흥동이라 하였다 한다. 예동서 월정까지는 권씨촌이 형성된 셈인데 이를 동네사람들은 상하촌이라 부르고, 외부에서는 도광(道光) 8년(1828)에 남평현에 속해있던 그대로 욱곡면 구례동이라고 부른다.
특히 권녕회 의병장의 출생지인 욱곡면 595번지는 왜병들의 끊임없는 기습수색으로 권씨들의 수난은 물론 권 의병장의 처 나주임(羅州林)씨는 견딜 수 없어 생후 2개월 된 여아를 데리고 행방을 감추었는데, 1908년 윗마을 예동에 입주해 있던 권함의 손자 익수가 그 집터를 인수하여 현재 6대가 세거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마을 이름이 월정이라고 불리워오다가 마을이 확장되면서 흥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에는 1960년 조직된 위친계가 운영되고 있다. 마을의 총 인구는 235명으로 이 중 남자가 110명, 여자가 125명이며, 총 45가구 모두 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의 총 면적은 0.86㎢이며, 이 중 전 0.24㎢, 답 0.34㎢, 임야 0.25㎢, 기타 0.03㎢이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산업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배 과수농사를 겸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마을의 주요 성씨로는, 안동권씨 20호, 전주최씨 2호, 풍천임씨 2호, 기타 21호가 있다.
비조마을
비조마을의 위치는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4㎞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의 입지조건은 산촌에 속하고 토질은 점토질에 속하며, 마을의 형태는 참새가 멍석에서 벼알을 주워먹고 대밭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이루고 있다고 전한다. 현재 공동우물이 하나 있는데, 예전에는 당산나무가 벼락을 맞아 나무가 갈라져 그 자리에 우물을 파면 좋다고 하여, 그곳에 우물을 파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현재 마을 입구에 세워진 입석은 마을의 형국으로 보아 그곳에 돌을 세워야 한다고 해서 지금으로부터 30~40년전에 세워지게 되었다.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고, 먼저 신씨가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현재 이 마을에 거주하는 신씨가 없어 자세히 알 수가 없고, 다음 황씨가 들어오고 김해김씨(김해김씨)가 나중에 들어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비조라는 마을지명 유래는 참새가 새산골에서 먹이를 먹고 산(조산등)으로 날아가는 모습에서 마을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마을에는 1960년에 조직된 위친계가 있으며 참여인원은 37명이다. 마을의 총인구는 102명으로, 남자 47명, 여자 55명이 살고 있으며, 총면적은 0.48㎢, 전 0.13㎢, 답 0.19㎢, 임야 0.14㎢, 기타 0.02㎢가 있다. 마을의 주요산업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는 배과수농사를 짓고 있다. 성씨로는 낭주최씨 4호, 밀양박씨 4호, 기타 17호가 있다.
반암마을
반암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4㎞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마을 어귀에는 소반바위가 자리하고 있고, 마을 앞 멀리로 영암 월출산이 바라다 보이며, 20여 가구 남짓한 단아한 마을이다. 청주한씨(淸州韓氏), 이천서씨(利川徐氏), 김해김씨(金海金氏) 등 여러 성씨가 거주하고 있으나, 최초의 입향성씨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대략 청주한씨, 이천서씨가 차례로 입촌하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을 앞에 소반 모양의 바위가 있어 소반바위로 인해 마을 이름을 반암(般岩)이라고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조선조 말기 이 마을에 터를 잡을 때, 큰 바위가 많아 정지작업이 지연되고 있을 때. 마침 지나가던 장사가 바위를 치워 터를 닦으니 마을의 전모가 아름답고 견고해서 반암이라 칭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 마을은 소반이 밥상모양과 같다하여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다. 마을에는 마을 사람들간의 친목 도모를 위한 동계가 조직되어 있으며. 총인구는 92명이다. 이 중 남자가 44명, 여자가 48명이며, 총 면적은 0.61㎢이다. 이 중 전 0.13㎢, 답 0.14㎢, 임야 0.30㎢, 기타 0.04㎢가 해당되며 가구 20호 전부가 농사를 짓는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소득원은 쌀농사이고, 특작물로는 땅콩을 심고 있다. 마을에 거주하는 성씨로는 청주한씨 5호, 이천서씨 5호, 김해김씨 2호, 기타 8호가 있다.
욱실마을
욱실마을은 나주시청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11㎞, 면소재지에서 약 4㎞ 떨어진 곳에 있다. 욱실마을을 거쳐 영산강으로 합류하는 신동천이 마을 앞을 흐르고 이 하천을 건너 10분 정도 걸어가면 우산각을 맞은편으로 해서 뒤로는 판자등과 비슷한 형태의 뒷산을 배경으로 단아하게 정리된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1680년경 정읍현감과 옥과현감을 지낸 경주김씨(慶州金氏) 50세손인 상회(尙晦)의 7대 아들인 정하(鼎夏)가 현재 욱실마을로 처음 입향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1700년경 나주나씨(羅州羅氏) 습독공파(習讀公派) 18세손인 만남(晩楠)이 이 미을로 입향 정착하였고, 이후 김해김씨(金海金氏), 탐진최씨(耽津崔氏) 등도 차례로 들어와 차츰 마을이 크게 형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에는 친목도모를 위해 1896년에 조직된 동계와 1976년에 조직된 부녀회가 있으며, 참여인원은 45명, 25명에 이른다. 마을의 총인구는 남자 49명, 여저 56명으로 총 105명이며. 총 면적은 0.97㎢다. 이 중 전 0.32㎢, 답 0.30㎢, 임야 0.30㎢, 기타 0.04㎢가 해당되며, 총 가구중 40호는 농가이고 5호는 비농가이다. 마을의 주요 소득원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배과수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의 성씨로는 김해김씨 7호, 나주나씨 6호, 탐진최씨 2호, 기타 30호가 있다.
예동마을
예동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5㎞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마을 입지조건으로는 평야에 속하며, 토질은 사질양토에 속한다. 마을의 형태는 호랑이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고 하는데 옛날 마을 앞에 있는 언덕에서 황토가 자주 넘어오므로 마을 사람들이 그 곳을 개간하여 배나무를 심어 숲이 우거지게 만들어 호랑이가 이 숲을 이용해 뛰어 놀기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원래 이 마을은 남평군 욱곡면에 속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봉황면 욱곡리 2구에 편입되었으며, 그 후 1988년에 봉황면 욱곡 3구로 바뀌었다. 이 마을의 아주 옛날은 알 길이 없고, 집성촌은 이루지 못하고 텃골이다, 빈텃골이다, 상꼬머리다 하는 곳에 몇 채의 인가가 여기저기 살고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던 것이 조선조 초의 문신 권근(權近)의 맏아들 권천이 세종 5년(1943년)에 나주목사를 지내고 그의 5세손인 남평현감 권현과 그의 아들, 화순현감이었던 그의 아들 권준이 임진왜란을 맞아 나주땅인 공수면 성남마을(現, 공산면 화성리 성남마을)로 피난하여 여기서 누대가 세거하였는데 권함이 11대조인 남평현감영세불망비(南平縣監永世不忘碑)(현 남평초등학교 보존)가 있는 남평땅으로 이주코자 1813년에 現 예동마을에 정착하고 마을 이름을 구례동이라 지었다 한다.
그 후, 성남마을에 괴질이 번져 영암이나 장흥지방은 물론 각 지방에 흩어졌던 권씨들이 1820년부터 차츰 예동마을에 입주하게 되어, 구례동 상하촌에는 권씨가 1백여년간 집성촌을 이루어 한때는 60여호가 넘는 번성을 이루었다 한다. 상하촌 전체가 76호중 권씨가 49호를 차지했는데, 1970년대부터 차츰 도시로 이주해 줄어드는 추세다. 조선조 말 안동 권씨가 입촌하던 당시 이 마을 사람들은 품행이 단정하고 예의가 바른 바 지금으로부터는 약 150년전 타지역 사람들이 구례동(久禮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는 구례동 또는 예동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마을의 총 인구는 180명이며, 이 중 남자가 86명, 여자가 94명이다. 총 면적은 0.76㎢로, 전 0.21㎢, 답 0.30㎢, 임야 0.22㎢, 기타 0.03㎢이다. 마을의 주요 산업은 쌀농사이며, 주소득원은 쌀농사와 배 과수농사이다. 성씨로는 안동권씨 25호, 하음봉씨 2호, 기타 13호가 있다.
흥동마을
흥동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약 5㎞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욱곡 3구인 예동마을과는 논 하나를 경계로 인접해 있다. 원래 이 마을은 남평면 욱곡리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나주군 봉황면 욱곡리 3구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13년께 성남마을에서 안동권씨 권함이 예동으로 옮겨왔고, 예동에서 동쪽 아래편 약 300m 지점에 형국이 조각달같이 생겼다하여 월정 (月丁)라 하는 곳에서 1820년께 의병장 권녕회의 선대가 터를 잡고 살게 되었는데, 권녕회 의병장은 이곳에서 1885년에 출생하였다. 그런데 윗마을인 예동과 월정마을 사이에 동네가 형성되어 주로 권씨가 입주하였는데 새로 흥했다하여 흥동이라 하였다 한다. 예동서 월정까지는 권씨촌이 형성된 셈인데 이를 동네사람들은 상하촌이라 부르고, 외부에서는 도광(道光) 8년(1828)에 남평현에 속해있던 그대로 욱곡면 구례동이라고 부른다.
특히 권녕회 의병장의 출생지인 욱곡면 595번지는 왜병들의 끊임없는 기습수색으로 권씨들의 수난은 물론 권 의병장의 처 나주임(羅州林)씨는 견딜 수 없어 생후 2개월 된 여아를 데리고 행방을 감추었는데, 1908년 윗마을 예동에 입주해 있던 권함의 손자 익수가 그 집터를 인수하여 현재 6대가 세거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마을 이름이 월정이라고 불리워오다가 마을이 확장되면서 흥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에는 1960년 조직된 위친계가 운영되고 있다. 마을의 총 인구는 235명으로 이 중 남자가 110명, 여자가 125명이며, 총 45가구 모두 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의 총 면적은 0.86㎢이며, 이 중 전 0.24㎢, 답 0.34㎢, 임야 0.25㎢, 기타 0.03㎢이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산업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배 과수농사를 겸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마을의 주요 성씨로는, 안동권씨 20호, 전주최씨 2호, 풍천임씨 2호, 기타 21호가 있다.
비조마을
비조마을의 위치는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4㎞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의 입지조건은 산촌에 속하고 토질은 점토질에 속하며, 마을의 형태는 참새가 멍석에서 벼알을 주워먹고 대밭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이루고 있다고 전한다. 현재 공동우물이 하나 있는데, 예전에는 당산나무가 벼락을 맞아 나무가 갈라져 그 자리에 우물을 파면 좋다고 하여, 그곳에 우물을 파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현재 마을 입구에 세워진 입석은 마을의 형국으로 보아 그곳에 돌을 세워야 한다고 해서 지금으로부터 30~40년전에 세워지게 되었다.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고, 먼저 신씨가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현재 이 마을에 거주하는 신씨가 없어 자세히 알 수가 없고, 다음 황씨가 들어오고 김해김씨(김해김씨)가 나중에 들어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비조라는 마을지명 유래는 참새가 새산골에서 먹이를 먹고 산(조산등)으로 날아가는 모습에서 마을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마을에는 1960년에 조직된 위친계가 있으며 참여인원은 37명이다. 마을의 총인구는 102명으로, 남자 47명, 여자 55명이 살고 있으며, 총면적은 0.48㎢, 전 0.13㎢, 답 0.19㎢, 임야 0.14㎢, 기타 0.02㎢가 있다. 마을의 주요산업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는 배과수농사를 짓고 있다. 성씨로는 낭주최씨 4호, 밀양박씨 4호, 기타 17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