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봉리
- 날짜
-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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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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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12㎞ 떨어진 곳에 위치한 덕곡리는 본래 남평군 욱곡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덕룡동 쌍동과, 나주군 지죽면의 덕용리, 평월리 일부를 병합하여 덕룡과 쌍동의 이름을 따서 덕곡이라 하고, 나주군 봉황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 중에는 만봉천의 상류가 관류하고 있으며, 서쪽과 남쪽은 영암군 금정면과 접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농암산, 봉천산, 계천산 등이 있으며, 동쪽은 덕룡산(해발 400.6m)을 사이에 다도면과 접해 있다. 북쪽에는 만봉리와 접해 있는데, 덕룡마을은 마을 앞 산이 용과 같은 형상을 한 덕룡산 아래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쌍동마을은 조선시대에 마을 뒷산 중턱에 있던 절의 주지가 마을 앞에 있는 산봉우리가 삿갓이 나란히 글읽는 형상이라해서 쌍봉이라 불렀다가 일제말기에 쌍동마을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덕룡과 쌍동은 산촌에 속해있는 규모가 작은 마을들이다. 현재 덕룡마을에는 김해김씨가 8호, 쌍동마을에는 창녕조씨가 6호, 밀양박씨, 김해김씨가 각각 4호, 그리고 서씨, 이씨, 여씨, 정씨등이 살고 있다.
용반마을
용반마을 마을 뒷산이 용의 형국이며, 사두혈(뱀머리혈)이라 하여 마을 이름이 이에 연유했으며, 丁茶山(정약용)이 강진 만덕산으로 유배가던 중 이곳에서 쉬었다하여 만봉이라 부르게 했다는데 만봉리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황치마을과는 숲정이를 사이에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 앞 당산나무 다섯그루는 천년이나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탠보이씨(이씨)가 개촌했으며, 다음에 하동정씨가 벌족하여 살며 오곽에 집성했다 한다. 중간에 경주김씨가 김명우가 화순서 살다가 아버지가 당쟁에 휘말려 유배를 당하자 단신 이 마을로 들어와 살았다하며, 그뒤 함풍이씨, 진주강씨등이 입주해 왔다한다. 현재는 김해김씨, 진주강씨, 경주김씨, 기타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용반마을의 당산제는 제는 지내지 않고 굿만 한다는 것이 다른 마을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제 일시는 원래 정월 대보름이었는데 요즘은 음력 1월 1일에 지낸다. 마을 사람 모두가 몸을 깨끗이 하고 좋은 옷을 입고 한데 모여서 청주와 돼지머리를 비롯한 기타 음식물을 장만하고 굿과 줄다리기 등으로 친목을 도모한다. 비용은 마을 공동기금으로 충당하고 굿을 하고 난 후 음식은 동네 주민들이 모여서 음복하고 서로 즐겁게 노는 행위로 끝맺는다고 한다. 당산나무는 할아버지 할머니 당산 모두 귀목나무로 수령은 500년 정도 되었다. 제사음식으로는 술등 일반제사와 같고 제관은 마을에서 돌아가면서 유사를 지냈다고 한다. 비용은 마을 동계에서 마련한다고 한다. 제가 끝난 후 농악을 한다. 제를 지내는 목적은 제를 지내지 않으면 마을의 풍년과 평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지냈다고 한다.
한편 이 마을에는 당산나무 옆 나무밑에 들돌이 있는데 이것은 예전에 아낙네들이 밭에서 일하다가 좋은 돌을 치마폭에 싸서 그곳에 옮겼다고 한다. 예전에는 장정들이 힘자랑을 하기 위해 들돌을 했었지만, 지금은 이농현상으로 젊은 사람이 없기에 하지 않는다고 한다. 원래 6개의 들돌이 있었는데 3개가 도난 당하고 3개가 남았으나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다. 용반마을에는 할아버지 당신이라고도 부르는 나무숲이 있는데 이것은 마을 뒷산과 앞산을 잇기 위해 만든 인공적인 숲으로 수구맥이용으로 심은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땅주인에게 별로 좋지 않아 그 일부가 소실되었다.
마을에는 1900년대 초에 친목을 위해 조직된 동계가 있으며. 마을 사람 30여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다. 마을의 인구는 남자 40명, 여자 50명으로 총 90명에 이르며, 농가 30호, 비농가 3호로 총 33가구가 있다. 총 면적은 0.19㎢로, 전 0.04㎢, 답 0.06㎢, 임야 0.09㎢가 해당된다. 마을의 주요 산업은 미맥 재배이며, 주소득원 역시 미맥이다. 특작물로는 콩을 재배하고 있다. 경주김씨 11호, 함풍이씨 5호, 김해김씨 5호, 기타 6호가 있다.
황치마을
원래 황치마을은 용반이라 했는데, 어떤 도사가 지나가다가 마을 이름을 황치라 부르라고 해서 고쳤다고 한다. 마을에는 동계가 있으며, 여기서는 마을의 여러 가지 문제를 논의하고, 품삯을 결정했으며 농악이 성했으나, 한국전쟁 이후 점차 소멸되었다. 마을 앞산에 지방문화재 64호로 지정된 석불입상이 있는데, 미륵불이며, 할아버지 불상이라 하고, 운곡칠불상을 할머니불상이라 한다.
만봉리 석조여래입상( 萬峰里 石造如來立像) 만봉리 석조여래입상은 지방문화재 제64호다. 이 석불은 만봉리 저수지에서 서쪽으로 약 500m쯤 떨어진 산록에 동쪽을 향해 위치하고 있다. 이 불상은 밑부분이 땅에 묻혀 좌대석을 파악할 수 없지만 1매의 화강암을 이용, 배 모양의 거신광배와 여원인, 시무외인을 결한 여래입상이다. 또한 불상의 얼굴은 갸름하고 고졸한 미소를 띄고 있으며 광배는 불꽃무늬가 없고 육계가 크며 머리는 소발이다. 귀는 길게 처져 어깨 위에 닿고 있으며 목에는 형식상의 삼도가 모각되었다. 또 어깨와 가슴에는 볼륨을 주어 사실적인 표현이 뚜렷하다. 호형을 그리면서 곱게 흐른 눈썹에 눈은 반쯤 감은 오도의 경지에 이른듯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어느 조용한 소녀상을 대한 듯한 원만상으로 전남지방에서는 보기드문 우수한 작품이다. 마을의 총인구는 90명으로 이중 남자는 40명, 여자는 50명이다. 총 면적은 0.62㎢로, 전 0.12㎢, 답 0.20㎢, 임야 0.30㎢가 해당된다. 총 가구 20호 모두 농사를 짓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쌀을 비롯하여 보리와 콩도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경주김씨(慶州金氏) 10호, 함풍이씨(咸風李氏) 5호, 김해김씨(金海金氏) 5호가 거주하고 있다.
만련마을
원래는 덕룡산에서 흘러내린 활성산을 이루고 마을의 뒤를 깃대봉이 감싸고 있다. 이 산의 형국이 연꽃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만련동(蓮花到水)이라 했다. 반남박씨가 이 마을에서 자자 일촌을 이루고, 이 지방에서는 오랜 역사를 지닌다. 만련마을은 나주임씨(羅州林氏) 임건(林健)이 회진서 살다가 아버지 임사가 숙종때 사화로 유배되자 이 마을로 들어와 그 아들 임건이 해미곽씨의 딸을 맞아 동에 이거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다는데 그뒤로 120년전 오위장을 지낸 진주정씨가 들어왔고, 뒤를 이어 청주한씨 등이 입향했으며, 그 무렵 마을 앞에 거석인 선덕바위를 세웠다고 전해온다. 만련마을에서는 정월 대보름 저녁에 당산제를 모시고 있는데 당산나무의 종은 팽나무로 그 둘레는 127m이다. 제사음식은 일반 제사와 같고 제관은 깨끗하고 궂은데 가지 않은 사람으로 원래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는다. 제관은 제사를 지낸 후 축을 읽고 인사를 한 후 소지를 올린다. 제 비용은 동계돈으로 하고, 제사와 함께 동시에 농악을 한다. 제사를 지내는 목적은 마을의 안녕과 건강, 그리고 무사고를 위해서이다. 이 마을에는 청주 정씨 효자문이 있다.
마을에는 1856년에 조직된 상부계에 20명, 1830년 친목 도모를 위해 조직된 동계에 20명, 1976년 조직된 부녀회에 20명의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마을의 총 인구는 101명으로 이 중 남자는 47명, 여자는 54명이 해당된다, 총 면적은 0.59㎢, 전 0.02㎢, 답 0.17㎢, 임야 0.20㎢, 기타 0.02㎢가 해당된다. 주요 산업으로는 쌀, 콩농사이며,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다. 마을 사람들의 성씨는 나주임씨 (羅州林氏)6호, 진주정씨(晉州鄭氏) 4호, 청주한씨(淸州韓氏) 3호, 기타 7호가 있다.
우봉마을
우봉마을은 남으로 월출산, 북으로 멀리 나주 금성산이 둘러싸여 지세는 산자수명하고 기암괴석이 배열되어 산봉우리가 천봉만확이기에 리각을 만봉리라 하였다. 김해김씨 김예수(金禮洙)가 남원에서 살다가 아버지 김우경이 당쟁에 휘말려 유배됨으로써 3형제가 흩어져 이곳으로 옮겨와 임진왜란 이후부터 정주하였는데 3백년이 지난후 진주강씨 강기원이 강진에서 이사와 정착했다. 마을 오른쪽 등에는 용마가 밟고 넘었다는 문턱바위가 인석되어 있다. 마을 뒷산을 속칭 소골, 진뒤개골이라 해서 소형국이므로 ‘독'자를 써서 독자동이라 했다. 그런데 1925년께 부락의 학자인 조광삼, 임하규, 홍덕범, 김선행 등이 강기원의 호 우봉을 따서 그때부터 마을이름을 우봉이라 고쳤다고 한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866년 조직된 상부계와 1836년 조직된 동계, 1976년 조직된 부녀회가 있으며 목적은 마을 사람들간의 친목 도모이다. 총 인구는 64명으로 남자 36명, 여자 28명이며, 총 면적은 0.33㎢로 이중 전 0.02㎢, 답 0.10㎢, 임야 0.20㎢, 기타 0.01㎢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간의 주요 산업으로는 쌀, 보리, 콩이며, 특작물로는 고추를 심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성씨는 김해김씨 5호, 진주강씨 3호, 남평문씨 2호, 기타 2호가 있다.
용반마을
용반마을 마을 뒷산이 용의 형국이며, 사두혈(뱀머리혈)이라 하여 마을 이름이 이에 연유했으며, 丁茶山(정약용)이 강진 만덕산으로 유배가던 중 이곳에서 쉬었다하여 만봉이라 부르게 했다는데 만봉리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황치마을과는 숲정이를 사이에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 앞 당산나무 다섯그루는 천년이나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탠보이씨(이씨)가 개촌했으며, 다음에 하동정씨가 벌족하여 살며 오곽에 집성했다 한다. 중간에 경주김씨가 김명우가 화순서 살다가 아버지가 당쟁에 휘말려 유배를 당하자 단신 이 마을로 들어와 살았다하며, 그뒤 함풍이씨, 진주강씨등이 입주해 왔다한다. 현재는 김해김씨, 진주강씨, 경주김씨, 기타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용반마을의 당산제는 제는 지내지 않고 굿만 한다는 것이 다른 마을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제 일시는 원래 정월 대보름이었는데 요즘은 음력 1월 1일에 지낸다. 마을 사람 모두가 몸을 깨끗이 하고 좋은 옷을 입고 한데 모여서 청주와 돼지머리를 비롯한 기타 음식물을 장만하고 굿과 줄다리기 등으로 친목을 도모한다. 비용은 마을 공동기금으로 충당하고 굿을 하고 난 후 음식은 동네 주민들이 모여서 음복하고 서로 즐겁게 노는 행위로 끝맺는다고 한다. 당산나무는 할아버지 할머니 당산 모두 귀목나무로 수령은 500년 정도 되었다. 제사음식으로는 술등 일반제사와 같고 제관은 마을에서 돌아가면서 유사를 지냈다고 한다. 비용은 마을 동계에서 마련한다고 한다. 제가 끝난 후 농악을 한다. 제를 지내는 목적은 제를 지내지 않으면 마을의 풍년과 평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지냈다고 한다.
한편 이 마을에는 당산나무 옆 나무밑에 들돌이 있는데 이것은 예전에 아낙네들이 밭에서 일하다가 좋은 돌을 치마폭에 싸서 그곳에 옮겼다고 한다. 예전에는 장정들이 힘자랑을 하기 위해 들돌을 했었지만, 지금은 이농현상으로 젊은 사람이 없기에 하지 않는다고 한다. 원래 6개의 들돌이 있었는데 3개가 도난 당하고 3개가 남았으나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다. 용반마을에는 할아버지 당신이라고도 부르는 나무숲이 있는데 이것은 마을 뒷산과 앞산을 잇기 위해 만든 인공적인 숲으로 수구맥이용으로 심은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땅주인에게 별로 좋지 않아 그 일부가 소실되었다.
마을에는 1900년대 초에 친목을 위해 조직된 동계가 있으며. 마을 사람 30여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다. 마을의 인구는 남자 40명, 여자 50명으로 총 90명에 이르며, 농가 30호, 비농가 3호로 총 33가구가 있다. 총 면적은 0.19㎢로, 전 0.04㎢, 답 0.06㎢, 임야 0.09㎢가 해당된다. 마을의 주요 산업은 미맥 재배이며, 주소득원 역시 미맥이다. 특작물로는 콩을 재배하고 있다. 경주김씨 11호, 함풍이씨 5호, 김해김씨 5호, 기타 6호가 있다.
황치마을
원래 황치마을은 용반이라 했는데, 어떤 도사가 지나가다가 마을 이름을 황치라 부르라고 해서 고쳤다고 한다. 마을에는 동계가 있으며, 여기서는 마을의 여러 가지 문제를 논의하고, 품삯을 결정했으며 농악이 성했으나, 한국전쟁 이후 점차 소멸되었다. 마을 앞산에 지방문화재 64호로 지정된 석불입상이 있는데, 미륵불이며, 할아버지 불상이라 하고, 운곡칠불상을 할머니불상이라 한다.
만봉리 석조여래입상( 萬峰里 石造如來立像) 만봉리 석조여래입상은 지방문화재 제64호다. 이 석불은 만봉리 저수지에서 서쪽으로 약 500m쯤 떨어진 산록에 동쪽을 향해 위치하고 있다. 이 불상은 밑부분이 땅에 묻혀 좌대석을 파악할 수 없지만 1매의 화강암을 이용, 배 모양의 거신광배와 여원인, 시무외인을 결한 여래입상이다. 또한 불상의 얼굴은 갸름하고 고졸한 미소를 띄고 있으며 광배는 불꽃무늬가 없고 육계가 크며 머리는 소발이다. 귀는 길게 처져 어깨 위에 닿고 있으며 목에는 형식상의 삼도가 모각되었다. 또 어깨와 가슴에는 볼륨을 주어 사실적인 표현이 뚜렷하다. 호형을 그리면서 곱게 흐른 눈썹에 눈은 반쯤 감은 오도의 경지에 이른듯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어느 조용한 소녀상을 대한 듯한 원만상으로 전남지방에서는 보기드문 우수한 작품이다. 마을의 총인구는 90명으로 이중 남자는 40명, 여자는 50명이다. 총 면적은 0.62㎢로, 전 0.12㎢, 답 0.20㎢, 임야 0.30㎢가 해당된다. 총 가구 20호 모두 농사를 짓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쌀을 비롯하여 보리와 콩도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경주김씨(慶州金氏) 10호, 함풍이씨(咸風李氏) 5호, 김해김씨(金海金氏) 5호가 거주하고 있다.
만련마을
원래는 덕룡산에서 흘러내린 활성산을 이루고 마을의 뒤를 깃대봉이 감싸고 있다. 이 산의 형국이 연꽃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만련동(蓮花到水)이라 했다. 반남박씨가 이 마을에서 자자 일촌을 이루고, 이 지방에서는 오랜 역사를 지닌다. 만련마을은 나주임씨(羅州林氏) 임건(林健)이 회진서 살다가 아버지 임사가 숙종때 사화로 유배되자 이 마을로 들어와 그 아들 임건이 해미곽씨의 딸을 맞아 동에 이거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다는데 그뒤로 120년전 오위장을 지낸 진주정씨가 들어왔고, 뒤를 이어 청주한씨 등이 입향했으며, 그 무렵 마을 앞에 거석인 선덕바위를 세웠다고 전해온다. 만련마을에서는 정월 대보름 저녁에 당산제를 모시고 있는데 당산나무의 종은 팽나무로 그 둘레는 127m이다. 제사음식은 일반 제사와 같고 제관은 깨끗하고 궂은데 가지 않은 사람으로 원래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는다. 제관은 제사를 지낸 후 축을 읽고 인사를 한 후 소지를 올린다. 제 비용은 동계돈으로 하고, 제사와 함께 동시에 농악을 한다. 제사를 지내는 목적은 마을의 안녕과 건강, 그리고 무사고를 위해서이다. 이 마을에는 청주 정씨 효자문이 있다.
마을에는 1856년에 조직된 상부계에 20명, 1830년 친목 도모를 위해 조직된 동계에 20명, 1976년 조직된 부녀회에 20명의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마을의 총 인구는 101명으로 이 중 남자는 47명, 여자는 54명이 해당된다, 총 면적은 0.59㎢, 전 0.02㎢, 답 0.17㎢, 임야 0.20㎢, 기타 0.02㎢가 해당된다. 주요 산업으로는 쌀, 콩농사이며,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다. 마을 사람들의 성씨는 나주임씨 (羅州林氏)6호, 진주정씨(晉州鄭氏) 4호, 청주한씨(淸州韓氏) 3호, 기타 7호가 있다.
우봉마을
우봉마을은 남으로 월출산, 북으로 멀리 나주 금성산이 둘러싸여 지세는 산자수명하고 기암괴석이 배열되어 산봉우리가 천봉만확이기에 리각을 만봉리라 하였다. 김해김씨 김예수(金禮洙)가 남원에서 살다가 아버지 김우경이 당쟁에 휘말려 유배됨으로써 3형제가 흩어져 이곳으로 옮겨와 임진왜란 이후부터 정주하였는데 3백년이 지난후 진주강씨 강기원이 강진에서 이사와 정착했다. 마을 오른쪽 등에는 용마가 밟고 넘었다는 문턱바위가 인석되어 있다. 마을 뒷산을 속칭 소골, 진뒤개골이라 해서 소형국이므로 ‘독'자를 써서 독자동이라 했다. 그런데 1925년께 부락의 학자인 조광삼, 임하규, 홍덕범, 김선행 등이 강기원의 호 우봉을 따서 그때부터 마을이름을 우봉이라 고쳤다고 한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866년 조직된 상부계와 1836년 조직된 동계, 1976년 조직된 부녀회가 있으며 목적은 마을 사람들간의 친목 도모이다. 총 인구는 64명으로 남자 36명, 여자 28명이며, 총 면적은 0.33㎢로 이중 전 0.02㎢, 답 0.10㎢, 임야 0.20㎢, 기타 0.01㎢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간의 주요 산업으로는 쌀, 보리, 콩이며, 특작물로는 고추를 심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성씨는 김해김씨 5호, 진주강씨 3호, 남평문씨 2호, 기타 2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