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림리
- 날짜
-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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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림리는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곳으로 봉황-세지간 도로변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오림리와 남쪽으로 영암 금정과 경계한다. 이곳은 본래 남평군 욱경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학림리·신창리· 신덕리·야학리·서당리 일부와 나주군 지죽면의 신덕리·복동의 각 일부를 병합, 신덕과 학림의 이름을 따서 덕림리라 칭하고, 나주군 봉황면에 속하게 되었다. 편의상 덕림리는 만봉가는 길에 위치한 정동마을·원덕마을·신덕마을은 1구로 부르고 있으며, 세지가는 도로변 주위의 영봉정마을·신창마을·학림마을을 2구라 칭한다.
영봉정은 옛날 오림역으로서 중요한 육로의 길목이었다. 신창마을에는 일찍이 세워진 덕림교회가 자리하여 일제시대 영신간이학교를 병설하여 봉황면 남부 및 세지면 일부의 청소년의 신학문 교육을 실시 지역개발에 선봉이 되었다. 영신간이 학교는 해방 직전인 1945년 5월 봉황면국민학교로 병합되었다. 또한 문맹퇴치 운동의 일환으로 덕림리, 오림리 인근 유지들을 중심으로 덕림제를 설림하여 주로 아이들에게 구학을 강학하였다. 덕림리는 신창마을에서의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빠른 문명개화를 보게 되었다. 덕림리는 별다른 특작물 재배없이 학림마을에서만 그 마을 주민 대부분의 수박재배를 하고 있고, 덕림 앞들은 비옥한 토질로써 2모작을 하고, 벼농사가 그 주업이다.
신덕마을
신덕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는 약 5㎞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마을 동쪽으로 멀리 용제산과 덕룡산을 배경으로 야학마을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정동마을, 북쪽으로는 낮은 평야지대이며 마을 앞으로 만봉천이 흐른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전인 1800년대 초에 김해김씨 김재엽, 의령남씨 남승집, 경주최씨 최영술이 각각 반곡, 장흥, 이장가에서 살다가 만봉천이 이 마을을 통과하여 영산강으로 합류하니 이 마을에 거주하면 자자손손 번창할 것이라 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한다. 신덕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살펴보면, 덕룡산의 줄기가 이곳까지 미친다 하여, 덕룡산의 ‘德'자와 새로운 터에 설촌하였다 하여 ‘新'자를 넣어 신덕이라 짓게 되었다.
신덕마을은 1912년까지 욱곡면 내 40마을 중 하나였으나, 1914년 행정개편과 더불어 지금의 덕림리로 속하게 되었다. 예로부터 이 마을은 이웃 세지면 한강의 들이 옛날 한강으로서 강수가 마을 앞까지 넘쳐서 현재 세지면 도두라는 섬이 생기고 본 마을에 선주가 있다하여 이 마을 형국이 선주형이라고도 하고, 옛날 마을 앞뒤에 보가 있어서 배가 지나는 행주형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샘을 파는 것을 금기로 전해져 온다. 만일 샘을 파게 되면 배에 구멍이 뚫려 물이 잠기므로 마을이 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마을에서의 식수공급은 마을 동쪽 끝에 위치한 고래라는 곳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한다. 한번은 마을의 한 사람이 샘을 팠다가 재앙을 두려워한 마을 사람들의 완강한 반대로 즉시 메워버렸다고까지 한다. 옛날 이 마을에는 한해가 드는 여름이면 운곡리에 소재한 용제산에서 기우제를 지냄으로써 비를 기원하기도 하였으나, 주민들이 앞산 꼭대기에 올라가 아무 제물없이 불만 피우면서 빌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만봉수리조합이 생긴 후로 물사정이 원활하게 됨에 따라 이 제를 지낼 필요는 없게 되었다.
한편 이 마을주위가 논이지만 왜정때만 해도 밭이어서 목화재배가 성했다고 한다. 목화가 필 때면 마을은 온통 하얀 구름 속에 둘러싸인 듯해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이었다고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은 어린시절을 회상하곤한다. 이 마을의 동계는 다른 마을과 구별되는데, 사람들이 콩볶아먹는 날이라고 하는 2월 초하드렛날 개최한다. 이 때는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농사일이 시작됨을 알린다. 동계를 치를 때는 어느 마을처럼 마을의 일이나 그해 품삯 등을 의논하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965년 조직된 위친계가 있으며. 1986년 4H활동과 마을 환경조성을 목적으로 한 청년회가 조직되었다. 마을의 총인구는 104명으로 남자 43명, 여자 61명이 살고 있으며, 총 면적은 0.14㎢이다. 이 중 전 0.01㎢, 답 0.11㎢, 임야 0.01㎢, 기타 0.01㎢가 해당된다. 마을의 주요 산업은 쌀, 보리, 콩으로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다. 성씨로는 김해김씨 3호, 의령남씨 3호, 밀양박씨 2호, 기타 14호가 있다.
정동마을
정동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5㎞지점에 위치한다. 영봉정마을과 바로 이웃하는 이 마을은 동쪽으로는 서당골이, 서쪽으로는 원덕마을이, 남쪽으로는 야학마을이 자리한다. 영봉정마을과 경계되는 지점에 1945년 개교한 봉황서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이 형성된 것은, 현재 직접 혈계조상으로 확인되는 이 마을의 입향조는 120년 전 전주이씨 이근언이 이웃 야학마을에서 들어와서 정착했다고는 하나 이곳으로 들어오게 된 이유나 배경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또한 밀양박씨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입향했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전주이씨가 이곳으로 들어올 때 이미 풍산홍씨 2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서 알 수가 없다. 이 마을은 일명 ‘함정골'이라고도 불리운다.
원래 마을 뒷산에 호랑이가 많아 자주 인가로 내려와 가축을 해치므로, 그 피해를 방지하고자 마을 곳곳에 함정을 파 놓아 함정골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어느 노승이 지나가면서 정동이라 칭하게 되면서 호랑이의 피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 하여 정동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한편 마을 회관 앞을 솔정지라 부르는데, 500년전까지만 해도 노송이 울창하였으나 모두 베어버려 지금은 대여섯 그루만 남아 있다. 이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930년 친목을 위해 조직된 대동계가 있으며, 인구는 남자 29명, 여자 31명으로 총61명이 살고 있으며, 18가구중 18가구 모두 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의 총면적은 0.83㎢로, 전 0.40㎢, 답 0.39㎢, 임야 0.02㎢, 기타 0.02㎢가 해당된다. 마을의 주요 산업은 벼, 보리 재배이며, 수박은 특작물로 심고 있다. 성씨는 밀양박씨 2호, 진주강씨 1호, 전주이씨 4호, 기타 11호가 있다.
원덕마을
원덕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약 5㎞쯤 떨어진 마을로, 남쪽으로 신덕마을, 서쪽으로 신창마을, 동북쪽으로 정동마을과 영봉정 마을이 위치한다. 마을 뒤로 차들보, 달월보, 둔전보가 있어 물은 걱정이 없었으나, 마을 앞으로는 수로정비가 안되어 배수가 원활하지 못하다. 혹시라도 많은 비가 올라치면 낮은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수해피해를 많이 겪게 된다. 1945년에 새로 생긴 마을로서 이웃 야학마을에서 살던 광산김씨 김사명 등 11호가 이곳으로 처음 입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확실한 역사적 기록이나 자료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마을에는 고려시대에 남평문씨가 번창하여 잘 살았다는 얘기가 전해오며, 마을을 세울 당시 땅을 일구면서 오래된 기와장과 바둑알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옛날 마을터가 아니었다 추측된다.
바둑알과 관련하여 이 마을에서는 예로부터 선인들이 모여 앉아 바둑을 대국하는 형국이어서 양택으로는 가장좋은 명당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한 신선들이 모여 춤추는 모습이 선인무수형이라 하여 이곳에 살면 자자손손 번창하게 된다는 속설이 전해져 온다. 그래서 해방 후에 동족마을을 새로 일구어 보고자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설촌 당시 맨손부터 시작해야 했던 주민들은 서로가 협동으로 마을터를 다지고 집을 짓는 등 고생을 했다. 하지만 그 때 짓기 시작한 집들이 농사일이 바쁜 관계로 몇 채가 남아 있다가 이농현상으로 이제는 폐가의 형태를 띤다. 이 마을에는 1970년도에 원친계라 하여 관혼상제의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는 동계가 있는데, 동족마을인 이곳에서는 동계인 동시에 곧 광산김씨 문중계인 셈이다. 매년 연말인 음력 동짓날에 개최된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관혼상제, 상부를 목적으로 한 원친계가 1970년 조직되었고, 현재 11명이 참여하고 있다. 마을의 총 인구는 55명으로, 이 중 남자 28명, 여자 27명이 있다. 총 면적은 0.76㎢로, 전 0.34㎢, 답 0.41㎢, 임야 0.33㎢, 기타 0.01㎢가 있다. 마을의 주요산업은 쌀, 보리이며, 특작물로는 수박을 재배하고 있다. 현재는 광산김씨 11호가 살고 있다.
야학마을
야학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5㎞쯤 떨어진 곳으로 만봉가는 비포장 신작로를 따라 1㎞쯤 들어가 동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마을 서쪽으로 신덕마을과 정동마을이, 동쪽으로는 운곡리 용제산이 위치한다. 마을 입구 오른편에는 모두 100년이 넘는 버드나무 노거수가 조림되어 있다. 이 나무들은 이 마을의 박봉래라는 사람이 심었다고 한다. 120여년전 운곡에서 살던 광산김씨 김재현이 아버지인 기환과 더불어 처가가 살던 이곳으로 이주하였을 때, 이미 처가인 전주이씨 외에 황씨 그리고 다른 성씨가 살고 있었다 한다. 1912년까지는 욱곡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개편된 이후, 봉황면 덕림리에 속하여 지금에 이른다.
옛날 어느 도인이 이 마을을 지나며 이곳은 마을의 산세나 지형이 들에서 노는 학이 돌아오는 형국이니 마을 이름을 야학동이라 칭하라 하였다 한다. 또한 학이 들에서 노는 형국이라 하여 ‘야학'이라 한다. 이 마을에서는 왜정 때만 해도, 당산제가 행해졌다. 마을의 무사태평과 풍농을 기원하는 제로서 매년 정월 열나흘날 밤 마을 앞 버드나무인 당산나무 아래서 지낸다. 당산제의 제관은 정월 초닷샛날 마을총회에서 선정되며 제장에는 금줄이 둘러진다. 제가 끝나면 마을 기금조성을 위해 액맥이굿을 당산나무, 마을 공동샘 등을 돌아다니며 했다. 당산제 외에 해방후까지도 마을뒤에 위치한 인몰랑이라는 산봉우리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인몰랑이란 유래는 동방의 몰랑 즉 동쪽의 봉우리란 뜻이며, 옛날 봉화터라고도 전한다.
한편 이 산에 몰래 묘를 쓰는 일이 생기면, 날이 가문 이유가 그 때문이라 하여 부녀자들이 호미를 들고 올라가 그 무덤을 파 없애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이렇게 하고 나면 3일 이내에는 꼭 비가 왔다고 하나 수리조합이 생긴 후로는 이러한 풍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로는, 마을 뒤에 사람이 하늘을 보고 크게 웃는 형국의 앙천대소라는 명당이 있다. 이에 관한 전설이 있는데, 운곡리 장군대좌자리에 부모의 묘를 쓰러왔던 한 중국인이 본국에서 이곳으로 돌아와보니 이미 도강김씨의 문산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다른 명당자리를 찾아 이곳에다 그 유골을 묻었다고 한다.
그 후 명절 때면 이 무덤에 가장 먼저 벌초를 해 준 사람에게 아들을 낳게 해 주거나 한해동안 복을 준다 하여 주민들이 다투어 벌초를 하였다 한다. 마을에는 1950년 조직된 대동계가 있으며, 기본 현황으로는 총 인구 46명에 총16가구 모두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마을의 총 면적은 0.61㎢로, 전 0.12㎢, 답 0.23㎢, 임야 0.25㎢, 기타 0.01㎢가 해당된다. 주요 산업은 쌀, 보리이며, 특작물로 고추를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밀양박씨 6호, 김해김씨 6호, 경주김씨 4호, 경주이씨 2호가 살고 있다.
신창마을
신창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세지로 가는 포장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5㎞쯤 되는 거리의 좌측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북쪽으로 영봉정 마을과 원덕마을, 동쪽으로 신덕마을에 인접해 있다. 마을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큰 정자나무 숲 속에 영남정이라 부르는 정각이 있다. 이 일대에서는 남쪽에서 가장 터가 좋다는 뜻과 함께 영평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영남정이라 이름 붙여졌다고 하며, 70여년 전에 세워져 마을의 회의나 휴식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고려시대에 이미 풍림으로 불리다가 조선중기에 이르러 지금의 이름으로 칭해진 신창마을은 일찍부터 덕림교회와 덕림제의 설립으로 다른 마을보다 개화가 빨랐다. 행정구역 변화를 보면, 1789년 호구총수에 의하면 당시 나주목 아래 지죽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지금의 봉황면에 속하게 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이 마을 지형형세가 다섯명의 신선이 바둑을 두는 모양의 오선위기형이라 하여 먼저 풍천임씨, 전의이씨 등이 이곳에 정착하려다 오래 살 곳이 못된다 하여 어디론가 이주하여 갔다고 전한다.
주민들은 1200년대 초에 이 마을이 설촌되었다 하나 그 입향조가 누구인지 뚜렷한 근거는 찾을 수 없고, 신창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또한 찾아볼 길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마을 형성은 현재 살고 있는 마을사람들과 연결된 혈연적인 의미에서만 이야기되는 것이고, 지석묘만 보아도 아주 먼 옛날부터 이 마을에 사람이 살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 후 1600년대초, 김해김씨가 정착하였다고 하지만 그 역시 확실하지 않다. 덕림리 신창마을에서는 고인돌과 오씨 효자각이 있는데 이는 향교에서 인정하지 않아 색을 칠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밭 가운데 위치한 고인돌의 높이는 197㎝, 둘레는 986㎝이다. 그리고 정자 왼쪽의 고인돌의 높이는 94㎝, 넓이는 312㎝이고 오른쪽 아래의 고인돌의 높이는 75㎝, 넓이는 429㎝이며, 위쪽의 높이는 114㎝이고 넓이는 506㎝이다. 마을 입구 오른쪽으로 정자나무 숲과 정각이 있는데 바로 옆에 덮개돌의 규모가 3~5m되는 지석묘가 3기 있고, 여기서 동쪽으로 약 80m쯤 떨어진 곳에 효자각이 있는데 이 주변에 11기가 흩어져 있다.
이로써 신창 지석묘군은 총 14기며, 정각 옆에 있는 가장 큰 3호를 중심으로 하여 크게 보면 동서방향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주변은 평지이고, 논이어서 지석묘의 도괴가 심하고 거의 매몰되어 있다. 이 마을에는 덕림교회가 있는데, 1904년 덕림리에 거주한 김윤환 등 수명이 광주 양림교회에서 복음전도를 받아 신도가 되어 박문삼의 집협실을 빌어 예배를 보았는데, 덕림, 오림, 덕곡, 만봉, 황용 등지에서 신도들이 모여들어 2백명에 달하자, 1906년 신도들의 연보로 차돌백이 (현 봉황서초등학교)에 교회당을 신축하고 서양인 선교사 오원 목사가 순회 심방하여 성경책을 무료로 나누어주고 전도함으로써 교세는 날로 부흥하였다. 1907년 교회의 첫 조사로 오태욱이 피임되어 한문서당을 부설하고 문맹퇴치에 힘썼는데 다음해에는 신교육을 가르치기 위해 사립학교를 설립하고, 교명을 영신학교라 하였다. 초대 교사는 변길송, 김흥순이 맡아 3백여명에 달하는 학생들의 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더욱이 변길송교사는 학생들에게 학도가를 가르치고 항일이념을 심어줌으로써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836년 조직된 대동계와 1930년 조직된 상부계가 있으며, 참여인원은 각 37명, 25명씩이다. 인구는 남자 85명, 여자 96명으로 총 181명이며, 37가구중 36호가 농가이다. 총 면적은 0.26㎢로, 전 0.02㎢, 답 0.20㎢, 임야 0.03㎢, 기타 0.01㎢이다. 마을 사람들은 쌀농사를 주로 짓고 있으며, 무와 고추를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마을의 주요 성씨로는 밀양박씨 5호, 해주오씨 2호, 초계변씨 2호, 기타 28호가 있다.
학림마을
학림 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5㎞쯤 가면 봉황에서 세지가는 국도 오른쪽에 자리한다. 마을 서쪽으로 학이 돌아오는 형국의 귀학봉이 있어 마을의 명칭과 부합된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 야쪽으로 논이 펼쳐져 있고, 마을 안에 들어서면 마을회관과 겸용하는 노인정이 있으며, 50m쯤 더 들어가면 1979년에 재건된 우산각과 그 앞에는 아름다운 노송이 늘어져 있다. 구전에 의하면 귀학봉이라는 옛마을 터였다는 ‘수만창'이라는 곳이 있어 그 곳을 파면 지금도 기와 조각이 나온다는데 이 마을은 아마 그 곳에서 옮겨오지 않았나 싶다. 최초의 입촌성씨는 알 수가 없고 이 마을에서 5대를 살아온 성씨도 없으니 마을의 형성 연대는 추측하기 어려우나 마을 앞의 노송으로 보아 1700년께 이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나 싶다.
어느 성씨나 이 마을에서 오래 살지 않고 떠나버려 계승하는 후손이 없고 현재는 김해김씨, 광산김씨, 경주이씨, 청주안씨가 살고 있다. 귀학봉은 이 마을의 주산으로서 멀리 남동쪽으로 보이는 야학마을에서 학이 놀다가 돌아오는 형국이라는데서 이름이 붙여졌다. 그 학들이 마을 앞 노송에 앉았다하여 학림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자생조직으로는 1905년에 조직된 대동계와 1949년 조직된 상부계, 1960년 청년회가 있다. 마을의 기본현황을 살펴보면 총 인구는 162명으로 남자 73명, 여자 89명이 살고 있다. 총 면적은 0.42㎢로, 전 0.12㎢, 답 0.23㎢, 임야 0.07㎢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담배, 수박, 무, 보리 등도 재배하고 있다. 마을에는 김해김씨 5호, 광산김씨 3호, 초계변씨 2호, 기타 22호의 성씨가 있다.
영봉정 마을
영봉정 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5㎞쯤 떨어진 마을로 봉황에서 세지가는 국도변에 있다. 정동마을과 바로 인접하며, 동쪽으로 만봉리, 덕곡리를 지나 영암 금정을 거쳐 장흥 유치의 보림사로 통한다. 서쪽으로는 세지로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학림마을과 신창마을이 위치한다. 북쪽으로는 오림리를 통해 영산포, 나주시로 이어진다. 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의 역사를 1905년 영암 금정에서 살았던 금성나씨 나명중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함으로써 비롯되었다고 하나 1789년 호구총수에 의하면 욱곡면 관할의 연봉리 (連峰里)로 나타나 있어, 이미 오림역으로서 조선시대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연 마을 이름으로는 영봉정이나 마을 사람들은 蓮峰亭(연봉정)으로 부르고 있다. 영봉정은 옛날 오림역으로서 해남, 강진에서 올라온 세곡등은 한양으로 이어주는 길목으로, 또한 한양에서 해남, 강진으로 파견된 사령들을 맞아 영접했다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리고 연봉정이란 이름은 마을 모양이 연꽃모양을 닮은 데서 유래되었다.
자생조직으로는 1972년 마을 사람들간의 친목과 상부상조를 위해 조직된 친목계가 있으며. 인구는 남자 20명, 여자 26명으로 총 46명이며, 면적은 전 0.06㎢, 답 0.03㎢, 임야 0.02㎢, 기타 0.01㎢로 총 0.12㎢이다. 농가는 7호, 비농가는 3호다.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보리도 재배하고 있으며, 성씨는 금성나씨 2호와 기타 8호가 거주하고 있다
영봉정은 옛날 오림역으로서 중요한 육로의 길목이었다. 신창마을에는 일찍이 세워진 덕림교회가 자리하여 일제시대 영신간이학교를 병설하여 봉황면 남부 및 세지면 일부의 청소년의 신학문 교육을 실시 지역개발에 선봉이 되었다. 영신간이 학교는 해방 직전인 1945년 5월 봉황면국민학교로 병합되었다. 또한 문맹퇴치 운동의 일환으로 덕림리, 오림리 인근 유지들을 중심으로 덕림제를 설림하여 주로 아이들에게 구학을 강학하였다. 덕림리는 신창마을에서의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빠른 문명개화를 보게 되었다. 덕림리는 별다른 특작물 재배없이 학림마을에서만 그 마을 주민 대부분의 수박재배를 하고 있고, 덕림 앞들은 비옥한 토질로써 2모작을 하고, 벼농사가 그 주업이다.
신덕마을
신덕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는 약 5㎞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마을 동쪽으로 멀리 용제산과 덕룡산을 배경으로 야학마을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정동마을, 북쪽으로는 낮은 평야지대이며 마을 앞으로 만봉천이 흐른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전인 1800년대 초에 김해김씨 김재엽, 의령남씨 남승집, 경주최씨 최영술이 각각 반곡, 장흥, 이장가에서 살다가 만봉천이 이 마을을 통과하여 영산강으로 합류하니 이 마을에 거주하면 자자손손 번창할 것이라 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한다. 신덕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살펴보면, 덕룡산의 줄기가 이곳까지 미친다 하여, 덕룡산의 ‘德'자와 새로운 터에 설촌하였다 하여 ‘新'자를 넣어 신덕이라 짓게 되었다.
신덕마을은 1912년까지 욱곡면 내 40마을 중 하나였으나, 1914년 행정개편과 더불어 지금의 덕림리로 속하게 되었다. 예로부터 이 마을은 이웃 세지면 한강의 들이 옛날 한강으로서 강수가 마을 앞까지 넘쳐서 현재 세지면 도두라는 섬이 생기고 본 마을에 선주가 있다하여 이 마을 형국이 선주형이라고도 하고, 옛날 마을 앞뒤에 보가 있어서 배가 지나는 행주형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샘을 파는 것을 금기로 전해져 온다. 만일 샘을 파게 되면 배에 구멍이 뚫려 물이 잠기므로 마을이 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마을에서의 식수공급은 마을 동쪽 끝에 위치한 고래라는 곳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한다. 한번은 마을의 한 사람이 샘을 팠다가 재앙을 두려워한 마을 사람들의 완강한 반대로 즉시 메워버렸다고까지 한다. 옛날 이 마을에는 한해가 드는 여름이면 운곡리에 소재한 용제산에서 기우제를 지냄으로써 비를 기원하기도 하였으나, 주민들이 앞산 꼭대기에 올라가 아무 제물없이 불만 피우면서 빌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만봉수리조합이 생긴 후로 물사정이 원활하게 됨에 따라 이 제를 지낼 필요는 없게 되었다.
한편 이 마을주위가 논이지만 왜정때만 해도 밭이어서 목화재배가 성했다고 한다. 목화가 필 때면 마을은 온통 하얀 구름 속에 둘러싸인 듯해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이었다고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은 어린시절을 회상하곤한다. 이 마을의 동계는 다른 마을과 구별되는데, 사람들이 콩볶아먹는 날이라고 하는 2월 초하드렛날 개최한다. 이 때는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농사일이 시작됨을 알린다. 동계를 치를 때는 어느 마을처럼 마을의 일이나 그해 품삯 등을 의논하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965년 조직된 위친계가 있으며. 1986년 4H활동과 마을 환경조성을 목적으로 한 청년회가 조직되었다. 마을의 총인구는 104명으로 남자 43명, 여자 61명이 살고 있으며, 총 면적은 0.14㎢이다. 이 중 전 0.01㎢, 답 0.11㎢, 임야 0.01㎢, 기타 0.01㎢가 해당된다. 마을의 주요 산업은 쌀, 보리, 콩으로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다. 성씨로는 김해김씨 3호, 의령남씨 3호, 밀양박씨 2호, 기타 14호가 있다.
정동마을
정동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5㎞지점에 위치한다. 영봉정마을과 바로 이웃하는 이 마을은 동쪽으로는 서당골이, 서쪽으로는 원덕마을이, 남쪽으로는 야학마을이 자리한다. 영봉정마을과 경계되는 지점에 1945년 개교한 봉황서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이 형성된 것은, 현재 직접 혈계조상으로 확인되는 이 마을의 입향조는 120년 전 전주이씨 이근언이 이웃 야학마을에서 들어와서 정착했다고는 하나 이곳으로 들어오게 된 이유나 배경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또한 밀양박씨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입향했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전주이씨가 이곳으로 들어올 때 이미 풍산홍씨 2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서 알 수가 없다. 이 마을은 일명 ‘함정골'이라고도 불리운다.
원래 마을 뒷산에 호랑이가 많아 자주 인가로 내려와 가축을 해치므로, 그 피해를 방지하고자 마을 곳곳에 함정을 파 놓아 함정골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어느 노승이 지나가면서 정동이라 칭하게 되면서 호랑이의 피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 하여 정동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한편 마을 회관 앞을 솔정지라 부르는데, 500년전까지만 해도 노송이 울창하였으나 모두 베어버려 지금은 대여섯 그루만 남아 있다. 이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930년 친목을 위해 조직된 대동계가 있으며, 인구는 남자 29명, 여자 31명으로 총61명이 살고 있으며, 18가구중 18가구 모두 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의 총면적은 0.83㎢로, 전 0.40㎢, 답 0.39㎢, 임야 0.02㎢, 기타 0.02㎢가 해당된다. 마을의 주요 산업은 벼, 보리 재배이며, 수박은 특작물로 심고 있다. 성씨는 밀양박씨 2호, 진주강씨 1호, 전주이씨 4호, 기타 11호가 있다.
원덕마을
원덕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약 5㎞쯤 떨어진 마을로, 남쪽으로 신덕마을, 서쪽으로 신창마을, 동북쪽으로 정동마을과 영봉정 마을이 위치한다. 마을 뒤로 차들보, 달월보, 둔전보가 있어 물은 걱정이 없었으나, 마을 앞으로는 수로정비가 안되어 배수가 원활하지 못하다. 혹시라도 많은 비가 올라치면 낮은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수해피해를 많이 겪게 된다. 1945년에 새로 생긴 마을로서 이웃 야학마을에서 살던 광산김씨 김사명 등 11호가 이곳으로 처음 입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확실한 역사적 기록이나 자료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마을에는 고려시대에 남평문씨가 번창하여 잘 살았다는 얘기가 전해오며, 마을을 세울 당시 땅을 일구면서 오래된 기와장과 바둑알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옛날 마을터가 아니었다 추측된다.
바둑알과 관련하여 이 마을에서는 예로부터 선인들이 모여 앉아 바둑을 대국하는 형국이어서 양택으로는 가장좋은 명당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한 신선들이 모여 춤추는 모습이 선인무수형이라 하여 이곳에 살면 자자손손 번창하게 된다는 속설이 전해져 온다. 그래서 해방 후에 동족마을을 새로 일구어 보고자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설촌 당시 맨손부터 시작해야 했던 주민들은 서로가 협동으로 마을터를 다지고 집을 짓는 등 고생을 했다. 하지만 그 때 짓기 시작한 집들이 농사일이 바쁜 관계로 몇 채가 남아 있다가 이농현상으로 이제는 폐가의 형태를 띤다. 이 마을에는 1970년도에 원친계라 하여 관혼상제의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는 동계가 있는데, 동족마을인 이곳에서는 동계인 동시에 곧 광산김씨 문중계인 셈이다. 매년 연말인 음력 동짓날에 개최된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관혼상제, 상부를 목적으로 한 원친계가 1970년 조직되었고, 현재 11명이 참여하고 있다. 마을의 총 인구는 55명으로, 이 중 남자 28명, 여자 27명이 있다. 총 면적은 0.76㎢로, 전 0.34㎢, 답 0.41㎢, 임야 0.33㎢, 기타 0.01㎢가 있다. 마을의 주요산업은 쌀, 보리이며, 특작물로는 수박을 재배하고 있다. 현재는 광산김씨 11호가 살고 있다.
야학마을
야학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5㎞쯤 떨어진 곳으로 만봉가는 비포장 신작로를 따라 1㎞쯤 들어가 동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마을 서쪽으로 신덕마을과 정동마을이, 동쪽으로는 운곡리 용제산이 위치한다. 마을 입구 오른편에는 모두 100년이 넘는 버드나무 노거수가 조림되어 있다. 이 나무들은 이 마을의 박봉래라는 사람이 심었다고 한다. 120여년전 운곡에서 살던 광산김씨 김재현이 아버지인 기환과 더불어 처가가 살던 이곳으로 이주하였을 때, 이미 처가인 전주이씨 외에 황씨 그리고 다른 성씨가 살고 있었다 한다. 1912년까지는 욱곡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개편된 이후, 봉황면 덕림리에 속하여 지금에 이른다.
옛날 어느 도인이 이 마을을 지나며 이곳은 마을의 산세나 지형이 들에서 노는 학이 돌아오는 형국이니 마을 이름을 야학동이라 칭하라 하였다 한다. 또한 학이 들에서 노는 형국이라 하여 ‘야학'이라 한다. 이 마을에서는 왜정 때만 해도, 당산제가 행해졌다. 마을의 무사태평과 풍농을 기원하는 제로서 매년 정월 열나흘날 밤 마을 앞 버드나무인 당산나무 아래서 지낸다. 당산제의 제관은 정월 초닷샛날 마을총회에서 선정되며 제장에는 금줄이 둘러진다. 제가 끝나면 마을 기금조성을 위해 액맥이굿을 당산나무, 마을 공동샘 등을 돌아다니며 했다. 당산제 외에 해방후까지도 마을뒤에 위치한 인몰랑이라는 산봉우리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인몰랑이란 유래는 동방의 몰랑 즉 동쪽의 봉우리란 뜻이며, 옛날 봉화터라고도 전한다.
한편 이 산에 몰래 묘를 쓰는 일이 생기면, 날이 가문 이유가 그 때문이라 하여 부녀자들이 호미를 들고 올라가 그 무덤을 파 없애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이렇게 하고 나면 3일 이내에는 꼭 비가 왔다고 하나 수리조합이 생긴 후로는 이러한 풍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로는, 마을 뒤에 사람이 하늘을 보고 크게 웃는 형국의 앙천대소라는 명당이 있다. 이에 관한 전설이 있는데, 운곡리 장군대좌자리에 부모의 묘를 쓰러왔던 한 중국인이 본국에서 이곳으로 돌아와보니 이미 도강김씨의 문산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다른 명당자리를 찾아 이곳에다 그 유골을 묻었다고 한다.
그 후 명절 때면 이 무덤에 가장 먼저 벌초를 해 준 사람에게 아들을 낳게 해 주거나 한해동안 복을 준다 하여 주민들이 다투어 벌초를 하였다 한다. 마을에는 1950년 조직된 대동계가 있으며, 기본 현황으로는 총 인구 46명에 총16가구 모두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마을의 총 면적은 0.61㎢로, 전 0.12㎢, 답 0.23㎢, 임야 0.25㎢, 기타 0.01㎢가 해당된다. 주요 산업은 쌀, 보리이며, 특작물로 고추를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밀양박씨 6호, 김해김씨 6호, 경주김씨 4호, 경주이씨 2호가 살고 있다.
신창마을
신창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세지로 가는 포장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5㎞쯤 되는 거리의 좌측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북쪽으로 영봉정 마을과 원덕마을, 동쪽으로 신덕마을에 인접해 있다. 마을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큰 정자나무 숲 속에 영남정이라 부르는 정각이 있다. 이 일대에서는 남쪽에서 가장 터가 좋다는 뜻과 함께 영평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영남정이라 이름 붙여졌다고 하며, 70여년 전에 세워져 마을의 회의나 휴식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고려시대에 이미 풍림으로 불리다가 조선중기에 이르러 지금의 이름으로 칭해진 신창마을은 일찍부터 덕림교회와 덕림제의 설립으로 다른 마을보다 개화가 빨랐다. 행정구역 변화를 보면, 1789년 호구총수에 의하면 당시 나주목 아래 지죽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지금의 봉황면에 속하게 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이 마을 지형형세가 다섯명의 신선이 바둑을 두는 모양의 오선위기형이라 하여 먼저 풍천임씨, 전의이씨 등이 이곳에 정착하려다 오래 살 곳이 못된다 하여 어디론가 이주하여 갔다고 전한다.
주민들은 1200년대 초에 이 마을이 설촌되었다 하나 그 입향조가 누구인지 뚜렷한 근거는 찾을 수 없고, 신창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또한 찾아볼 길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마을 형성은 현재 살고 있는 마을사람들과 연결된 혈연적인 의미에서만 이야기되는 것이고, 지석묘만 보아도 아주 먼 옛날부터 이 마을에 사람이 살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 후 1600년대초, 김해김씨가 정착하였다고 하지만 그 역시 확실하지 않다. 덕림리 신창마을에서는 고인돌과 오씨 효자각이 있는데 이는 향교에서 인정하지 않아 색을 칠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밭 가운데 위치한 고인돌의 높이는 197㎝, 둘레는 986㎝이다. 그리고 정자 왼쪽의 고인돌의 높이는 94㎝, 넓이는 312㎝이고 오른쪽 아래의 고인돌의 높이는 75㎝, 넓이는 429㎝이며, 위쪽의 높이는 114㎝이고 넓이는 506㎝이다. 마을 입구 오른쪽으로 정자나무 숲과 정각이 있는데 바로 옆에 덮개돌의 규모가 3~5m되는 지석묘가 3기 있고, 여기서 동쪽으로 약 80m쯤 떨어진 곳에 효자각이 있는데 이 주변에 11기가 흩어져 있다.
이로써 신창 지석묘군은 총 14기며, 정각 옆에 있는 가장 큰 3호를 중심으로 하여 크게 보면 동서방향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주변은 평지이고, 논이어서 지석묘의 도괴가 심하고 거의 매몰되어 있다. 이 마을에는 덕림교회가 있는데, 1904년 덕림리에 거주한 김윤환 등 수명이 광주 양림교회에서 복음전도를 받아 신도가 되어 박문삼의 집협실을 빌어 예배를 보았는데, 덕림, 오림, 덕곡, 만봉, 황용 등지에서 신도들이 모여들어 2백명에 달하자, 1906년 신도들의 연보로 차돌백이 (현 봉황서초등학교)에 교회당을 신축하고 서양인 선교사 오원 목사가 순회 심방하여 성경책을 무료로 나누어주고 전도함으로써 교세는 날로 부흥하였다. 1907년 교회의 첫 조사로 오태욱이 피임되어 한문서당을 부설하고 문맹퇴치에 힘썼는데 다음해에는 신교육을 가르치기 위해 사립학교를 설립하고, 교명을 영신학교라 하였다. 초대 교사는 변길송, 김흥순이 맡아 3백여명에 달하는 학생들의 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더욱이 변길송교사는 학생들에게 학도가를 가르치고 항일이념을 심어줌으로써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836년 조직된 대동계와 1930년 조직된 상부계가 있으며, 참여인원은 각 37명, 25명씩이다. 인구는 남자 85명, 여자 96명으로 총 181명이며, 37가구중 36호가 농가이다. 총 면적은 0.26㎢로, 전 0.02㎢, 답 0.20㎢, 임야 0.03㎢, 기타 0.01㎢이다. 마을 사람들은 쌀농사를 주로 짓고 있으며, 무와 고추를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마을의 주요 성씨로는 밀양박씨 5호, 해주오씨 2호, 초계변씨 2호, 기타 28호가 있다.
학림마을
학림 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5㎞쯤 가면 봉황에서 세지가는 국도 오른쪽에 자리한다. 마을 서쪽으로 학이 돌아오는 형국의 귀학봉이 있어 마을의 명칭과 부합된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 야쪽으로 논이 펼쳐져 있고, 마을 안에 들어서면 마을회관과 겸용하는 노인정이 있으며, 50m쯤 더 들어가면 1979년에 재건된 우산각과 그 앞에는 아름다운 노송이 늘어져 있다. 구전에 의하면 귀학봉이라는 옛마을 터였다는 ‘수만창'이라는 곳이 있어 그 곳을 파면 지금도 기와 조각이 나온다는데 이 마을은 아마 그 곳에서 옮겨오지 않았나 싶다. 최초의 입촌성씨는 알 수가 없고 이 마을에서 5대를 살아온 성씨도 없으니 마을의 형성 연대는 추측하기 어려우나 마을 앞의 노송으로 보아 1700년께 이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나 싶다.
어느 성씨나 이 마을에서 오래 살지 않고 떠나버려 계승하는 후손이 없고 현재는 김해김씨, 광산김씨, 경주이씨, 청주안씨가 살고 있다. 귀학봉은 이 마을의 주산으로서 멀리 남동쪽으로 보이는 야학마을에서 학이 놀다가 돌아오는 형국이라는데서 이름이 붙여졌다. 그 학들이 마을 앞 노송에 앉았다하여 학림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자생조직으로는 1905년에 조직된 대동계와 1949년 조직된 상부계, 1960년 청년회가 있다. 마을의 기본현황을 살펴보면 총 인구는 162명으로 남자 73명, 여자 89명이 살고 있다. 총 면적은 0.42㎢로, 전 0.12㎢, 답 0.23㎢, 임야 0.07㎢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담배, 수박, 무, 보리 등도 재배하고 있다. 마을에는 김해김씨 5호, 광산김씨 3호, 초계변씨 2호, 기타 22호의 성씨가 있다.
영봉정 마을
영봉정 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5㎞쯤 떨어진 마을로 봉황에서 세지가는 국도변에 있다. 정동마을과 바로 인접하며, 동쪽으로 만봉리, 덕곡리를 지나 영암 금정을 거쳐 장흥 유치의 보림사로 통한다. 서쪽으로는 세지로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학림마을과 신창마을이 위치한다. 북쪽으로는 오림리를 통해 영산포, 나주시로 이어진다. 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의 역사를 1905년 영암 금정에서 살았던 금성나씨 나명중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함으로써 비롯되었다고 하나 1789년 호구총수에 의하면 욱곡면 관할의 연봉리 (連峰里)로 나타나 있어, 이미 오림역으로서 조선시대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연 마을 이름으로는 영봉정이나 마을 사람들은 蓮峰亭(연봉정)으로 부르고 있다. 영봉정은 옛날 오림역으로서 해남, 강진에서 올라온 세곡등은 한양으로 이어주는 길목으로, 또한 한양에서 해남, 강진으로 파견된 사령들을 맞아 영접했다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리고 연봉정이란 이름은 마을 모양이 연꽃모양을 닮은 데서 유래되었다.
자생조직으로는 1972년 마을 사람들간의 친목과 상부상조를 위해 조직된 친목계가 있으며. 인구는 남자 20명, 여자 26명으로 총 46명이며, 면적은 전 0.06㎢, 답 0.03㎢, 임야 0.02㎢, 기타 0.01㎢로 총 0.12㎢이다. 농가는 7호, 비농가는 3호다.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보리도 재배하고 있으며, 성씨는 금성나씨 2호와 기타 8호가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