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곡리
- 날짜
-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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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12㎞떨어진 곳에 위치한 덕곡리는 본래 남평군 욱곡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덕룡동 쌍동과 나주군 지죽면 덕용리, 평월리 일부를 병합하여 덕용과 쌍동의 이름을 본따서 덕곡이라 칭하였다. 나주군 봉황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동네 중앙에는 만봉천의 상류가 관류하고 있으며, 서쪽과 남쪽은 영암군 금정면과 접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농암산, 봉천산, 계천산 등이 있으며, 동쪽은 덕룡산을 사이에 다도면과 접해 있다. 북쪽에는 만봉리와 접해 있는데, 덕룡마을은 마을 앞산이 용과 같은 형상을 한 덕룡산 아랫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쌍동마을은 조선시대에 마을 뒷산 중턱에 있던 절의 주지가 마을 앞에 있는 산봉우리가 삿갓이 나란히 글 읽는 형상이라 해서 쌍봉이라 불렀다가 일제 말기에 쌍동마을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덕용과 쌍동은 산촌에 속해있는 규모가 작은 마을들이다.
덕룡마을
덕룡마을은 면소재지인 신석마을에서 남동쪽으로 약 16㎞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봉황에서 세지간 지방도로를 따라가다보면 덕림리 신창마을에서 약 2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만봉리를 거쳐 막바지에 이르면, 덕룡산의 줄기가 사방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아늑한 산속깊은 곳에 이 마을이 자리한다. 마을의 동쪽으로 덕룡제를 넘어 다도면 왕정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영암군 금정면 세류리 기동마을의 궁성산성터와 마주한다. 남쪽으로는 세류마을을 거쳐 장흥 유치면까지 소로가 연결되며 북쪽으로는 다도면 덕림리 봉석동 마을과 인접한다. 원래는 서북쪽에 자리한 쌍동마을과 동일한 생활권을 가지면서 모든 행사나 조직들이 서로 같은 공동체 생활을 해왔다. 그런데 1978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분리되어 지금은 이장을 따로 두고 마을의 행사나 모든 일을 따로따로 하고 있다.
이 마을은 지역들의 경계에 있는 탓으로 마을에 버스가 운행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화순, 영암, 장흥군 그리고 다도면의 사람들이 세류재와 덕룡재를 넘어 이 마을을 통하여 영산포장이나 동창장을 이용하였다. 이들은 주로 땔감이나 곡식, 그리고 약초, 산채 등을 이고 지고 이 길을 왕래했었다 한다. 따라서 이 마을은 교통의 요지라기보다는 도보의 요지로서의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1960년대까지 만해도 마을 앞에는 상점이나 주막이 대여섯 곳이나 있었는데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마을이 얼마만큼 번화했는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로 넘어오면서 광주-덕룡간 버스가 개통되고 새마을 사업으로 마을의 도로사정이 좋아지자, 어느 마을이나 버스가 통행함에 따라 덕룡재를 넘어서 왕래하던 장꾼이나 행인들의 발길이 끊이기 시작했고, 그 동안 번창했던 주막이나 상점들이 하나 둘씩 없어져 이 마을은 차츰 다른 지역과는 고립되기 시작했다. 덕룡 마을이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 것은 191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편찬된 지방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나주군 지죽면의 32개 마을 중의 일부로 등장하고, 또 한편으로는 욱곡면의 40개 마을 중의 한 마을로 남평군의 관할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 할 수가 있다.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200년전 밀양박씨 박노명의 9대조가 이 마을로 들어와 마을을 일으켰다고 하나 어떤 연유로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 문헌상으로는 마을 주민들도 아는 이가 없다. 현재는 밀양박씨는 1가구만이 살고 있다. 박씨의 뒤를 이어 경주김씨 김윤길이 1830년쯤 운곡리에서 살다가 이것으로 옮겨 정착하였다는데 농사를 지으면서 지관으로서 이름을 떨쳐 화순, 영암, 장흥 등지에서까지 찾아 왔다 한다. 이 마을 어귀에 팽나무 2그루와 느티나무 1그루, 아름들이 고목이 3그루가 지켜서서 마을의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덕룡사라는 절을 지을 때, 이 절의 스님이 마을 어귀에 입석 2기와 함께 이 나무들을 심었다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와 입석이 능히 5백년은 넘었을 것이라고 하니 그렇게 본다면 이 마을에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덕용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터에 광주에 사는 강태식이라는 사람이 사들여 집을 지었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김해김씨 등이 살고 있다. 이 마을은 앞뒤로 높은 산이 병풍처럼 사방으로 둘러쳐져 있으므로 다른 지역 사람들은 덕룡마을이라는 명칭보다 ‘덕룡굴'이라는 지명에 익숙하다. 마을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군사들이 행군을 하고 있는 모양을 한 꼬깔봉, 투구봉이 있고, 장군이 칼을 들고 들어가는 모습의 깃대봉, 칼바위봉, 초월바위봉이 자리한다. 오른쪽에는 차일처럼 둘러쳐진 채일봉, 인적봉, 바위로만 이루어진 대바위봉이 솟아 있다. 아침에 해가 뜨면 가장 먼저 햇살이 비친다는 전재등, 조개박골, 미자박골이 있으며, 앞으로는 태조 이성계가 성을 쌓았다는 성적굴, 지난날 남생이가 살았다는 남적굴이 있다.
이렇듯 마을이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만큼 산에 얽힌 지명들이 여느 지역보다 풍부하게 나타나고 있다. 왕정골이란 다른 마을 지명이 모두 덕룡에 관계된 지명으로 생각하는 주민들을 볼 때 타 지역과 얼마나 활발한 왕래가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왕정이란 지명유래는 고려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이성계가 고장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다도면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봉씨집에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봉씨는 개울에 나가 중택이라는 고기를 잡아 찬으로 해서 식사를 올렸는데, 이성계가 고기를 먹어 보니 고기가 너무 맛있어 봉씨에게 물으니 ‘중택'이라고 한다. 이성계는 이렇게 맛있는 고기를 왜 하필이면 중택이라 하느냐하며 왕붕어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그 후 개울에는 중택은 없어지고 왕붕어만 있었다고 한다. 또한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이곳을 왕정고랑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편 덕룡마을에서는 당산제를 모시고 있는데 그 명칭은 바깥당산과 안당산이라고 한다. 이 당산나무는 각각 마을 입구와 마을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나무의 종은 각각 느티나무(351m), 팽나무(337m)이다. 할머니 당산 즉 안당산 앞에는 돌무덤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등을 다는 곳으로 쓰였다. 제사는 할머니 당산, 즉 안당산에서만 지내고 있다. 제 음식으로는 과일, 떡 명태, 김, 미역국 등이 올라갔고 당산제를 올리면서 동시에 농악이 행해졌다. 제관은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이 드시고 깨끗한 분으로 초상집에 가서는 안되고, 개고기와 죽은 고기를 먹어서는 안되고 나쁜 곳엔 가지 않는다. 제사 비용은 동네 예산으로 쓰고 있다. 또한 입석신앙으로는 마을에 입석이 2개가 위치하고 있는데 그 유래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이것은 각각 나무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 나무 옆 오른쪽의 선돌의 높이는 168m, 둘레는 134m이다. 그리고 왼쪽 선돌의 높이는 179m, 둘레는 160m이다.
마을에는 1920년에 조직된 상부계와 동계, 1976년 조직된 부녀회가 있다. 마을의 기본현황으로는 총 인구 76명으로, 남자 40명, 여자 36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총 면적은 1.53㎢로, 이 중 전 0.10㎢, 답 0.09㎢, 임야 1.33㎢, 기타 0.01㎢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산업과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무와 배추를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밀양박씨 1호, 김해김씨 8호, 경주김씨 3호, 기타 8호가 있다.
쌍동마을
면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약 15㎞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광주서 출발하는 180번 군내버스를 타고 세지면 소재지인 동창정류장을 경유하여 덕림리 신창마을과 동서로 마주하는 만봉리 만년동과 우봉마을을 지나면 봉황서초등학교 덕곡분교의 아주 조그마한 건물이 서 있다. 이 마을의 동쪽은 다도면 덕림리 서동, 봉석동과 인접하고 서쪽은 영암군 금정면 안노리와 마주하고 있다. 남쪽은 걸어서 약 3㎞의 거리를 두고 생활권이 비숫한 덕룡마을이 있으며, 북으로는 덕룡산 줄기에 자리한 만년동과 우봉마을이 가깝게 자리잡고 있다.
동서로 산줄기가 버티고 있는 바람에 농토가 길다랗고 계단식 농경지를 경작하고 있어 생활이 어려운 빈농마을이다. 대체로 높은 지대에 자리하고 있는데 마을을 한 가운데로 나누어 윗쪽을 상쌍, 아래부분을 하쌍이라 하고 이를 한 집단으로 묶어 쌍동이라 부른다. 이 쌍동마을은 봉황면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덕룡마을과 같은 생활권을 가지면서 공동체 생활을 해왔지만 의식 생활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즉 쌍동마을은 1905년경 기독교 선교가 시작되고 교회가 개설됨으로써 많은 주민들이 기독교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데 반해 덕룡마을 주민들은 기독교와는 아주 상반되는 당산제의 제신을 신봉하고 있다.
쌍동마을은 영암, 장흥, 화순 사람들이 왕래할 때만해도 주막이나 장사가 즐비했었고, 따라서 타 지역 사람들과 교류도 잦았는데 지금은 마을마다 버스가 운행되어 그러한 정취는 찾아볼 길이 없고 마을 주민들만이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936년 조직된 상부계와 1974년 조직된 반지계, 1949년의 사라계가 있다.마을의 총 인구는 98명이며, 이중 남자는 53명, 여자는 45명이 해당되고, 농가는 24호, 비농가는 1호이다. 마을의 총면적은 0.38㎢이며, 전 0.04㎢, 답 0.13㎢, 임야 0.20㎢. 기타 0.01㎢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보리, 콩과 특작물로 뽕나무를 재배하고 있다. 성씨는 밀양박씨(密陽朴氏) 4호, 순창조씨(淳昌趙氏) 6호, 김해김씨(金海金氏) 4호, 기타 11호가 있다
덕룡마을
덕룡마을은 면소재지인 신석마을에서 남동쪽으로 약 16㎞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봉황에서 세지간 지방도로를 따라가다보면 덕림리 신창마을에서 약 2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만봉리를 거쳐 막바지에 이르면, 덕룡산의 줄기가 사방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아늑한 산속깊은 곳에 이 마을이 자리한다. 마을의 동쪽으로 덕룡제를 넘어 다도면 왕정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영암군 금정면 세류리 기동마을의 궁성산성터와 마주한다. 남쪽으로는 세류마을을 거쳐 장흥 유치면까지 소로가 연결되며 북쪽으로는 다도면 덕림리 봉석동 마을과 인접한다. 원래는 서북쪽에 자리한 쌍동마을과 동일한 생활권을 가지면서 모든 행사나 조직들이 서로 같은 공동체 생활을 해왔다. 그런데 1978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분리되어 지금은 이장을 따로 두고 마을의 행사나 모든 일을 따로따로 하고 있다.
이 마을은 지역들의 경계에 있는 탓으로 마을에 버스가 운행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화순, 영암, 장흥군 그리고 다도면의 사람들이 세류재와 덕룡재를 넘어 이 마을을 통하여 영산포장이나 동창장을 이용하였다. 이들은 주로 땔감이나 곡식, 그리고 약초, 산채 등을 이고 지고 이 길을 왕래했었다 한다. 따라서 이 마을은 교통의 요지라기보다는 도보의 요지로서의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1960년대까지 만해도 마을 앞에는 상점이나 주막이 대여섯 곳이나 있었는데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마을이 얼마만큼 번화했는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로 넘어오면서 광주-덕룡간 버스가 개통되고 새마을 사업으로 마을의 도로사정이 좋아지자, 어느 마을이나 버스가 통행함에 따라 덕룡재를 넘어서 왕래하던 장꾼이나 행인들의 발길이 끊이기 시작했고, 그 동안 번창했던 주막이나 상점들이 하나 둘씩 없어져 이 마을은 차츰 다른 지역과는 고립되기 시작했다. 덕룡 마을이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 것은 191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편찬된 지방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나주군 지죽면의 32개 마을 중의 일부로 등장하고, 또 한편으로는 욱곡면의 40개 마을 중의 한 마을로 남평군의 관할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 할 수가 있다.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200년전 밀양박씨 박노명의 9대조가 이 마을로 들어와 마을을 일으켰다고 하나 어떤 연유로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 문헌상으로는 마을 주민들도 아는 이가 없다. 현재는 밀양박씨는 1가구만이 살고 있다. 박씨의 뒤를 이어 경주김씨 김윤길이 1830년쯤 운곡리에서 살다가 이것으로 옮겨 정착하였다는데 농사를 지으면서 지관으로서 이름을 떨쳐 화순, 영암, 장흥 등지에서까지 찾아 왔다 한다. 이 마을 어귀에 팽나무 2그루와 느티나무 1그루, 아름들이 고목이 3그루가 지켜서서 마을의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덕룡사라는 절을 지을 때, 이 절의 스님이 마을 어귀에 입석 2기와 함께 이 나무들을 심었다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와 입석이 능히 5백년은 넘었을 것이라고 하니 그렇게 본다면 이 마을에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덕용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터에 광주에 사는 강태식이라는 사람이 사들여 집을 지었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김해김씨 등이 살고 있다. 이 마을은 앞뒤로 높은 산이 병풍처럼 사방으로 둘러쳐져 있으므로 다른 지역 사람들은 덕룡마을이라는 명칭보다 ‘덕룡굴'이라는 지명에 익숙하다. 마을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군사들이 행군을 하고 있는 모양을 한 꼬깔봉, 투구봉이 있고, 장군이 칼을 들고 들어가는 모습의 깃대봉, 칼바위봉, 초월바위봉이 자리한다. 오른쪽에는 차일처럼 둘러쳐진 채일봉, 인적봉, 바위로만 이루어진 대바위봉이 솟아 있다. 아침에 해가 뜨면 가장 먼저 햇살이 비친다는 전재등, 조개박골, 미자박골이 있으며, 앞으로는 태조 이성계가 성을 쌓았다는 성적굴, 지난날 남생이가 살았다는 남적굴이 있다.
이렇듯 마을이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만큼 산에 얽힌 지명들이 여느 지역보다 풍부하게 나타나고 있다. 왕정골이란 다른 마을 지명이 모두 덕룡에 관계된 지명으로 생각하는 주민들을 볼 때 타 지역과 얼마나 활발한 왕래가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왕정이란 지명유래는 고려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이성계가 고장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다도면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봉씨집에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봉씨는 개울에 나가 중택이라는 고기를 잡아 찬으로 해서 식사를 올렸는데, 이성계가 고기를 먹어 보니 고기가 너무 맛있어 봉씨에게 물으니 ‘중택'이라고 한다. 이성계는 이렇게 맛있는 고기를 왜 하필이면 중택이라 하느냐하며 왕붕어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그 후 개울에는 중택은 없어지고 왕붕어만 있었다고 한다. 또한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이곳을 왕정고랑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편 덕룡마을에서는 당산제를 모시고 있는데 그 명칭은 바깥당산과 안당산이라고 한다. 이 당산나무는 각각 마을 입구와 마을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나무의 종은 각각 느티나무(351m), 팽나무(337m)이다. 할머니 당산 즉 안당산 앞에는 돌무덤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등을 다는 곳으로 쓰였다. 제사는 할머니 당산, 즉 안당산에서만 지내고 있다. 제 음식으로는 과일, 떡 명태, 김, 미역국 등이 올라갔고 당산제를 올리면서 동시에 농악이 행해졌다. 제관은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이 드시고 깨끗한 분으로 초상집에 가서는 안되고, 개고기와 죽은 고기를 먹어서는 안되고 나쁜 곳엔 가지 않는다. 제사 비용은 동네 예산으로 쓰고 있다. 또한 입석신앙으로는 마을에 입석이 2개가 위치하고 있는데 그 유래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이것은 각각 나무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 나무 옆 오른쪽의 선돌의 높이는 168m, 둘레는 134m이다. 그리고 왼쪽 선돌의 높이는 179m, 둘레는 160m이다.
마을에는 1920년에 조직된 상부계와 동계, 1976년 조직된 부녀회가 있다. 마을의 기본현황으로는 총 인구 76명으로, 남자 40명, 여자 36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총 면적은 1.53㎢로, 이 중 전 0.10㎢, 답 0.09㎢, 임야 1.33㎢, 기타 0.01㎢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산업과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무와 배추를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밀양박씨 1호, 김해김씨 8호, 경주김씨 3호, 기타 8호가 있다.
쌍동마을
면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약 15㎞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광주서 출발하는 180번 군내버스를 타고 세지면 소재지인 동창정류장을 경유하여 덕림리 신창마을과 동서로 마주하는 만봉리 만년동과 우봉마을을 지나면 봉황서초등학교 덕곡분교의 아주 조그마한 건물이 서 있다. 이 마을의 동쪽은 다도면 덕림리 서동, 봉석동과 인접하고 서쪽은 영암군 금정면 안노리와 마주하고 있다. 남쪽은 걸어서 약 3㎞의 거리를 두고 생활권이 비숫한 덕룡마을이 있으며, 북으로는 덕룡산 줄기에 자리한 만년동과 우봉마을이 가깝게 자리잡고 있다.
동서로 산줄기가 버티고 있는 바람에 농토가 길다랗고 계단식 농경지를 경작하고 있어 생활이 어려운 빈농마을이다. 대체로 높은 지대에 자리하고 있는데 마을을 한 가운데로 나누어 윗쪽을 상쌍, 아래부분을 하쌍이라 하고 이를 한 집단으로 묶어 쌍동이라 부른다. 이 쌍동마을은 봉황면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덕룡마을과 같은 생활권을 가지면서 공동체 생활을 해왔지만 의식 생활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즉 쌍동마을은 1905년경 기독교 선교가 시작되고 교회가 개설됨으로써 많은 주민들이 기독교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데 반해 덕룡마을 주민들은 기독교와는 아주 상반되는 당산제의 제신을 신봉하고 있다.
쌍동마을은 영암, 장흥, 화순 사람들이 왕래할 때만해도 주막이나 장사가 즐비했었고, 따라서 타 지역 사람들과 교류도 잦았는데 지금은 마을마다 버스가 운행되어 그러한 정취는 찾아볼 길이 없고 마을 주민들만이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936년 조직된 상부계와 1974년 조직된 반지계, 1949년의 사라계가 있다.마을의 총 인구는 98명이며, 이중 남자는 53명, 여자는 45명이 해당되고, 농가는 24호, 비농가는 1호이다. 마을의 총면적은 0.38㎢이며, 전 0.04㎢, 답 0.13㎢, 임야 0.20㎢. 기타 0.01㎢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보리, 콩과 특작물로 뽕나무를 재배하고 있다. 성씨는 밀양박씨(密陽朴氏) 4호, 순창조씨(淳昌趙氏) 6호, 김해김씨(金海金氏) 4호, 기타 11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