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천리
- 날짜
-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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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천리는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약 2㎞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면소재지에서 지방도로인 금하로를 따라 가면 그 종점에 철천리 유촌과 등내, 수각마을이 맞붙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옹굴재를 넘어가면 선동마을이 있다. 이들 마을의 뒤로는 봉황의 명산인 덕룡산이 있으며, 수각에서 덕룡산의 한치재를 넘으면 다도면의 암정리, 돈밭굴재를 넘으면 신동리에 이른다 유촌, 등내, 수각, 선동 등 4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철천은 본래 남평군의 지역으로서 유촌 등내 수각은 덕곡면, 선동은 죽곡면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4개의 자연마을이 합쳐져 철천리가 되었다. 이 중 철천 1구는 수각과 유촌일부, 철천 2구는 등내와 유촌일부, 철천 3구는 선동마을로 각각 편제되어 있다.
총 147가구에 인구는 717명으로 남자가 351명, 여자가 366명이다. 대부분이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는데 봉황면내에서는 비교적 큰 촌락이다. 이들 마을중 수각은 진주정씨(晉州鄭氏), 등내는 이천서씨(利川徐氏), 선동은 김해김씨 (金海金氏)와 제주양씨(濟州陽氏)가 각각 주요 성씨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이 세 마을을 한마을로 인식하고 있으며, 실제 생활에서도 동일 문화권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 성격상 동일 생활권인 수각, 등내, 유촌마을을 한데 묶어 소개하고자 한다.
수각, 등내, 유촌 마을
철천리의 수각, 등내, 유촌은 옛날 철야현(鐵冶縣)의 소재지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이 마을이 철천리로 편제된 것은 일제시대의 일이므로 여기서는 먼저 '철야'의 변천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이곳 주민들이 첫째 ‘철천'보다 ‘철야'라는 이름에 더욱 정감을 가지고 있고, 둘째는 옛날 철야에 속해 있었던 각동리 마동, 내동, 수동, 창등, 철천리 유촌, 등내 등의 마을이 서로 관련되어 같은 연결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확인되는 이천서씨(利川徐氏)는 13세기 경에 이곳에서 처음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의 백제, 통일 신라, 고려 초기에도 다른 성씨나 주민들은 계속 살았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서씨 이전에는 반씨, 노씨, 양씨, 하씨, 방씨, 김씨 등이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료의 부족으로 정확한 추적을 못하고 있다. 다만 여기에서는 추적이 가능하며 현재도 주요 성씨로 자리잡고 있는 이천서씨(利川徐氏)와 진주정씨(晉州鄭氏)를 소개한다.
이천서씨(利川徐氏)
이천 서씨는 상서공파(尙書公派) 중조(中祖) 서린(徐鱗)(1222~1305)이 처음 각동리 내등에 정착하면서 철야에 터를 잡았다. 그는 고려조에 과거에 급제한 이래 병부상서에 까지 이르렀으나 간신 권함(權咸)의 모함을 받아 영평감무로 좌천되었다. 서린은 영평감무를 역임후 철야(現 각동리 내동)에 정착함으로써 이천서씨 상서공파의 입향조가 되었는데 그후 후손들이 등내에 이거함으로써 주세거지를 형성하였다.
진주정씨(晉州鄭氏)
16세기 중엽에 정종요(鄭宗堯)가 입향하였다. 하지만 그의 정확한 생존시기는 알 수 없다. 그는 함평군 월야면에서 살다가 각동리 내동 서인수 집에 취객으로 와 있었다. 이때 서인수는 아들이 없었는데 당시에는 양자법이 없어 대를 잇지 못하였다. 이에 정종요를 딸과 혼인시켜 양자로 삼아 진주정씨가 철야에 터를 잡게 되었다. 그 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진주정씨가 수각마을에 많이 이거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편 철천리 수각과 분리된 각동리 수각은 정종요의 후손들인 진주정씨가 많이 살고 있으며 철천리의 수각, 유촌, 등내 뿐만 아니라 각동리까지 넓은 분포를 보이면서 봉황의 대성으로 성장하였던 이천서씨와 진주정씨는 1592년 임진왜란 후에 더욱더 성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천서씨 문중에서는 서린의 9세손인 송촌(松村) 서정후(徐廷厚, 1565 ~1593)와 11세손인 심암(心菴) 서진문(徐振文, 1564 ~1593 )이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 들어가 큰 활약을 하다가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진주정씨(晉州鄭氏)는 정종요(鄭宗堯 )의 아들인 향북당(向北堂) 준일(遵一, 1547~1623)과 향북당의 아들 정현(1570~1660)이 의병장 고경명의 막하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이러한 충절인물들의 배출은 두 가문의 권위와 세력향상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이천서씨는 호남의 큰 인물들인 고경명, 박광옥, 나무춘 등을 사위로 받아들임으로써 이들 유력 성씨와의 교류가 성장에 한몫을 담당했을 것이다.
각 마을의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철야
철야라는 옛 지명은 이곳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어 제철업이 성행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질 뿐 더 이상의 자료는 발견되지 않아 그렇게 추정할 뿐이다.
수각
덕룡산이 뻗어내린 줄기에 위치한 수각은 옛부터 산수가 수려하고 주변의 경관이 좋았다. 옛날 수각정이라는 정자가 있어서 마을 이름을 수각이라 하였다.
유촌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이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데, 마을에 버드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등내
유촌과 마찬가지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이 마을 이름이 처음 나타난다. 옛날 영평현(남평현)의 별관이 있던 마을이라 하나 근거는 매우 불확실하다. 한편, 이 세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적 삶의 모습은 철야 동계에서 두드러진다. 봉황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마을답게 철야에는 역사유적이나 유물, 인물 등이 많았다. 현존하는 역사유적은 다음과 같다.
만호정(挽湖亭)
현재 유촌마을 입구에 위치한다. 고려중엽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져 올 뿐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매곡(梅谷) 서몽희(徐夢曦, 1543 ~ 1607)가 지은 현판문에 의하면 철야 한쪽에 외롭게 서 있던 것을 1601년(선조 34)에 현 위치로 본 모양 그대로 이건하고 쾌심정(快心亭)이란 정호를 남평의 별호인 영평을 인용하여 영평정(永平亭)이라 개칭하였는데 만호정으로 개칭한 연유와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건립이후 이 정자는 철야 대동계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현재는 주로 마을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철천사(哲川祠)
고려 병부상서 이천인 서린(徐鱗)을 봉향한 사우로서 등내마을에 위치한다.
용산사(龍山祠)
1675년에 창건하여 194년간을 유림이 향사해 오다가, 1946년에 덕룡산 난봉하에 부설하고 향북당(向北堂) 정준일(鄭遵一, 1547~1623)과 그의 아들인 초심당(草心堂) 정현(鄭晛, 1570~1616)부자의 임란당시 충절과 도학을 추모하기 위해 유림들이 향사했다.
이천서씨제각 (利川徐氏 祭閣) 원념제 (遠念齊)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며, 이천인(利川人) 송정(松亭) 서옥(徐沃)의 제실이며 속칭 래접제각(來蝶祭閣)이라고 불리운다.
용강사(龍岡詞)
용구(龍邱) 서봉령(徐鳳翎)(1622~1687), 동강(東崗) 조상우(趙相愚)를 모신 사우이다.
중봉단(中峰壇)
경암(敬庵) 서복기(徐復基)(1846~1906)선생의 학덕을 추모하여 후학들이 진수계를 조직하고 철야 등내 덕룡산하에 설단하고 중봉단이라 칭하며 매년 음력 3월 11일 유림에서 향사하고 있다.
효자 서치백실적비 (孝子 徐致백 實蹟碑)
1922년에 만호정 앞에 세운 비이다. 서치백(1860-1942)은 이천인 수롱 효주의 후며 기환의 아들로 철종 경신 2월 26일생이다. 생후 4,5개월에 양친을 여의고 강보에 쌓인 채 숙모에게서 자랐다. 한평생 웃음을 모르고 기쁨도 모른 채 의서를 공부하여 약방을 경영하면서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도왔다. 자기 회갑날 상복을 입고 다도면 마산리 녹동 뒷산에 있는 선친묘에서 3년 시묘를 한 효자로서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기리기 위하여 비를 세웠다.
열부해남 윤씨 정려 (烈婦海南 尹氏 旌閭)
진주 정명일의 처(1750~1771)이며, 결혼 5개월만에 남편상을 당하였는데 발인제를 지내느라 가족이 모두 그곳에 모인 때를 타서 결혼 때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고 목을 매어 따라 죽었다. 1783년에 정려를 배명하였다 한다.
진주정씨정열각(晉州鄭氏旌烈閣)
1972년에 세워진 것으로 진주정씨 문중에 시집와서 열부의 행적을 남긴 남평문씨와 파주염씨의 열행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유촌마을에 세웠다.
서장흠시혜비(徐章欽施惠碑)
1913년 철야입구 사거리에 세웠다. 서장흠(1868~1949)이 대지주로서 일제의 어려운 시기에 소작인들의 소작료를 감면해 줘서 소작인들이 세웠다.
동초정공철환기적비(東樵鄭公喆煥紀蹟碑)
1986년에 세워진 것으로 월천제 경휴의 아들로 태어나 정철환(1901~1981)은 고광선의 입문으로 학문과 문장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이에 후손과 유림들이 기념비건립위원회를 결성하여 건립하였다.
남천서선생강학비(南川徐先生講學碑)
남천 서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문인들이 1989년 7월 철야 만호정 앞에 세운 비다.
금하서공상록향토개발기적비(錦下徐公相錄鄕土開發記蹟碑)
1965년에 세웠다. 재일동포인 서상록이 마을의 발전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자, 그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철야동계에서 비를 세웠다.
청강선생서공우흠경모비(晴崗先生徐公于欽景慕碑)
1970년에 건립한 것으로 마을 입구에 위치한다. 학기의 아들로 태어난 서우흠(1863~1908)은 학문이 뛰어났는데 1946년에 문인들이 친목도모와 학통을 계승하기 위하여 계를 조직하여 이 계에서 비를 세웠다. 역사유적에 이어 이 철야마을에는 구전되는 전설은 ‘소금장수 이야기'와 ‘각시둠벙'이 있다.
소금장수 이야기
마을 뒷산인 덕룡산의 복치라는 명당터에 얽힌 전설이다. 옛날에 소금장수가 눈이 많이 오고 추운날, 다도로 소금을 팔러 갔다가 덕룡산에서 얼어 죽었다. 마침 이곳을 지나가던 나뭇꾼이 발견하고 묻어주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니, 한 곳만이 눈이 쌓여있지 않았다. 그곳에 소금장수를 묻었는데, 다음에 묘를 옮기려 할 때 풍수쟁이가 이를 보고, 그 곳이 명당이니 그대로 두라 했다고 한다.
각시둠벙 이야기
이 곳은 수각 마을 뒤에 있는 둠벙으로 깊이가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들어갈 정도다. 이 둠벙에 내려오는 전설은, 옛날에 한 각시가 재 너머로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가다가 가마가 이곳에 빠져 각시도 죽었는데, 그 후로 새 각시들이 이 둠벙을 지날때면 으레히 가마에서 내려 쌀 세 묶음을 둠벙가에 걸어두고 지났다 한다. 이후로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가리켜 ‘각시둠벙'이라 불렀다. 이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벼농사이며, 보리, 담배, 원예작물, 축산 등도 소득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자생조직은 1800년대에 설립된 동계가 있고, 현재 참여인원은 130명에 이른다. 한편 1966년에 마을발전을 위해 창립된 번영회는 1978년에 없어졌고, 1970년 창립된 청년회 또한 도시이농 현상으로 마을에 청년이 없어서 사라졌다.
등내마을의 기본현황은 총 인구 250명에 남자 120명, 여자 13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면적은 전0.04㎢, 답0.05㎢, 임야0.08㎢, 기타 0.03㎢로 총면적 0.16㎢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산업과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참깨와 수박을 재배하고 있다. 총 가구 52호 중 농가는44호, 비농가는 8호이며, 성씨로는 이천서씨 43호, 진주정씨 3호, 김해김씨 3호, 밀양박씨 3호가 있다. 유촌마을의 기본현황은 총인구 257명이며, 남자 125명, 여자 132명이며, 총면적은 0.51㎢으로 전 0.01㎢, 답 0.15㎢, 임야 0.04㎢, 기타 0.21㎢가 있다. 마을의 46호 가구중 농가는 42호, 비농가는 4호로, 주산물은 살과 보리재배이며,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다. 마을의 특작물로는 비육우가 있다. 성씨는 총 46호 중 이천서씨가 32호, 진주정씨가 7호, 김해김시가 6호, 밀양박씨가 1호이다.
선동마을
철천리 선동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의 세지면으로 가는 지방도로를 따라 2㎞정도 가다보면 좌측의 덕룡산 밑에 위치하고 있다. 주로 마을 앞에 평야가 발달되어 있는 선동마을은 옛날 큰 성이 위치하고 있어 거성동이라 하였다 한다. 선동의 옛 지명인 ‘거성동'(‘巨城洞)'이라는 이름이 처음 보이는 것은 1789년의 호구총수로 이 당시 선동은 현재의 행정구역인 철천리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다. 즉 유촌, 등내마을이 덕곡면에 속했던 반면, 선동은 봉황면의 남북 중심을 가로지르는 죽곡면에 속해 남평현의 관할 하에 있었다. 이러한 점은 수 백년을 이끌어 온 철야 동계와도 무관함을 보이고 있어 옛날 이 마을은 철야지역과 무관한 다른 생활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그러다가 1895년에 전국이 23부제로 바뀌면서 남평현이 군으로 됨에 따라 역시 거성이라는 지명으로 그 관할권에 들어갔다. 그 후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개편에 의해 죽곡면이 욱곡, 덕곡 등과 합쳐 봉황면이 되면서 나주군 관할이 되었다. 이 때 거성동은 선동마을로 그 명칭이 바뀌면서 철천리에 속하게 된다. 곧 이 당시의 개편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현재 확인된 바로는 16세기 말경에 김해김씨(金海金氏)와 제주양씨(濟州陽氏)가 처음 마을의 터를 이루었으며, 경주이씨(慶州李氏), 광산김씨(光山金氏) 등 여러 성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선동의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대체로 마을 주민의 상반된 견해에 의해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마을의 전체 지형이 배의 형국이라 ‘선동(船洞)'이라 했다는 것이며, 마을 입구에 40여년전까지만 해도 솟대가 있었는데 그것이 배의 돛대였다고 전하는 것이나, 선동을 큰 배로 보고 마을 앞의 논가운데 있는 조그만 야산을 작은배로 보는 점은 이같은 배의 형국 지명설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옛날 배가 선동마을 앞까지 들어와 선창가라는 의미에서 ‘선동(船洞)'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마을 앞에 있는 4기의 입석을 옛날 배를 메던 자리로 보는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양자가 모두 배와 관련이 되는 지명유래이지만, 확실한 기록이 없어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옛날 육로가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로 올라갈수록 바닷길과 연결되었을 선동마을이 발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동마을의 큰 자랑거리는 마을 앞을 지키고 있는 당산나무이다. 선동마을 사람들과 함께 기나긴 세월을 함께 해온 당산나무는 그 자태만으로도 위풍당당하여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여기에서 당산제를 모시고 있는데 정월 14일 오후 3~4시경에 지낸다. 당산나무는 마을 입구 정자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나무종은 귀목나무로 약 5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당산제의 제사 음식으로는 돼지머리, 떡(시루), 과일(삼실과), 술등이 올라가며, 지금은 농악놀이를 하지 않으나 예전에는 당산제 지내기 전에 농악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당산제를 지내는 목적은 마을에 해가 없고 마을사람들이 무고하며 마을의 평안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선동마을에는 입석이 있다. 예전에는 입석이 세 개가 있었는데 농지정리 후에 1개가 사라졌다. 마을 입구 왼쪽으로 나란히 두 개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중 오른쪽의 높이는 119m, 둘레는 163m이고, 왼쪽의 높이 51m, 둘레 53m에 해당된다.
마을에 남아있는 자생조직으로는 10여년전에 창립된 청년회가 친목을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현재 참여인원은 18명이다. 마을의 기본현황은 총인구 320명에 남자 170명, 여자 150명이며, 전0.04㎢, 답0.04㎢, 임야0.20㎢로 총 면적은 0.28㎢이다. 총 56가구중 농가는 53호가 비농가는 3호가 해당되며, 마을의 주산물은 쌀, 콩, 팥이 해당되며,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는 잎담배이다. 성씨로는 김해김씨가 30호, 제주양씨가 10호, 기타 16호가 살고 있다. 마을의 유적으로는 ‘철천리 칠불석상' 과 ‘철천리 입불석상' 이 있다.
총 147가구에 인구는 717명으로 남자가 351명, 여자가 366명이다. 대부분이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는데 봉황면내에서는 비교적 큰 촌락이다. 이들 마을중 수각은 진주정씨(晉州鄭氏), 등내는 이천서씨(利川徐氏), 선동은 김해김씨 (金海金氏)와 제주양씨(濟州陽氏)가 각각 주요 성씨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이 세 마을을 한마을로 인식하고 있으며, 실제 생활에서도 동일 문화권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 성격상 동일 생활권인 수각, 등내, 유촌마을을 한데 묶어 소개하고자 한다.
수각, 등내, 유촌 마을
철천리의 수각, 등내, 유촌은 옛날 철야현(鐵冶縣)의 소재지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이 마을이 철천리로 편제된 것은 일제시대의 일이므로 여기서는 먼저 '철야'의 변천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이곳 주민들이 첫째 ‘철천'보다 ‘철야'라는 이름에 더욱 정감을 가지고 있고, 둘째는 옛날 철야에 속해 있었던 각동리 마동, 내동, 수동, 창등, 철천리 유촌, 등내 등의 마을이 서로 관련되어 같은 연결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확인되는 이천서씨(利川徐氏)는 13세기 경에 이곳에서 처음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의 백제, 통일 신라, 고려 초기에도 다른 성씨나 주민들은 계속 살았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서씨 이전에는 반씨, 노씨, 양씨, 하씨, 방씨, 김씨 등이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료의 부족으로 정확한 추적을 못하고 있다. 다만 여기에서는 추적이 가능하며 현재도 주요 성씨로 자리잡고 있는 이천서씨(利川徐氏)와 진주정씨(晉州鄭氏)를 소개한다.
이천서씨(利川徐氏)
이천 서씨는 상서공파(尙書公派) 중조(中祖) 서린(徐鱗)(1222~1305)이 처음 각동리 내등에 정착하면서 철야에 터를 잡았다. 그는 고려조에 과거에 급제한 이래 병부상서에 까지 이르렀으나 간신 권함(權咸)의 모함을 받아 영평감무로 좌천되었다. 서린은 영평감무를 역임후 철야(現 각동리 내동)에 정착함으로써 이천서씨 상서공파의 입향조가 되었는데 그후 후손들이 등내에 이거함으로써 주세거지를 형성하였다.
진주정씨(晉州鄭氏)
16세기 중엽에 정종요(鄭宗堯)가 입향하였다. 하지만 그의 정확한 생존시기는 알 수 없다. 그는 함평군 월야면에서 살다가 각동리 내동 서인수 집에 취객으로 와 있었다. 이때 서인수는 아들이 없었는데 당시에는 양자법이 없어 대를 잇지 못하였다. 이에 정종요를 딸과 혼인시켜 양자로 삼아 진주정씨가 철야에 터를 잡게 되었다. 그 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진주정씨가 수각마을에 많이 이거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편 철천리 수각과 분리된 각동리 수각은 정종요의 후손들인 진주정씨가 많이 살고 있으며 철천리의 수각, 유촌, 등내 뿐만 아니라 각동리까지 넓은 분포를 보이면서 봉황의 대성으로 성장하였던 이천서씨와 진주정씨는 1592년 임진왜란 후에 더욱더 성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천서씨 문중에서는 서린의 9세손인 송촌(松村) 서정후(徐廷厚, 1565 ~1593)와 11세손인 심암(心菴) 서진문(徐振文, 1564 ~1593 )이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 들어가 큰 활약을 하다가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진주정씨(晉州鄭氏)는 정종요(鄭宗堯 )의 아들인 향북당(向北堂) 준일(遵一, 1547~1623)과 향북당의 아들 정현(1570~1660)이 의병장 고경명의 막하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이러한 충절인물들의 배출은 두 가문의 권위와 세력향상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이천서씨는 호남의 큰 인물들인 고경명, 박광옥, 나무춘 등을 사위로 받아들임으로써 이들 유력 성씨와의 교류가 성장에 한몫을 담당했을 것이다.
각 마을의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철야
철야라는 옛 지명은 이곳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어 제철업이 성행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질 뿐 더 이상의 자료는 발견되지 않아 그렇게 추정할 뿐이다.
수각
덕룡산이 뻗어내린 줄기에 위치한 수각은 옛부터 산수가 수려하고 주변의 경관이 좋았다. 옛날 수각정이라는 정자가 있어서 마을 이름을 수각이라 하였다.
유촌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이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데, 마을에 버드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등내
유촌과 마찬가지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이 마을 이름이 처음 나타난다. 옛날 영평현(남평현)의 별관이 있던 마을이라 하나 근거는 매우 불확실하다. 한편, 이 세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적 삶의 모습은 철야 동계에서 두드러진다. 봉황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마을답게 철야에는 역사유적이나 유물, 인물 등이 많았다. 현존하는 역사유적은 다음과 같다.
만호정(挽湖亭)
현재 유촌마을 입구에 위치한다. 고려중엽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져 올 뿐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매곡(梅谷) 서몽희(徐夢曦, 1543 ~ 1607)가 지은 현판문에 의하면 철야 한쪽에 외롭게 서 있던 것을 1601년(선조 34)에 현 위치로 본 모양 그대로 이건하고 쾌심정(快心亭)이란 정호를 남평의 별호인 영평을 인용하여 영평정(永平亭)이라 개칭하였는데 만호정으로 개칭한 연유와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건립이후 이 정자는 철야 대동계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현재는 주로 마을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철천사(哲川祠)
고려 병부상서 이천인 서린(徐鱗)을 봉향한 사우로서 등내마을에 위치한다.
용산사(龍山祠)
1675년에 창건하여 194년간을 유림이 향사해 오다가, 1946년에 덕룡산 난봉하에 부설하고 향북당(向北堂) 정준일(鄭遵一, 1547~1623)과 그의 아들인 초심당(草心堂) 정현(鄭晛, 1570~1616)부자의 임란당시 충절과 도학을 추모하기 위해 유림들이 향사했다.
이천서씨제각 (利川徐氏 祭閣) 원념제 (遠念齊)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며, 이천인(利川人) 송정(松亭) 서옥(徐沃)의 제실이며 속칭 래접제각(來蝶祭閣)이라고 불리운다.
용강사(龍岡詞)
용구(龍邱) 서봉령(徐鳳翎)(1622~1687), 동강(東崗) 조상우(趙相愚)를 모신 사우이다.
중봉단(中峰壇)
경암(敬庵) 서복기(徐復基)(1846~1906)선생의 학덕을 추모하여 후학들이 진수계를 조직하고 철야 등내 덕룡산하에 설단하고 중봉단이라 칭하며 매년 음력 3월 11일 유림에서 향사하고 있다.
효자 서치백실적비 (孝子 徐致백 實蹟碑)
1922년에 만호정 앞에 세운 비이다. 서치백(1860-1942)은 이천인 수롱 효주의 후며 기환의 아들로 철종 경신 2월 26일생이다. 생후 4,5개월에 양친을 여의고 강보에 쌓인 채 숙모에게서 자랐다. 한평생 웃음을 모르고 기쁨도 모른 채 의서를 공부하여 약방을 경영하면서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도왔다. 자기 회갑날 상복을 입고 다도면 마산리 녹동 뒷산에 있는 선친묘에서 3년 시묘를 한 효자로서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기리기 위하여 비를 세웠다.
열부해남 윤씨 정려 (烈婦海南 尹氏 旌閭)
진주 정명일의 처(1750~1771)이며, 결혼 5개월만에 남편상을 당하였는데 발인제를 지내느라 가족이 모두 그곳에 모인 때를 타서 결혼 때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고 목을 매어 따라 죽었다. 1783년에 정려를 배명하였다 한다.
진주정씨정열각(晉州鄭氏旌烈閣)
1972년에 세워진 것으로 진주정씨 문중에 시집와서 열부의 행적을 남긴 남평문씨와 파주염씨의 열행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유촌마을에 세웠다.
서장흠시혜비(徐章欽施惠碑)
1913년 철야입구 사거리에 세웠다. 서장흠(1868~1949)이 대지주로서 일제의 어려운 시기에 소작인들의 소작료를 감면해 줘서 소작인들이 세웠다.
동초정공철환기적비(東樵鄭公喆煥紀蹟碑)
1986년에 세워진 것으로 월천제 경휴의 아들로 태어나 정철환(1901~1981)은 고광선의 입문으로 학문과 문장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이에 후손과 유림들이 기념비건립위원회를 결성하여 건립하였다.
남천서선생강학비(南川徐先生講學碑)
남천 서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문인들이 1989년 7월 철야 만호정 앞에 세운 비다.
금하서공상록향토개발기적비(錦下徐公相錄鄕土開發記蹟碑)
1965년에 세웠다. 재일동포인 서상록이 마을의 발전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자, 그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철야동계에서 비를 세웠다.
청강선생서공우흠경모비(晴崗先生徐公于欽景慕碑)
1970년에 건립한 것으로 마을 입구에 위치한다. 학기의 아들로 태어난 서우흠(1863~1908)은 학문이 뛰어났는데 1946년에 문인들이 친목도모와 학통을 계승하기 위하여 계를 조직하여 이 계에서 비를 세웠다. 역사유적에 이어 이 철야마을에는 구전되는 전설은 ‘소금장수 이야기'와 ‘각시둠벙'이 있다.
소금장수 이야기
마을 뒷산인 덕룡산의 복치라는 명당터에 얽힌 전설이다. 옛날에 소금장수가 눈이 많이 오고 추운날, 다도로 소금을 팔러 갔다가 덕룡산에서 얼어 죽었다. 마침 이곳을 지나가던 나뭇꾼이 발견하고 묻어주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니, 한 곳만이 눈이 쌓여있지 않았다. 그곳에 소금장수를 묻었는데, 다음에 묘를 옮기려 할 때 풍수쟁이가 이를 보고, 그 곳이 명당이니 그대로 두라 했다고 한다.
각시둠벙 이야기
이 곳은 수각 마을 뒤에 있는 둠벙으로 깊이가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들어갈 정도다. 이 둠벙에 내려오는 전설은, 옛날에 한 각시가 재 너머로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가다가 가마가 이곳에 빠져 각시도 죽었는데, 그 후로 새 각시들이 이 둠벙을 지날때면 으레히 가마에서 내려 쌀 세 묶음을 둠벙가에 걸어두고 지났다 한다. 이후로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가리켜 ‘각시둠벙'이라 불렀다. 이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벼농사이며, 보리, 담배, 원예작물, 축산 등도 소득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자생조직은 1800년대에 설립된 동계가 있고, 현재 참여인원은 130명에 이른다. 한편 1966년에 마을발전을 위해 창립된 번영회는 1978년에 없어졌고, 1970년 창립된 청년회 또한 도시이농 현상으로 마을에 청년이 없어서 사라졌다.
등내마을의 기본현황은 총 인구 250명에 남자 120명, 여자 13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면적은 전0.04㎢, 답0.05㎢, 임야0.08㎢, 기타 0.03㎢로 총면적 0.16㎢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산업과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참깨와 수박을 재배하고 있다. 총 가구 52호 중 농가는44호, 비농가는 8호이며, 성씨로는 이천서씨 43호, 진주정씨 3호, 김해김씨 3호, 밀양박씨 3호가 있다. 유촌마을의 기본현황은 총인구 257명이며, 남자 125명, 여자 132명이며, 총면적은 0.51㎢으로 전 0.01㎢, 답 0.15㎢, 임야 0.04㎢, 기타 0.21㎢가 있다. 마을의 46호 가구중 농가는 42호, 비농가는 4호로, 주산물은 살과 보리재배이며,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다. 마을의 특작물로는 비육우가 있다. 성씨는 총 46호 중 이천서씨가 32호, 진주정씨가 7호, 김해김시가 6호, 밀양박씨가 1호이다.
선동마을
철천리 선동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의 세지면으로 가는 지방도로를 따라 2㎞정도 가다보면 좌측의 덕룡산 밑에 위치하고 있다. 주로 마을 앞에 평야가 발달되어 있는 선동마을은 옛날 큰 성이 위치하고 있어 거성동이라 하였다 한다. 선동의 옛 지명인 ‘거성동'(‘巨城洞)'이라는 이름이 처음 보이는 것은 1789년의 호구총수로 이 당시 선동은 현재의 행정구역인 철천리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다. 즉 유촌, 등내마을이 덕곡면에 속했던 반면, 선동은 봉황면의 남북 중심을 가로지르는 죽곡면에 속해 남평현의 관할 하에 있었다. 이러한 점은 수 백년을 이끌어 온 철야 동계와도 무관함을 보이고 있어 옛날 이 마을은 철야지역과 무관한 다른 생활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그러다가 1895년에 전국이 23부제로 바뀌면서 남평현이 군으로 됨에 따라 역시 거성이라는 지명으로 그 관할권에 들어갔다. 그 후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개편에 의해 죽곡면이 욱곡, 덕곡 등과 합쳐 봉황면이 되면서 나주군 관할이 되었다. 이 때 거성동은 선동마을로 그 명칭이 바뀌면서 철천리에 속하게 된다. 곧 이 당시의 개편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현재 확인된 바로는 16세기 말경에 김해김씨(金海金氏)와 제주양씨(濟州陽氏)가 처음 마을의 터를 이루었으며, 경주이씨(慶州李氏), 광산김씨(光山金氏) 등 여러 성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선동의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대체로 마을 주민의 상반된 견해에 의해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마을의 전체 지형이 배의 형국이라 ‘선동(船洞)'이라 했다는 것이며, 마을 입구에 40여년전까지만 해도 솟대가 있었는데 그것이 배의 돛대였다고 전하는 것이나, 선동을 큰 배로 보고 마을 앞의 논가운데 있는 조그만 야산을 작은배로 보는 점은 이같은 배의 형국 지명설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옛날 배가 선동마을 앞까지 들어와 선창가라는 의미에서 ‘선동(船洞)'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마을 앞에 있는 4기의 입석을 옛날 배를 메던 자리로 보는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양자가 모두 배와 관련이 되는 지명유래이지만, 확실한 기록이 없어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옛날 육로가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로 올라갈수록 바닷길과 연결되었을 선동마을이 발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동마을의 큰 자랑거리는 마을 앞을 지키고 있는 당산나무이다. 선동마을 사람들과 함께 기나긴 세월을 함께 해온 당산나무는 그 자태만으로도 위풍당당하여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여기에서 당산제를 모시고 있는데 정월 14일 오후 3~4시경에 지낸다. 당산나무는 마을 입구 정자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나무종은 귀목나무로 약 5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당산제의 제사 음식으로는 돼지머리, 떡(시루), 과일(삼실과), 술등이 올라가며, 지금은 농악놀이를 하지 않으나 예전에는 당산제 지내기 전에 농악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당산제를 지내는 목적은 마을에 해가 없고 마을사람들이 무고하며 마을의 평안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선동마을에는 입석이 있다. 예전에는 입석이 세 개가 있었는데 농지정리 후에 1개가 사라졌다. 마을 입구 왼쪽으로 나란히 두 개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중 오른쪽의 높이는 119m, 둘레는 163m이고, 왼쪽의 높이 51m, 둘레 53m에 해당된다.
마을에 남아있는 자생조직으로는 10여년전에 창립된 청년회가 친목을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현재 참여인원은 18명이다. 마을의 기본현황은 총인구 320명에 남자 170명, 여자 150명이며, 전0.04㎢, 답0.04㎢, 임야0.20㎢로 총 면적은 0.28㎢이다. 총 56가구중 농가는 53호가 비농가는 3호가 해당되며, 마을의 주산물은 쌀, 콩, 팥이 해당되며,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는 잎담배이다. 성씨로는 김해김씨가 30호, 제주양씨가 10호, 기타 16호가 살고 있다. 마을의 유적으로는 ‘철천리 칠불석상' 과 ‘철천리 입불석상'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