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관
금성관은 나주가 호남의 웅도로써 그 중심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역사유적이다.
금성산에 올라 나주 시내를 내려다보면 시내 한복판에 큰 기와지붕과 600년 수령의 큰 은행나무가 한눈에 들어온다. 금성관은 그 규모나 명성, 나주고을 한복판이라는 입지조건, 그리고 주변에 나주곰탕이라는 먹거리 집이 있어 관광객들에게는 ‘나주 답사 1번지’로 손색이 없다. 때문에 나주를 안내하는 해설사들도 방문객들을 늘 금성관 으로 먼저 안내한다. 금성관은 나주목에 있는 객사이다.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관사를 말한다.
해설사를 따라 객사 건물 뒷마당으로 돌아가 보면 수령이 600년이나 되는 우람한 은행나무가 무성한 잎을 피어 올리고 있다. 금성관은 근대에는 또 나주인 들의 항일정신을 대표하는 장소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천일 선생이 이곳에서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졌고, 명성황후가 시해되었을 때 빈소가 마련되어 나주인 들의 항일정신을 고조시킨 곳도 금성관이다. 금성관은 일제 강점기에 창호·마루등 내부를 개조하여 나주군청 청사로 사용되면서 원형이 크게 변형되었다. 그래서 1976~1977년까지 금성관을 완전해체한 뒤 거의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하는 작업이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