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읍성 고샅길 2천년의 시간여행 전통을 지키고, 잊지 않는다는 것
- 연애고샅길
- 남파고택
- 일제강점기 하수도길(중앙교)
연애고샅길
어딘들 인연이 머물다 가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이 길이 연애고샅길로 불린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길이 너무도 비좁아 이곳에서 마주치다보면 정이 들기 쉽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걸음을 멈추고 먼저 길을 양보해야 하는데 이때 주고받은 눈짓과 짧은 대화들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마음에도 특별한 감정이 자라고, 이로인해 여러 연인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옷깃을 한번 스치려면 전생에 500겁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는데 연애고샅길이라 불리기에 합당하다. 지금도 좋은 인연들이 스쳐지나거나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금성관 동쪽으로 뻗어있는 연애고샅길을 걸으며 나주의 유명한 사랑이야기를 떠올려 보는 것도 좋겠다. 고려 태조 왕건이 나주에 왔을 때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목이 말라 물을 청하니 여인은 급히 마셔 체할까 염려해 물에 버들잎을 띄워주었다. 이에 반해 왕건은 그녀에게 청혼하였다고 한다.
그 여인은 혜종을 낳은 장화왕후이다. 그들이 만난 완사천이 아직 나주 시청 앞에 왕후의 비와 함께 남아 있다.
팁솔청거리의 벽화에서 알아보는 나주 역사
‘솔청거리’라는 작은 골목에 그려진 벽화를 감상하면 천년 나주의 역사를 훑어볼 수 있다. 좁은 골목을 따라 역사 속으로 들어가보자.
남파고택
- 위치 : 전남 나주시 금성길 13 남파고택 박경중가옥
- 전화번호 : 061-332-6100
호남의 양반집이 궁금하다면 남파고택을 놓쳐서는 안 된다. 푸른 잔디와 풀, 나무의 조화가 아름다운 남파고택은 1884년에 초가로 지어지며 시작되었는데 1910년경에 4대조 박재규가 안채를 지으며 48평 규모를 갖추었다. 이는 전남의 단일건물 중 최대의 규모로 안채, 초당, 바깥사랑채, 아래채, 헛간채, 바깥사랑채, 문간채 등 7동으로 구성되었다. 이호남 재산가의 주거양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으며 중요민속자료 제263호로 지정되었다.
남파고택은 보통 일반적인 한옥과 다르게 관아 형태로 지어져 있는데 이는 장흥에서 군수로 지냈던 박재규 선생이 장흥 관아의 형태로 고택을 설계했기 때문이다. 남파고택은 오랫동안 지켜진 것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단아함이 느껴진다. 이 집의 부엌은 100년 전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여전히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핀다.
독특한 돌확도 눈에 띈다. 유난히 커다란 이 돌확은 대문을 해체하고 들어와야 했다. 집 터의 기가 세서 땅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염험한 금성산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돌확은 당시 측우기로 이용하여 농사피해를 줄이는 역할을 하였다. 지금은 아이들의 목욕통이자 김장철 수 백 포기의 배추를 씻는 등 여전히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강정숙 종부는 각종 개발의 위협으로부터 고택 전통의 가치를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2008년 12월 대한민국 문화유산상(대통령상)을 받았다.
집 만큼이나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도 함께 귀감이 되는 모습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 고택에는 일제강점기 11.3 전국항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된 ‘나주역 사건’의 주역 박준채가 살았고, 해방 후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을 위한 무료교육기관인 나주한별고등공민학교를 세워 나주 사회운동과 근대교육에 이바지하였던 박준삼 선생이 살았다. 집과 사람 모두 전통의 가치과 값진 정신으로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유산이 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하수도길(중앙교)
나주천의 중앙교는 일제강점기에 금성교에 이어 설치됐다. 조선시대 나주천에는 학교라는 다리 하나 뿐이었다. 중앙교 부근에는 조선인들이 주로 거주하였고, 금성교 부근은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번화가였다. 금성산에서 내려온 물길은 나주천을 통해 영산강으로 흐른다.
중앙교 근방에는 일제강점기 하수도길이 있다. 1920년대에 일제의 하수도 개수사업이 확산되며 나주에도 설치되었다. 당시 일제가 행한 하수도 사업은 일본인 거주지를 우선으로 하였다고 한다. 수탈의 흔적은 언제나 마음을 씁쓸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