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읍성 고샅길 2천년의 시간여행 꿋꿋이 살아온 징한 세월의 길을 기억한다
서부길은 조선시대 서부면 구역으로 향리들이 모여 살 던 성 안 동네를 둘러보는 도보 코스로 약 3km 정도이다.
- 금성관
- 정수루
- 징고샅길
금성관
- 위치 : 전라남도 나주시 금성관길8
- 전화번호 : 061-330-8114
천년고도 목사고을인 나주 시간여행의 시작은 금성관이다. 수백 년 전 나주를 방문하던 손님들이 그랬듯, 지금 우리도 이곳에 머물러 본다.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는 나주의 객사인 금성관은 여전히 웅장한 모습으로 손님들을 맞이한다. 외삼문인 망화루를 지나 수백 년의 이야기가 고여있는 금성관으로 들어가 보자.
조선시대 객사
금성관은 고려시대에는 나주로 출장오게 된 관리들이나 외국사신들이 머물다 가는 객사였고, 조선시대에는 지방궁궐을 뜻하는 ‘정청’의 역할도 맡게 되었다. 금성관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폐와 궐폐가 모셔져 있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를 올렸다. 금성관과 나란히 지어진 서익헌과 동익헌은 중앙관리들이 숙소로 사용하며 집무를 보았다.
1337년 창건된 금성관은 조선 성종(1495~1479) 때 나주목사로 부임했던 이유인에 의해 지금의 크고 웅장한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숱한 이야기들을 보고 들어왔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천일의 출병식이 있었고, 일제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관을 모셔 항일정신을 높이기도 했다. 두터운 시간의 공기가 쌓인 만큼 그 가치가 크다. 널찍한 마루에 앉아 잔잔히 흐르는 역사의 바람을 느껴보자. 벌써 600년이 넘게 금성관에서 지내온 은행나무가 여전히 고요하게 이곳과 세월을 함께하고 있다.
팁망화루를 나와 정수루로 향하기 전에 ‘의열각’을 만날 수 있다.
나주 동학농민군 접주 나동환과 부인 정씨의 의열을 기리기 위해서 세웠다. 나동환(1849-1937)은 1894년 5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나주성 공격에 참가했다. 전봉준이 체포된 후 동학농민군이 해산되자 함평군 월야면 연암리의 처가로 은신했고, 부인 정씨는 남편과 아들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킨 뒤 자신은 관군들에게 붙잡혀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의열각(義烈閣)에는 [나주나공동환의적비(羅州羅公東換義蹟碑)]와 [효열부진주정씨행적비(孝烈婦晋州鄭氏行蹟碑)]가 함께 세워져 있다.
정수루
- 위치 : 전남 나주시 금계동
- 전화번호 : 061-330-8114
나주관아의 정문인 이곳에서는 의관을 단정히 하여야 한다. 정수루 앞에는 왕을 상징하는 금성관이 자리하고 있으니 당시에는 어쩌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예의였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주목민들을 향한 마음도 담겨 있는 곳이다.
자연히 보게 되는 커다란 북은 나주목민들의 감출 수 없는 억울함과 한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북소리가 울려퍼지면 목사는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선정을 베풀고자 하였다.
정수루는 조선 선조 36년에 나주목사로 부임한 우복룡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고자 건립하였다고 한다. 2층에 있는 북은 학봉 김성일 나주목사에 의해 목민들과의 소통을 위해 설치되었다. 조선시대 이후에는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하지만 6`25전쟁 때 분실되어 1986년 다시 설치되었다. 정수루의 북에 매년 제야행사 때 나주에 울려퍼진다. 34명의 각계각층의 분야별 대표들이 34번 북을 울리는데 이 숫자는 나주시 관내 주요산악과 하천의 개수를 합한 것이다. 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주목을 울려온 따뜻한 목사의 정신과 마음은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다.
팁정수루 바로 옆 ‘나주시 관광 안내소’를 놓치지 말자.
관광안내소에서는 나주읍성 고샅길 서부길, 동부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매일 11, 13, 15, 17시 (하계 해당)에는 관광해설투어도 진행한다.
참말로 징하다 - 징고샅길
전라도 사람들이 가장 자주 쓰는 말 중 하나인 ‘징하다’는 ‘징그럽다’ 정도로 해석한다. 징고샅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징그럽게 길어서’ 라고도, 이 고샅길을 걷는 것이 ‘징그럽게도 힘들어서’ 라고도 한다. 우리의 역사 중 가장 힘들고도 힘들었던 일제강점기 시절, 수탈의 설움이 이 고샅길에도 진하게 남겨있기 때문이다.
이 길에서는 일본인들이 살았던 적산가옥의 흔적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일본관사가 있었고, 죽물주식회사, 잠사공장 등이 있었다. 곡창지대인 나주를 일본인들은 잠식했고, 그들이 웃으며 북적이던 이곳에서 나라를 잃은 우리민족은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힘겹게 삶을 버텨나가야 했다. 죽지 못해 살아야 했던 당시의 설움도 함께 담겨 있는 이 길에 대해 알고 나니 마냥 쉽게 지나쳐지지 않는다. 정말 징한 세월이었고, 여전히 서럽다.
이제는 사라진 옛 나주잠사는 나주 시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인 ‘나비센터’가 될 예정이다. 문화교육공간, 시민사랑방, 예술체험 및 시민문화상품 제작 공간 등이 들어서고 다양한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이 운영되어 나주 시민들과 새로운 모습으로 함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