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읍성 고샅길 2천년의 시간여행 전통이 현대를 만나 전진한다
- (구)나주역
- (구)화남산업과 나주곰탕
- 나주오일장
(구)나주역과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 위치: 전라남도 나주시 죽림길 20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의 일이다. 광주에서 출발한 통학 열차에서 내린 일본인 중학생 후쿠다, 스에요시 등이 집찰구로 걸어가던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생 박기옥, 이광춘, 암성금자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박기옥의 사촌동생인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 박준채가 분을 참지 못하고 후쿠다를 불러 따졌지만 후쿠다는 오히려 ‘센징’이라는 말을 내뱉어 박준채의 주먹에 얻어맞게 되었다. 이렇게 난투극은 시작되었는데 이를 제지하러 온 일본경찰은 한국인 학생들만 구타하고 검거하는 등 편파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박준채는 나주역 사건으로 퇴학당한 뒤 3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로 인해 광주의 학생들은 모두 일어나 궐기했고 다음달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학생들에게 붙은 항일운동의 불은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금세 전국으로 저항의 불길이 퍼졌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만세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3대 민족운동으로 꼽힌다. 박준채는 당시를 회상하며 ‘가뜩이나 그놈들과 한 차로 통학하는 것에도 민족감정으로 멸시와 혐오하며 지냈는데 우리 여학생, 더구나 나의 누님인 박기옥을 희롱하였으니 피가 머리로 역류하는 분노를 느꼈다’고 했다.
(구)나주역은 2001년 7월 이후 더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기차역으로 복원되어 당시의 이야기를 전한다. 2000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 위치: 전라남도 나주시 죽림동 60-173
- 홈페이지: www.najusim.or.kr
구 나주역 옆에는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2008년 7월 25일 개관한 이 기념관에 방문하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인 나주역의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있다. 관련 증인들의 인터뷰와 각종 자료들로 더욱 흥미롭게 접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1월 3일 학생의 날이다. 나주역 사건이 도화선이 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있던 날이 11월 3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강한 의지는 지금도 이어져온다. 4.19혁명에도 5.18민주화운동에서도 학생들은 불의에 저항하며 투쟁의 중심에 섰다. 학생들이 움직일 나라의 미래를 기대하게 된다.
(구)화남산업과 나주곰탕
일제강점기 일본인 다케나카 신타로는 1916년 제주를 통해 나주로 건너와 정착하며 일본군수용 통조림 시설인 다케나카 통조림공장을 세웠다. 군용 통조림에 들어갈 고기를 위해 한반도 전역에서 소들이 실려왔다. 하루 200~300여 마리가 도축되며 공장 주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공장에 노동자로 투입되었다.
태평양전쟁 때는 일본군 1200여 명이 상주해 밤낮으로 공장이 가동되었고, 하루에 400마리의 소가 도살될 정도로 큰전시국책사업장이었다. 해방 후에는 고종석 씨가 불하받아 ‘대동식품공업사’가 되어 나주 특산품인 황도복숭아 통조림을 만들었고, 월남전 때는 김치통조림을 만들어 월남에 간 우리 군인들을 위해 미국으로 수출하기도 하였다.
나주에서 가장 사랑받는 음식인 나주곰탕이 비롯된 것도 통조림 공장에 연유한다. 엄청난 양의 소를 잡았던 만큼 그 부산물도 엄청났는데 공장에서는 먹을 것도 부족해 힘들었던 주민들에게 노동의 대가로 소 부산물을 주었고, 나주오일장에서 곰탕을 끓여 팔며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나주곰탕의 맑고 뜨거운 국물은 우리 민족이 흘린 애환의 눈물과도 같을지 모른다.
남산공원
- 위치: 전라남도 나주시 남내동 2-23
남산공원은 나주 남산에 조성된 공원이다. 공원의 가장 높은 곳에는 최고정이라는 이름의 시멘트로 만들어진 팔각정이 있다. 예전에는 나무로 지어진 정자가 최고정이라는 이름으로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이 자리에 신사가 세워지기도 했다. 최고정에서 조금 아래에는 망화루가 있는데이는 금성관 정문의 것을 옮겨 온 것이다.
또한 남산공원에는 테니스장, 배드민턴장, 체력단련장 그리고 활터인 인덕정이 있고, 현충탑인 ‘거룩한 얼의 탑’과 의병장 김태원, 조정인 기념비가 있어 그들을 기리고 있다.
동점문
- 위치: 전라남도 나주시 중앙동 100-3
동점은 ‘나주천의 물이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서경’에 나오는 ‘동점우해(東漸于海)'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나주 사람의 정신이 작은 개울에서 시작되지만 큰 바다에 이른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름이 말하는 것처럼 동점문은 나주천이 영산강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고려시대 정도전이 ‘친명정책’을 주장하다 나주로 귀양올 때 동점문을 지났다고 한다. 일제에 의해 헐린 동점문은 2006년 복원되었는데 새로 지은 동점문의 현판 휘호는 도올 김용옥씨가 썼다.
나주오일장이 열리는 목사고을시장
- 위치: 전라남도 나주시 청동길 14
나주는 우리의 장이 시작한 곳이다. 나주는 영산강을 품은 평야 지대로 농산물은 물론 수산물도 풍부했고, 교통이 편리했기에 상업이 활발할 수 있었다. 오일마다 열리는 장시에는 전국에서 사람이 몰렸고 수많은 물건을 사고 팔고 교환했다. 오가는 사람들을 통해 먼 지방의 정보도 알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농촌계몽운동이 펼쳐진 곳도,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하던 곳도 시장이었고, 장날이었다. 오고 가고 모이는 것에는 물건뿐 아니라 마음도 있었다.
목사고을시장은 2012년 나주 오일장과 매일시장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2000년대 들어 나주의 옛 모습을 복원하기 시작하던 나주시는 노후화된 오일장인 성북시장과 금계매일시장을 통합해 현대화시키기로 결정하여 나주목사고을시장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나주목사고을시장은 토요문화장터, 토요야시장, 시장방문의 날 등이 추진되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또한 다양한 문화활동과 체험제공 등을 통해 시민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동점문 밖 석당간
- 위치: 전라남도 나주시 석당간길 60-6
동점문 북쪽에 높이 솟은 돌기둥이 있다. 보물 제49호인 ‘동점문 밖 석당간’이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면 당(幢)이라는 깃발을 다는데 깃발을 걸어두는 긴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지탱하는 양쪽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곳에 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주의 땅모양이 배와 닮아 풍수상 안정을 바라며 돛대 모양의 당간을 만들어 세운 것이라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