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읍성 고샅길 2천년의 시간여행 아물지 않는 상처의 흔적
동부길은 일제강점기에 개발된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약 5km로 2시간 소요되는 자전거 코스이다.
- (구)금남금융조합
- (구)나주잠사
- 금성교
금성관 정수루 인근에는 나주시 공공자전거가 설치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대여해 이용할 수 있다.
(구)금남금융조합
- 위치: 전라남도 나주시 나주로 143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악랄함은 고샅길 곳곳에 남겨져 있다. 현재 고조현외과라는 이름의 건물은 과거 금남금융조합이었다. 대한제국 때 설립된 농민들에게 농사 자금을 대출해주는 서민금융기관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그 성격이 달라지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농사자금을 대출해 주었지만 고리대금으로 조선인들의 피와 땀으로 자신들의 부를 축적했다.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은행들은 그렇게 우리 민족을 핍박하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해방 후에는 나주 읍사무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은 유럽건축양식을 흉내내며 건물을 지었는데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길을 걷다가도 일제강점기의 건물은 금방 구분해 낼 수 있다. 금남금융조합의 붉은 벽돌과 유럽풍 장식은 조선인들에게 커다란 공포로 다가갔을 것이다.
금남금융조합은 나주 오일장 초입에 위치하여 나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는 장소였다.
모두가 모이는 오일장날이었던 1930년 1월 27일, 나주학생시위대와 군중이 모여 ‘조선학생만세’를 외쳤다. 그 역사적인 현장에 서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싸늘히 얼어붙이는 겨울의 추위도 나주인들의 끓는 분노를 식힐 수는 없었을 것이다.
팁(구) 나주극장
(구)나주극장은 일제강점기에 영화를 상영하던 곳이다.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본정통과 가까이 열린 일본인들을 위한 문화시설이었다. 본정통과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일본인의 거리였다.
(구) 나주잠사
우리나라 비단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비단을 짜 옷감으로 사용하였고 일본에 비단 짜는 기술을 전파시키기도 하였다. 이곳 나주는 그 옛날 삼한시대 때부터 비단으로 유명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일본인 센가는 나주에 처음 나주잠사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조선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생산된 전량을 일본 군수산업 원료로 사용하였다.
영산강이 흐르는 나주평야에서는 풍부한 곡식이 자라고, 면화, 누에고치도 많이 생산되니 나주를 가지는 것은 말 그대로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일석이조’였을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1928년 나주 잠업의 실적은 전라남도에서 최고였다고 한다.
이렇듯 잠업의 중심지였던 나주였지만 해방 후 6.25 때 잠사공장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1954년 김용두씨에 의해 다시 나주잠사주식회사가 생기고, 잠업이 다시 성행하게 되었다. 일제의 지배로 수탈당하기만 했던 나주의 잠업을 이제는 우리 민족이 운영하고 우리 민족이 그 수익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일본으로 많은 수출도 하는 등의 쾌거를 올렸다. 하지만 1973년 오일쇼크와 도시 산업화로 1990년대에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지금의 허물어진 건물만 보고 너무 슬프게 생각하지만은 말자. 쓸쓸한 나주잠사는 문화예술교육공간인 ‘나비센터’로 되살아날 예정이다. ‘나비센터’는 시민대상으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교육을 통해 시민문화 커뮤니티 공간을 조성, 어린이부터 노년층까지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할 예정이라고 한다. 파란만장했던 나주잠사는 이제 더 행복할 나주를 위한 공간이 될 것이다.
금성교
나주천의 금성교는 우리나라에서 현재 사용되는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금성교는 고지도 등의 자료에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모습이 찍힌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에 있어 그 오랜 역사를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 초에 나주천의 남북을 잇는 새도로가 생기면서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목포와 광주를 잇는 이 다리를 통해 나주평야의 수탈된 생산물들이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실리게 되었다. 가장 오래된 시간을 보낸 다리인 만큼 그 역사적 가치를 두텁게 지니고 있다. 힘겨운 세월의 무게를 버티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금성교는 그 견고함과 아름다운 예술성 등이 인정되어 문화재청으로부터 원형이 보존되어야 한다고 하여 형상변경허가를 승인받지 못했다.
앞으로 더욱 오랫동안 나주의 역사와 함께 지켜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