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읍성 고샅길 2천년의 시간여행 고통을 견뎌 맞이한 오늘
- (구)나주경찰서
- 5.18민중항쟁과 무기고
- 전라우영터
(구)나주경찰서
- 위치: 전라남도 나주시 남고문로 65
순사는 악마였다. 1912년 조선태형령이 공포되고, 그들은 아무 때고 한국인을 잡아 3개월까지 감옥에 넣거나 하루 80대의 태형을 때릴 수 있었다. 대뜸 총검을 들고 집에 쳐들어와 딸들을 생사도 모르는 곳에 위안부로 보내기도 하였다. 그들은 시시때때로 트집을 잡아 한국인들을 잡아들였고, 호환마마보다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순사 온다’는 말은 죽음과 같은 공포를 느끼게 했다. 구 나주경찰서는 1910년 붉은 벽돌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일번 도로 앞에 지어졌다. 붉은색에 흰색으로 수직선을 강조해 위압감을 주었다. 이곳에서 수많은 민족운동가들이 피를 흘렸고, 목숨을 잃었다. 건물 안에는 여전히 유치장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악몽같은 일제강점기의 시간을 지낸 어르신들은 아직도 이 앞을 지나길 불편해 하신다고 한다.
우리의 한은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맺혀있다.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5.18 민중항쟁과 무기고
또한 나주경찰서는 5.18 민중항쟁 때 광주의 참상을 알게 된 나주 시민들이 무기를 확보한 곳이기도 하다. 나주시민들은 나주경찰서를 비롯해 영강 파출소, 예비군 대대본부 무기고를 열어 확보한 다량의 총과 수류탄으로 시민군을 지원하였다. 무기고의 무기를 수집할 수 있었기에 나주는 광주와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함께 할 수 있었다.
곳곳의 식당 주인들은 음식으로 이들을 지원하였다. 대한민국의 가장 아픈 역사 중 하나로 기억되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뒤늦게나마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팁가장 많이 이용되었다는 문이 남고문
- 전라남도 나주시 남내동 2-20
나주읍성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는 문이 남고문이다. 2층으로 된 문루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의 건물인 남고문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부숴졌지만 1993년 복원되며 옛 모습을 되찾았다. 남고문은 도로 중앙에 자리잡고 있어 서울의 숭례문을 떠올리게 한다. 옛날처럼 지금도 나주읍성의 4대문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고 있을 것이다. 남고문은 사적 제377호로 지정되었다.
전라우영터
- 위치: 전남 나주시 남외1길 16 나주초등학교
‘남문 밖 작은 산이 있었고 거기에 주검들이 쌓여 산을 이뤘다. 근방은 악취로 진동했고 땅은 사람 기름으로 하얗게 얼어붙었다.’ 동학농민군이 처형된 전라우영의 장면을 본 한 일본군 사병은 이렇게 묘사했다. 춥고 서글프다.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해진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녹두꽃 자지러지게피면 돌아올거나/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우리 봉준이/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안도현 ‘서울로 가는 전봉준’ 1연)
전봉준은 ‘사람이 곧 하늘인 세상’을 꿈꿨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그때는 가뭄이나 홍수로 척박하던 시기가 아닌 풍요롭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 풍요는 악랄한 대지주와 탐관오리 등의 부패한 통치자들의 것일 뿐이었다. 그 고통을 참을 수 없어 농민들은 호미와 괭이를 내던지고 죽창을 들었다. 목숨을 걸었지만 나주를 지키는 것이 왕조를 지키는 것이라 믿은 나주 목민들에 의해 그 결의는 무너지고 말았다.
동학농민군을 격퇴한 나주 수성군 지휘부도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인지 같은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을미년, 명성황후 시해와 함께 단발령이 내려지자 나주 의병이 일어났다. 그들은 단발령을 찬성하고 친일발언을 일삼던 안종수와 부패관리들을 처단했지만, 관군에 의해 의병 주동자인 정석진과 김창곤 등이 1년 전 농민군이 처형된 전라우영 무학당 뜰에서 참수되었다.
전라우영은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가 심했던 시절 잡혀온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나주성당에서 천주교 순교지의 기념유물로 전라우영터에서 나온 옛 주춧돌을 보관하고 있을 뿐 아무런 흔적이 없다. 천진한 초등학생들이 꿈꾸며 배우는 나주초등학교가 위치한 자리는 이렇듯 과거 참으로 슬픈 역사를 품은 곳이었다. 아이들은 과거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희망의 싹을 틔우며 내일로 나아간다.
팁군졸마을 고샅길 & 이광춘 여사 생가터
전라우영터 앞에는 조선시대 군졸들이 가까이 살기 위해 마을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영촌’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군졸마을 고샅길은 옛 돌담길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고샅길 곳곳에 군졸의 생활상을 담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도화점이 되었던 나주역 사건의 이광춘 여사 생가터가 군졸마을에 있다. 이광춘 여사는 학생석방을 요구하며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을 이끌었다. 연필도 들지 말고 한 글자도 쓰지 말자는 백지동맹은 광주학생운동 중에 가장 돋보인 여학생 항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