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읍성 고샅길 2천년의 시간여행 고고한 선비의 길을 따라 걷다
- 나주향교
- 사마재길
- 이로당과 소나무
나주향교
- 위치 : 전라남도 나주시 서내동 118
나주향교는 호남 최고의 학군으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조선시대 나주향교의 교수로 재임하던 박성건은 그가 가르치던 교생 10명이 동시에 사마시에 급제하자 감격한 마음을 금성별곡이라는 문학작품으로 남기며 나주 사대부의 긍지와 패기를 보였다.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향교 건물 중 최대의 규모와 건축양식으로 여전히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주향교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성종 6년 8월 전국 12목에 향교를 설치하면서 지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 태조 7년에 지금의 규모로 중수되었다. 대부분의 향교는 전학후묘로 되어 있지만, 나주향교는 서울의 성균관과 같이 전묘후학의 형태를 띤다. 제사공간인 대성전이 앞에 있고, 학문을 배우는 명륜당이 뒤에 있다. 그래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성균관을 복원할 때 나주향교를 참고하였다고 한다.
나주향교에는 독특한 점이 있는데 나주향교가 창건될 때 공자의 고향인 산둥지방에서 흙을 가져와 대성전의 벽에 발랐다고 한다. 이곳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지극한 정성과 마음이 느껴진다. 대성전은 보물 제 394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성전 뒤로 수업이 이루어지는 교실인 명륜당, 그리고 그 양쪽에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그 사이의 터에는 선이 커다랗게 둘러져 있다. 수업을 마친 유생들이 이 선을 돌며 배운 것을 복습하곤 했다고 한다. 조용히 읊조리며 한 발 한 발 신중히 내디뎠을 모습이 눈에 선해진다. 이곳에서 드라마 성균관스캔들이 촬영됐다고 하니 왠지 더 쉽게 상상이 된다.
여느 향교처럼 이곳에도 6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자리를 지켜온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향교의 은행나무는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하며 공자의 정신을 기리다고 한다. 또 벌레가 꼬이지 않는 은행나무처럼 유생들이 올바른 길을 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심는다고도 한다. 공자처럼, 또 은행나무처럼 유생들이 올곧은 선비가 되려 노력했기에 나주향교가 지금껏 그 가치를 높게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마재길
사마시는 생원진사시라고도 불리는데 생원시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를, 진사시는 문학적 능력을 측정한다. 이 시험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하던 곳을 사마재라고 불렀다. 전라도의 ‘라’가 나주의 첫글자에서 따온 것이 보여주듯 호남의 대표 고을이었기에 나주목의 사마재는 그 규모가 상당히 컸다고 한다. 나주의 사마재는 1879년 목사 백낙연이 창건하였다.
생원이나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관직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최종목표를 생원, 진사 그 자체에 두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알려진다.
이것은 선비로서의 소양을 검증받으며 가문의 영예를 위한 목적이 훨씬 컸다는 것을 뜻한다. 조선시대 당시 가문이나 지역의 위상을 이야기할 때 얼마나 많은 생원 혹은 진사를 배출해 냈는가를 가장 먼저 따졌다고 하니 사마재의 선비들의 위신이 어느 정도였을지 이해가 간다.
향교와 사마재를 생각하다보면 이 길의 분위기가 달라짐이 느껴진다. 장소마다 성격이 다르고, 어느 곳에 있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씩 달라지듯 이곳에 흐르는 공기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이 길을 걸으며 사마재로 향했을 생원, 진사들을 상상하다 보니 힘겹던 수험생 시절 서로를 격려했던 친구들이 생각난다. 좋은 길동무가 있으면 먼 여정이라도 더 짧게 느껴진다고 하는데, 그들도 길고 긴 학문의 길에 서로 힘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팁사마재길을 따라 걷다 보면 ‘둑제사길’을 마주하게 된다.
둑제사 고샅길은 나주읍성 서성문에서 관아로 이어지는 길로 둑신을 모시던 둑제당이 있던 곳이다. 제를 올리며 전쟁이 일어나질 않길 빌었고, 전쟁시에는 승리하길 기원했던 곳으로 1930년경 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로당과 소나무
길가에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소나무 하나가 몸을 내밀고 있다. 소나무의 뿌리가 내려앉은 곳이 바로 이로당이다. 이로당은 1925년 창설된 나주노인회의 본거지이지만, 과거에는 나주목의 육방관속의 우두머리인 호장과 호방이 사무를 보던 주사청이 있었다. 원래의 주사청은 지금보다 더 넓었지만 새도로가 생기면서 주사청의 부지가 도로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문 옆의 소나무가 원래는 마당 한가운데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해보게 된다. 이곳에는 나주향토문화유산 1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나주 향리와 관련된 고문서들이 있다. 1940년 나주읍사무소의 천장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21점의 고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을 이로당으로 옮겨 온 것이다. 이로당은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이 자료들 뿐 아니라 나주노인회와 관련된 근현대 자료들도 함께 보관하고 있다.
범상치 않게 솟아있는 소나무는 400년 수령의 해송이다. 몸을 뒤틀며 승천하는 용과 같다고 해서 주민들에게 용나무라고도 불린다. 오랜 세월동안 할머니의 할머니,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도 지켜보았을 소나무를 이곳의 사람들은 소중히 여긴다. 1998년 8월에 나주시의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이 침묵의 나무는 앞으로 더 많은 비밀과 사연을 지켜보며 이곳의 상징이 될 것이다.
팁향교길에서 만나는 역사를 간직한 곳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