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읍성 고샅길 2천년의 시간여행 옳은 길을 향한 걸음을 내딛는다
- 나주목 문화관
- 목사내아 금학헌
- 예수재림교회
- 최부와 양 부자 집터
나주목 문화관
- 위치 : 전남 나주시 금성관길 15 나주목 문화관
- 전화번호 : 061-332-5432
나주목을 말할 때 ‘목’이란, 고려 조선시대의 행정단위 중 하나인데 지금의 시, 군과 비슷하다. 나주는 전남에서 유일하게 목으로 지정된 곳으로 그 중요성을 잘 알 수 있도록 정리해 둔 장소가 바로‘나주목 문화관’이다.
나주의 역사를 한눈에
이곳에서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나주읍성의 모형을 볼 수 있어 당시의 환경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천년목사고을 나주의 역사를 안다면 나주여행이 더욱 뜻깊을 것이다.
목사내아 금학헌
- 위치 : 전남 나주시 금성관길 13-10
- 홈페이지 : moksanaea.naju.go.kr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학처럼 고고하게 살고자 하는 선비의 지조가 깃든 집’. 바로 금학헌이다. 지조를 잊지 않아야한다는 이름까지 붙은 이 집에 살던 사람은 나주목사였다. 목사는 동헌에서 집무를 보고 내아인 금학헌에서 생활하였다.
당시 선비들은 지조와 절개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겼다고 하니 부임한 목사의 안채로 아주 적합한 이름이라 느껴진다.
금학헌이 언제 지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19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추측되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나주군수의 관사로 사용하며 원래의 형태와 많이 변하게 되었으나 최근 해체 복원 작업을 통해 조선시대 관아 건축의 원형을 되찾아 관아건축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는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 132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는 상징적인 나무가 한 그루 있다. 벼락을 맞고도 500년 동안 그 몸을 꼿꼿하게 세우며 살아 있는 팽나무가 금학헌의 고고한 선비정신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이 특별한 나무는 영험함이 있어 소원을 들어주기도 한다니 마주하게 된다면 잊지말고 소원을 빌어보자.
금학헌은 현재 나주를 찾는 관광객들을 위한 전통체험공간이 되었다. 천년 나주목의 역사 속에서 390여 명의 목사가 지나갔는데 그 중 지금까지도 존경받으며 회자되는 두 사람이 있다. 나주목민들이 상소를 올려 나주로 두 번이나 부임하게 했던 유석증목사와 정수루에 북을 놓아 목민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던 김성일목사가 그 주인공인데 금학헌에는 그들의 이름을 딴 방이 마련되어 있다. 정신과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특별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듯 하다.
예수재림교회
- 위치 : 전남 나주시 금계동 47
- 전화번호 : 061-332-4091
1904년, 하와이로 이민가려던 손흥조는 일본 고베 항에서 일본인 전도사 쿠니야 히데에게 전도를 받으면서 최초의 한국인 재림신자가 되었다. 수속을 마치지 못한 그는 귀국 길에 독립운동가 임기반을 만나 그에게 전도하였다. 그렇게 이 두 사람으로부터 한국의 예수재림교회가 시작하게 되었다.
호남지방에서 가장 먼저 재림교회가 지어진 곳이 나주이다. 이근억, 김석영 두 전도사에 의해 나주에는 복음이 전파되었고, 재림교회는 근대교육도 실시하였다. [나주독립운동사]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1920년 가을 제칠일안식일교회가 전도를 목적으로 북문통에 천막을 치고 전도 강연을 시작했으며 200여 명으로 교인이 증가하자 교인의 자녀교육을 목적으로 미국인 오벽 목사가 2년제의 금명학원을 설립했다.
1922년 나주 유지들의 의연금 1600여 원으로 교실을 새로 건축, 4월에는 본량의숙을 개학했다.” 라고 적혀있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나주의 예수재림교회는 어렵던 시절, 종교가 가진 역할로의 순기능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나라를 잃고 변해버린 세상에 맞서기 위해서는 배움이 무엇보다도 필요했다. 1943년, 한국재림교회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으나 해방된 후 재건하여 구호활동, 복지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최부와 양 부자 집터
동방의 마르코폴로라 불리며, 동방견문록과 비견되는 표해록을 남긴 조선의 선비, 최부가 이곳에 살았다. 최부가 쓴 표해록은 세계적으로 여러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어오고 있고, 최부가 상륙했던 중국의 싼먼현에는 최부를 기리는 기념관과 공원이 조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최부가 얼마나 대단한 문인이었는지 감히 짐작해 보게 한다.
지금은 이화아파트가 지어져 있는 이곳에 돌아오기 위해 과거 최부는 6개월 동안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1488년 정월에 부임지 제주도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인 나주로 향했지만 풍랑을 만나 표류하면서 갖은 고초를 겪게된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조선 선비로서의 자긍심과 지조를 잃지 않고 당당한 태도와 지혜로 위기를 극복한다. 6개월만에 돌아와 임금의 명을 받아 뛰어난 통찰력으로 표해록을 작성하였지만 당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임금의 명이라도 부모 상중에 일기를 쓰고 있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표해록은 세계 3대 중국기행문으로 손꼽히며 세계에서 주목하는 문화유산이 되었지만 당시의 최부를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다. 최부가 살던 집터에 그 후 양동호라는 부자가 살았다고 하여 이곳은 ‘최부와 양 부자의 터’라고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