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나대용 장군에 대한 평가
- 작성일
- 2022.11.29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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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70회 나대용 장군에 대한 평가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각종 백과사전과 이순신 관련 전시관에는 나대용 장군이 소개되어 있다.
먼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다.
“나대용(羅大用) 과학기술인물,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해전 ·명량해전 등과 관련된 무신.
본관은 금성(錦城). 자는 시망(時望), 호는 체암(遞菴). 나주 출신.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여 한동안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를 지냈다. 1591년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막하에 군관으로 들어가 거북선 건조에 참여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의 막하로 참전하여 여러 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1592년 옥포해전에서 유군장(遊軍將)을 맡아 적의 대선(大船) 2척을 격파하고, 사천해전에서는 분전 끝에 총탄을 맞아 전상을 입고 한산도해전에서도 재차 부상을 당하였다.1) 그 뒤 정유재란 때의 명량해전과 1598년의 노량해전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그와 같은 전공으로 1594년 강진현감으로 임명되고 연달아 금구·능성·고성의 현감을 역임하고, 전후에는 창선(鎗船)을 고안하여 만들었다. 1610년(광해군 2)에는 남해현령에 제수되어 해추선(海鰌船)이라는 쾌속선을 고안하여 건조하고, 1611년에는 경기수군을 관할하는 교동수사(喬桐水使)에 제수되었으나 전상이 도져 부임하지 못하고 1612년 1월 29일에 죽었다. 그는 전공이 혁혁하고 파란이 많은 수군장이며,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조선기술자(造船技術者)로 평가된다.”
다음은 두산백과이다.
“나대용(羅大用)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했던 수군 장수로
임진왜란 이후에 창선, 해추선 등의 전선을 개발했다.
본관은 금성, 자는 시망, 호는 체암이다. 전라도 나주 출신으로 1583년(선조 16년) 훈련원 별시에 병과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 등을 지냈으며, 1591년(선조 24) 전라좌수영의 군관이 되었다. 1606년(선조 39) 나대용이 조정에 올린 상소에는 별시에 급제한 뒤에 6년은 북쪽을 방어하고 7년은 남쪽을 방어하는데 복무했으며, 1591년에는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에서 감조전선출납군병군관(監造戰船出納軍兵軍官)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대용이 임진왜란 이후에 창선(鎗船)·해추선(海鰌船) 등의 전선(戰船)을 개발했던 것에 근거해 이 시기에 그가 전선제작을 감독하는 군관으로 있으면서 거북선[龜船]을 개발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에서는 나대용이 거북선의 설계와 제작을 주도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는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5월 28일(음력 4월 18일) 좌수영의 5개 진포(鎭浦) 가운데 하나인 발포의 임시 지휘관인 가장(假將)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옥포해전과 사천해전에서는 보조병력인 유군(遊軍)을 이끄는 유군장(遊軍將)으로 활약했으며, 2) 사천해전에서는 7월 8일(음력 5월 29일) 왜군의 총탄에 맞아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 뒤로도 당항포해전 등의 전투에 잇달아 참전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나대용에 대해 1594년 4월 3일(음력 2월 13일) 이순신의 말을 전하러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에게 갔다는 내용까지만 기록되어 있다.
1594년(선조 27) 강진현감으로 임명된 나대용은 금구현령을 거쳐 1599년(선조 33)에는 능성현령을 지냈다. 그 해에는 전라순찰사 한효순의 군관이 되어 전선 25척의 건조를 감독하는 감조(監造)를 맡기도 했다. 당시 조선 수군은 배에 태울 격군(格軍)을 확보하지 못해 전선의 수를 늘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나대용은 125명 정도의 인원이 필요한 판옥선이나 거북선과는 달리 42명의 격군만으로도 운항할 수 있는 창선을 개발했다.
고성현령으로 있던 중 1601년(선조 34)에 모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고, 잇달아 부친상도 당하면서 6년 동안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러다 1606년(선조 39) 삼도통제사 이운룡을 통해 조정에 창선의 건조를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고,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여 창선을 시험적으로 건조하기로 하면서 조선차관(造船差官)으로 임명되었다.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이 즉위한 뒤에는 곤양군수를 거쳐 남해현령)으로 임명되었고, 쾌속선인 해추선(海鰍船)을 개발했다. 이러한 공으로 1611년(광해군 3) 비변사 낭청(郎廳)인 최현의 장계로 다대포 첨사 정사서와 함께 당상관(堂上官)으로 제수되었다. 당시 사헌부는 이들에게 당상관의 직위가 주어지는 것에 집요하게 반대했으나 광해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대용은 1612년에 죽었으며, 고향인 전남 나주시 문평면에 묻혔다. 오늘날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에 보존되어 있는 그의 생가와 무덤은 전라남도기념물 26호로 지정되어 있다. 1978년에는 생가 인근에 그를 기리는 소충사(昭忠祠)라는 사당이 세워졌다.”
이어서 아산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의 나대용 안내문을 읽어보자.
“ 나대용(羅大用, 1556~1612) 거북선 건조 책임관
1591년에 나대용은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병선 연구에 힘썼는데 특히 거북선을 건조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1592년 옥포해전에서 유군장을 맡아 적의 대선 두 척을 격파하고, 사천해전과 한산해전에서 각각 분전하여 부상을 당하였다. 1) 1597년 명량해전과 1598년 노량해전에도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
서울시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지하에 있는‘충무공 이야기’전시관의 나대용 게시물도 살펴보자.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1년 전인 1591년(선조 24년) 나대용은 장차 왜구가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을 찾아가 국방에 대한 대비책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그에게 뛰어난 재주가 있음을 알고 조선(造船) 담당 장교로 임명하여 거북선을 건조하도록 하였다.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임진왜란 후에도 새 전투함인 창선(槍船)을 창안하여 건조하였다. 남해현령으로 있을 때에는 쾌속정인 해추선(海鰌船)을 발명하기도 했다.”
1975년 4월에 이은상은 ‘체암 나대용 장군 기적비문’에 “(...)장군은 실로 충무공의 직속부하요, 동지요 거북선 제작의 최고 공로자이며 구국분전한 용장이요 기술자라 장군의 위대한 역사적 공적을 찬양하고 기념하고 숭앙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으로서 자랑스런 일이거니와(...)”라고 적었고, 1984년에 4월에 전상운은 ‘소충사 묘정비문’에 “실로 장군은 충무공의 동지로 거북선 제작의 과학적인 기술자이며 구국분전한 용장이라.”고 적었다.
한편 2022년 11월 18일 나주에서 개최된‘임진왜란과 거북선, 나대용 구국정신의 재조명 학술대회’에서 제장명은 나대용의 임진왜란 시기 활동이 주는 역사적 의미를 다음 3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무엇보다 임진왜란 초기 해전 승리에 크게 기여한 거북선을 직접 감독하여 건조한 전문가라는 점이다. 거북선의 위력은 추후 명 지원군의 수뇌부에도 알려졌다. 1593년 6월 명나라 경략 송응창은 명 병부에 올린 게첩에서 “전라도 등의 수병과 거북선을 조발하여 바다를 포위하게 하니, 왜노는 쥐 죽은 듯이 지키기만 하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라고 하면서 거북선을 조선 수군이 보유한 가장 뛰어난 군선으로 언급했다.
거북선은 당대에는 이순신이 창제한 것으로 인식되었으나 이후 나대용이 직접 감독한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나대용의 위상은 크게 향상되었다.
둘째, 나대용은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운 점도 높게 평가할 수 있다. 나대용은 발포가장으로 제1차 출전하여 첫 전투인 옥포해전에서 유군장으로 참가하여 일본군선 중 대선 2척을 분멸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사천해전에서는 이순신이 탄 대장선에 함께 승선하여 전투를 벌이다가 이순신과 함께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이와 같이 나대용은 임진왜란 초기에는 이순신의 군관으로서 각종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있을 때는 이순신의 주요 임무를 맡아 전달하는 역할도 하면서 이순신의 수군 지휘활동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임무도 수행하였다. 명나라와의 외교 문제에 관한 중요한 업무도 나대용을 통해 이순신의 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강화교섭기에 나대용은 복병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가지고 견내량을 최전방에서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 후 강진현감이라는 고을 수령직을 수행하면서 수군 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이처럼 나대용은 기존 거북선 건조자라는 인식 외에 전투 임무도 잘 수행한 인물이라는 점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셋째, 나대용은 혁신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로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특수군선 건조의 전문가로서 수군 발전에 기여한 면이 크다.
나대용은 1599년에 전라도 순찰사 한효순의 군관으로 근무하면서 특수군선인 창선 25척을 건조하였다. 그 후 1607년 다시 복직하여 창선제도를 부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상부에서는 기존의 인식을 고집함으로써 나대용의 혁신적인 제안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1611년 남해현령으로 근무하면서 새로운 군선인 해추선을 3척 건조하였다. 나대용은 이 공로로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에 진급하였다.
이와 같이 나대용은 창의 개척 정신으로 군선 건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본인의 자발적인 의지로 군선을 건조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는 한국수군사에 한 획을 긋는 의미 있는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제장명, 나대용의 임란 시기 활동과 역사적 의미, 호남사학회·(사)체암 나대용장군 기념사업회, 임진왜란과 거북선, 나대용 구국정신의 재조명학술대회, 2022, p 39-42)
필자는 3가지 측면에서 나대용 장군을 평가한다.
첫째, 유비무환 정신이다. 나대용은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1591년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찾아가 감조전선출납군병군관(監造戰船出納軍兵軍官)이 되어 전선 건조 감독과 수군 출납 업무를 수행했고 특히 거북선 건조자가 되었다.
둘째, 창의과학 정신이다. 나대용은 세계 7대 군함인 거북선 3)의 건조자일뿐만 아니라, 1599년에 창선(鎗船) 25척 1611년에 해추선(海鰌船) 3척을 건조한 조선(造船) 과학자였다. 2015년부터 해군이 해군학술상을 '나대용상(賞)'으로 이름 지은 것은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국방일보, 2016. 1. 11)
셋째, 구국정신이다. 나대용은 용장(勇將)으로 옥포해전·사천과 당포·한산해전 등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1594년 8월부터 1596년 10월까지 강진현감을 하였다. 이어서 나대용은 명량해전·노량해전 등에 참전하여 나라를 구하여 임진왜란 해전사에 족적을 남겼다.
주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기념관에는 나대용이 한산해전에서 부상을 입었다고 되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나대용이 한산해전에서 부상당했다는 사료는 아예 없다.
주2) 두산백과에는 나대용이 사천해전에서도 유군장을 했다고 기술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사천 해전때는 이순신의 군관으로 지휘선을 탔다.
주3) 2016년 4월에 미국 해군연구소(USNI)는 세계 역사상 가장 훌륭한 군함 7개를 선정했는데 거북선이 그 중 하나로 뽑혔다. 다른 6개의 전함(세계 최초 원자력 잠수함 USS노틸러스 등)은 모두 1900년대 이후에 제작된 것이지만, 거북선만 1592년에 제작되어 가장 오래된 군함 자리를 차지했다. (2016.4.16. 서울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