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보론:거북선 창제와 나대용
- 작성일
- 2022.11.29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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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69회 보론:거북선 창제와 나대용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1592년 4월 12일에 총통 사격을 마쳤다. 그러면 거북선은 누가 창제 아이디어를 냈고, 누가 건조하였나?
지금까지 여러 사료들은 이순신이 거북선을 별제(別制)하거나 창작(創作)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순신은 6월 14일 ‘제2차 당포, 당항포 등 4곳에서 승첩을 아뢰는 장계(당포파왜병장 唐浦破倭兵狀)’에서 거북선에 대하여 보고하였다.(이순신 지음·조성도 역, 임진장초, p 47)
“신이 일찍이 섬 오랑캐가 침노할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귀선을 만들었습니다.(別制龜船) (후략) ”
이후 1604년에 이순신이 선무공신 1등에 책훈된 ‘책선무원훈교서’에는 ‘창위귀선(創爲龜船)’으로, 이순신의 조카 이분의 ‘이충무공 행록’에는 ‘창작전선’으로, 1607년 류성룡의 ‘징비록’에는 ‘창조귀선’, 1657년에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에는 ‘자의조함’으로 기록되어 이순신이 창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1592년 5월 1일 자 ‘선조수정실록’을 살펴보자
“(...) 이에 앞서 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先是, 舜臣大修戰備, 自以意造龜船)(...)”
그런데 1800년에 안병원은 ‘행장’에서 ‘거북선 3척을 찬조하였다’고 적었고며(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2015, p 93), 1800년에 후손 나찬현은 ‘행록’에서 ‘거북선은 충무공(이순신)과 우리 선조(나대용)의 지혜로 창안되었다’고 적었으며 (위 책, p 113) 1859년에 후손 나병상은 ‘기행’에서 ‘이순신과 함께 계획을 결정하였다.’고 적었다. ( 위 책 , p 88)
또한 1958년 11월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최영희는 거북선을 실제로 설계하고 건조한 선박기술자는 나대용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구선고’에서 “거북선이 이순신의 창안(創案)에 의하여 건조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구선이 이순신의 창안에 의한 것이라 하여도 기술참모가 있어야 되었을 것이다. 이 역할을 한 사람이 나대용이다. 『이충무공전서』에 인용된 『나주목지(羅州牧誌)』에는 ‘나대용이 현령으로 있을 때 임진란을 당하자 이순신을 따라 거북선 3척을 꾸몄다. (粧龜船三隻)’고 수록되어 있고 (판옥선을 거북선으로 꾸민(改粧) 것이다.), 1606년 12월 24일의 선조실록에 실린 나대용의 상소를 보아도 거북선 건조의 기술담당자가 나대용임을 단언할 수 있다. ”고 주장했다.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2015, p 293-300)
김병륜은 2022년 11월의 ‘나대용과 임진왜란 시기 거북선’ 논문에서 “이순신이 거북선을 창조했다거나 혹은 그와 비슷한 취지로 설명하는 공신책록 교서 및 시장, 그리고 이분·유성룡·이항복의 1600년대 초반 기록과 나대용이 이순신과 함께 협의하여 거북선 건조를 도왔다는 나대용 문중기록을 조합해 본다면 나대용이 단독으로 거북선을 창안했다기보다는 나대용은 이순신과 협의하여 거북선 건조를 실행하고 구체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김병륜, 나대용과 이진왜란 시기 거북선, 호남사학회·(사)체암 나대용장군 기념사업회, 임진왜란과 거북선, 나대용 구국정신의 재조명학술대회, 2022, p 80)
한편 김성한과 윤영수는 거북선 창제 아이디어를 낸 이는 이순신이고 건조한 이는 전선감조군관 (선박기술자) 나대용으로 보았다.
김성한은 1985년 12월 29일자 동아일보에서 이순신과 나대용이 협력하여 거북선을 만든 과정을 이렇게 적었다. 1)
“1592년 4월 12일 거북선이라는 이름으로 인류의 역사에 처음으로 철갑선이 정식으로 등장한 날이었다. ... 나대용은 나주 출신으로 전라좌수영의 전선 감조군관이었다. 머리가 비상한 사람으로 배에 관하여는 남다른 기술의 소유자였다. 이순신은 어느 날 그를 불러 놓고 허름한 문서를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태종 대왕때의 거북선에 관한 글이요. 좀이 먹고 떨어진 대목도 적지 않아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요. 그런대로 이걸 읽어보고 비슷하게라도 거북선의 그림 한 장 그릴 수 없겠소?’... 나대용은 여러 날을 두고 다 떨어진 문서를 검토한 끝에 그림 뿐만 아니라 설계도면까지 만들어 바쳤다. ... 나대용을 중심으로 거북선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 ‘자네 수고가 많았네’동헌 마당에서 베푼 연회에 이순신은 나대용에게 손수 술잔을 따라 주며 옆에 찼던 장검을 끌러 주었다. (...)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p 293-300)
윤영수는 이순신이 거북선 관련 기록(태종실록)을 선박기술자 나대용에게 내보였을 때 나대용은 200년전 조상들이 만들었다면 지금 우리가 못 만들리 없다면서, 단 한번에 완성할 수 없으니 실패하더라도 용인해 달라고 하였다. 이순신은 이를 약조하면서 나대용에게 거북선 건조의 전권을 맡겼고, 나대용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전인 1592년 4월12일에 성공리에 화포 시험을 마쳤다. (윤영수, 거북선 타고 장군의 바다로- 이순신, 거북선 그리고 사천해전, 사천문화재단, 2021, p 142-151)
그런데 1974년 12월 15일 자 조선일보는 나대용이 거북선을 창제하였다는 김영원 교수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조선대학교 국사연구원장 김영원 교수는 작년 10월부터 1년 동안 나대용 장군에 대한 각종 문헌과 구비 전설을 토대로 조사연구해 온 결과, 나대용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여년 전부터 거북선 연구에 착수, 마을 앞 저수지에서 진수 실험까지 끝내고 임란 1년전인 1591년에 충무공을 찾아가 설계도를 제출하고 제작을 협의, 1592년 4월 11일에 거북선 3척을 진수시켰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김 교수는 호남동순록(湖南同殉錄) 기록에 의하면 ‘ 28세 되던 1575년 무과인 병과에 합격,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다 8년후 고향에 낙향한 나장군은 거북선 제작에 착수했다. 집 뒤뜰에 있는 초당(草堂)의 벽에 거북선의 설계도를 그려놓고 거북선 제작에 몰두, 10년의 각고 끝에 10년의 각고 끝에 1591년 마을 앞 방죽에서 완성된 거북선을 진수할 수 있었다. 진수시험에 성공한 나장군은 1591년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군절도사로 부임해 오자 그의 종제인 나치용과 함께 여수로 충무공을 찾아갔다. 충무공은 그의 거북선 제작에 관한 설명을 듣고 크게 기뻐 하면 나장군을 발포가장 겸 조선 담당 군관으로 임명, 거북선 재작을 맡겼다.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에는 선조25년(1592년) 4월 11일 거북선 3척이 완성되어 발포 진수에 성공했다”고 기록돼 있다.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p 201- 202) 2)
이어서 김정업 전 조선대학교 교수도 충무공이 거북선 제작의 최고 책임자임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의 제작을 충무공에게 건의하고 설계 감조한 것은 다름 아닌 나대용 장군이라고 주장했다.
김정업은 나대용 장군의 후손 나갑주와 함께 장군의 출생지인 오륜동을 두어 차례 방문하여 현지 노인들로부터 장군에 대한 전설을 채집하여, 나대용장군이 거북선의 창제자 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한다.
“ 지금도 오륜동 그의 생가 앞에는 배를 만들어 실험했다는 방죽 (현재 이곳을 방죽골이라 함)이 있다. ... 이 지역에는 오늘날에도 나대용 장군과 거북선 그리고 물방개의 관계를 노래한 동요가 전해 오고 있다. 3) ... 호남 동순록에 장군이 거처하는 방의 벽은 거북선 설계도로 덮였고 낮에는 벌목하여 배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앞의 구비전승을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거북선은 그에 의해 창안되고 제작된 것이 확실하다. ... 거북선은 이충무공의 위대한 지견(智見)과 나대용 장군의 특출한 기술과의 조화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김정업, 나대용장군과 거북선, 위 책, p 217-220)
한편 나대용이 거북선에 관심을 가진 것은 나주의 해양성과 그의 조상 나유(羅裕 1224~1292) 때문으로 생각된다.
나주는 고려 왕건 때부터 해양 중심지였고, 나주 대굴포(현재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대곡마을)는 1408년(태종8년)부터 1432년(세종 14년)까지 24년간 전라수영이 설치된 곳으로서 전선 24척, 수군 1,895명이 배치된 곳이어서 나대용이 어릴 때부터 수군에 대한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
또한 태종때 거북선 제작을 건의한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의 존재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탁신은 거북선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대표적 인물이었는데, 고향은 나주와 바로 인접한 광주가 고향였고, 한때 나주에 유배된 적이 있었다. 이는 나주 출신 나대용과 모종의 연결고리를 상정하게 한다. 역시 사료가 부족하여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혹시 거북선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였던 탁신이 거북선에 관한 글을 남겼다면 나주는 그런 글이 보존될만한 후보지가 될 가능성을 갖추고 있는 지역이었던 셈이다. 나주에도 탁신을 매개로 조선 전기 거북선 관련 문헌 기록 혹은 기억의 일부가 구두전승되어 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김병륜, 나대용과 임진왜란 시기 거북선, 위 책, p 82)
한편 나대용의 조상 나유는 고려 충렬왕 때인 1274년 1월 일본정벌에 필요한 300척의 전함을 건조할 때 담당 부부사(部夫使)가 되어 공장(工匠)과 인부 3,500여 명을 징집하는데 힘썼고, 원나라와 고려가 함께 한 제1차 일본정벌 때 도독사(都督使) 김방경과 함께 원나라의 도원수 홀돈(忽敦)의 휘하에서 지병마사(知兵馬使)로 종군하였다. 제2차 일본정벌 때도 합포(合浦)에서 3번이나 출진하였다. 따라서 그의 집안에 고려 전함 관련한 자료가 남아있음직하다.
주1) 이 글은 김성한의 소설‘7년 전쟁 전 5권(산천재, 2012년)’ 제3권 ‘낡은 문서에서 태어난 배 (p 108-117)’에도 실려 있다.
주2) 이수경은 논문에서 “지금까지 구전되고 있는 ‘나대용이 방죽골에서 거북선 진수를 시험하였다.’라는 기록은 없음을 확인하였다. 김영원 교수는 근거 자료로 호남동순록을 언급하였지만 이 문헌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수경, 나주 체암 나대용 유적의 현황과 활용방안 , 호남사학회·(사)체암 나대용장군 기념사업회, 임진왜란과 거북선, 나대용 구국정신의 재조명학술대회, 2022, p 122)
이와는 별도로 1575년에 나대용이 무과에 합격하였고 1592년 4월11일에 거북선 3척을 진수하였다는 김영원 교수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나대용은 1583년에 무과에 급제했고, 1592년 4월 12일에 거북선 1척을 진수하였다.
주3) 나주 지역에는 지금도 ‘물방개 노래’가 구전(口傳)되고 있다.
빙글빙글 돌아라
잘도 돈다 물방개야
비바람 거친 파도
걱정이랑 하지 말라
크게 싸울 장수 나와
낙랑 장송 다듬어서
너 닮은 거북배
바다 오적 쓸어낸다.
어허둥둥 좋을 시고
빙글 빙글 돌아라
잘도 돈다 물방개야
(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p 265)
( 참고문헌 )
o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세창문화사, 2015
o 전남대학교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 조선시기 여수좌수영의 거북선, 2009,
o 호남 사학회·(사)체암 나대용장군 기념사업회, 임진왜란과 거북선, 나대용 구국정신의 재조명 학술대회,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