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보론: 거북선 창제 과정
- 작성일
- 2022.11.29 14:32
- 등록자
- 문화예술과
- 조회수
- 321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68회 보론: 거북선 창제 과정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거북선은 1592년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처녀 출전하였다. 이순신은 6월 14일 ‘제2차 당포, 당항포 등 4곳에서 승첩을 아뢰는 장계(당포파왜병장 唐浦破倭兵狀)’에서 거북선에 대하여 보고하였다.(이순신 지음·조성도 역, 임진장초, p 47)
"(전략) 신이 일찍이 섬 오랑캐가 침노할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귀선을 만들었습니다.(別制龜船) (...) 이번 출전 때에 돌격장이 거북선을 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적선 속으로 돌진케 하여 천·지·현·황 등 각종 총통(銃筒)을 쏘게 하였습니다.(후략).”
이처럼 이순신은 일찍이 섬 오랑캐가 침노할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귀선을 만들었다고 보고했다.
조선 시대 거북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13년(태종 13년) 2월 5일의 ‘태종실록’에 나온다.
“임금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上過臨津渡, 觀龜船 倭船相戰之狀)
이는 왜구의 피해가 극심했던 고려말 ·조선 초에 거북선이 처음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주목을 끄는 것은 고려의 군선(軍船)인 과선(戈船)이다. 과선은 다른 배와 달리 뱃전에 짧은 창검(槍劍)을 빈틈없이 꽂아놓아 적이 배 안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도 거북선과 비슷한 배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15년(태종 15년) 7월 16일 자 ‘태종실록’에도 거북선이 등장한다.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이 병비(兵備)에 대한 사의(事宜)를 올렸다. (...) 여섯째, 거북선[龜船]의 방식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이길만한 좋은 계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도록 명하여 전승(戰勝)의 전함으로 갖추게 하소서.
이때에 탁신이 병조를 맡았는데, 임금이 보고 병조에 내리었다.”
그런데 탁신의 건의대로 거북선이 조선 수군에 배치되었는지, 실제 전투에 사용되었는지는 기록은 전혀 없다.
한편 태종은 왜구 정벌을 위하여 수군 전력 강화에 힘썼고 전선의 수가 500여 척에 달하였다. 이후 세종은 대마도 정벌에 나섰다.
이러함에도 왜구의 침략은 끊이지 않았다. 1510년에 삼포왜란, 1544년에 사량진왜변, 1555년에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잇달아 일어났다.
1544년 4월에 통영 사량진에서 왜변이 일어났다. 20여 척의 왜선이 동쪽 강구(江口)로 쳐들어와서 200여 명의 왜적이 성을 포위하고, 만호 유택과 접전하여 수군(水軍) 1인을 죽이고 10여명을 부상시킨 뒤 물러갔다.
사량진 왜변이 일어나자 전(前) 병조판서 송흠(1459-1547)이 수군 개혁론을 상소하였다. (중종실록 1544년 9월 8일)
송흠은 중국의 당선(唐船)처럼 판옥선을 건조할 것, 무기와 화포등을 개량할 것, 수군을 정예화 할 것을 건의했다. 그런데 1544년 11월에 중종이 승하하자 이 논의는 흐지부지되었다.
이런 가운데 1555년(명종 10) 5월에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왜구가 선박 70여 척으로 일시에 전라도 달량포로 침입해 성을 포위하였고, 어란도(於蘭島)·장흥·영암·강진 등 일대를 횡행하면서 약탈과 노략질을 하였다. 왜구를 토벌하다가 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 등은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은 포로가 되는 등 사태가 매우 긴박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남치훈을 방어사로 임명하여 왜구를 토벌하였다.
화포로 무장하고 규모를 키운 일본 군선을 조선의 주력함이었던 맹선(猛船)이 격퇴하지 못하자, 맹선 무용론이 다시 제기되었고 새로운 전투함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팽배하였다. 맹선들은 세조 때 군용과 조운(漕運)에 겸용하도록 만들어진 병조선(兵漕船)이어서 몸집이 우둔하고 기동력도 떨어져 일찍부터 군용으로는 쓸모가 없다는 논란이 다시 제기된 것이다.
이에 새로운 전투함 판옥선(板屋船)이 건조되었다. 종래의 맹선은 선체 안에 병사들이 발을 붙이고 싸울 수 있도록 적당한 높이에 갑판을 깔고, 배를 움직이기 위하여 여러 개의 노를 달아놓는 평선(平船)인 데 반하여, 판옥선은
상장을 높게 2층으로 꾸며 노역을 전담하는 격군(格軍)과 전투에 임하는 군사를 갈라 놓았다. 뿐만아니라 백병전에 능한 왜적이 선상에 기어올라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포를 높게 설치하여 유리한 자리에서 적에게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판옥선으로 무장한 조선 수군은 왜적의 출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판옥선이 건조된 4년 후인 1559년(명종 14년) 6월 6일 ‘명종실록’ 1번째 기사이다.
(...) 적장이 탄 큰 배는 쳐부수지 못하고 우리나라 사람만 상하였으니 【이때 우리나라 사람으로 철환(鐵丸)에 맞아 즉사한 자가 있었다.】 불쌍하다. 이 배가 만약 어느 곳에 정박하여 상륙한다면 2백여 명이나 되는 왜적들이 틀림없이 해를 많이 끼칠 터이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마땅히 온갖 조치를 다하여 기어이 포획하여야 할 것이다.”
이어서 2번째 기사이다.
비변사 대신과 영부사가 함께 의논하여 아뢰었다.
"감사(監司)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지금 각도에 나누어 정박한 왜선들이 비록 바람 때문에 표류하다 닿은 듯하나, 나타난 곳이 한두 곳이 아니고 육지에 내려와 싸우다가 백성을 살해하기까지 하였으니 내 마음이 매우 아프다. 대마도가 글을 보내와 변란을 통보해 준 것이 참으로 허황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전라도 구조도(仇助島)에서 싸우다 도망간 배는 용(龍)을 그린 큰 기를 세웠고 철환을 잘 쏘았는데 기계(機械)가 보통이 아니었고 배의 모양도 특이하였다. 우리나라의 전선(戰船)을 만나도 조금도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닻을 내리고 응전하였다.
우수사 최희효가 잡지 못하였고 군관(軍官)과 뱃사공이 또한 철환을 맞아 즉사하여, 적선이 서쪽 바다로 달아나 버리게 되었다. 이는 틀림없이 적장이 탄 배였을 것이니 어찌 보통으로 조치하여 잡을 수 있었겠는가.
이뿐만이 아니다. 군산도(群山島)의 외면(外面)에서 옥구 현감 주세란과 만경현령 박위등이 놓친 배와 삼도(三島)·저로(氐老)·읍구미(邑仇未)섬에서 에서 박무·김응정 등이 뒤쫓아 잡지 못한 배들이 체제(體制)·기계(器械)·호령(號令)·진퇴(進退) 등의 모양이 모두 같았는데, 상(上)·중(中)·하(下) 3도(道)에 나누어 정박하였으니 그들의 음흉한 꾀를 더욱 예측하기 어렵다. (...)
적선이 크고 튼튼하여 천자·지자 총통을 쏘아도 쉽게 부서지지 아니하였으며 철환 역시 참나무(상수리나무) 방패도 꿰뚫었다고 하는데, 나는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믿어지지가 않는다. 박무가 탔던 배의 참나무 방패는 단단하고 두꺼워 철환이 꿰뚫지 못했다고 하였으니, 그 꿰뚫리어 부서진 것은 틀림없이 단단하고 두껍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전선의 전후 좌우에 천·지·현자(天地玄字) 총통을 설치하여 기계를 정비하고 사람들은 판옥 밑에 숨어 몸을 노출시키지 않고서 빨리 노를 저어 곧장 적선에 가까이 다가가 그 높낮이에 따라 동시에 일제히 발사했다면, 어찌 격파하지 못할 이치가 있었겠으며 사람들이 철환을 맞을 염려가 있었겠느냐. 장사(將士)들이 절제(節制)를 어기고 방어 기계들을 거의 정비 설치하지 아니하였고 겁이 많은 것이 습관이 되어 전투에 임하여 용맹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남풍(南風)이 계속 불어 적선들이 틀림없이 막히어 되돌아가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다 여러 섬들에 정박하게 될 것이다. 경은 장수들을 엄하게 단속하고 특별히 조치해서 속히 포획하여 되돌아가지 못하게 하라.’고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렇게 하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명종실록 1559년 6월 6일 2번째 기사)
이처럼 조선의 주력 전함 판옥선은 적선의 공격에 무력하였다. 이런 왜구의 위협에서 조선 수군의 압도적 승리를 위해 이순신은 판옥선에 덮개를 씌운 거북선을 만들었다.
1592년 2월 8일의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이 날의 ‘난중일기’에는 전후 맥락에 대한 설명없이 “거북선에 쓸 범포(帆布 돛베) 29필을 받았다.”고 나온다. 돛베는 전라순찰사 이광이 보낸 것이었다.
3월 27일에는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해 보았다. 전라좌수영 선소에서 나대용이 만든 거북선을 소포에서 대포 사격 시험을 한 것이다. 거북선 돌격장은 순천 출신 급제 이기남이었다.
4월 11일에 전라도 순찰사 이광의 편지와 별록을 순찰사의 군관 남한이 가져왔다. 이 날 비로소 돛베로 돛을 만들었다.(始製布帆)
4월 12일에 이순신은 아침밥을 먹은 뒤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포 ·현자포를 쏘아 보았다. 순찰사의 군관 남한도 거북선 사격을 지켜보았다.
이처럼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 총통 사격을 마쳤다.
그러면 누가 거북선 창제 아이디어를 냈고, 누가 거북선 건조를 하였나? 다음 회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 참고문헌 )
o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세창문화사, 2015
o 전남대학교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 조선 시기 여수좌수영의 거북선, 2009
o 호남사학회·(사)체암 나대용장군 기념사업회, 임진왜란과 거북선, 나대용 구국정신의 재조명학술대회,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