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나대용 별세 이후 현창 활동
- 작성일
- 2022.11.24 14:29
- 등록자
- 문화예술과
- 조회수
- 394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67회 나대용 별세 이후 현창 활동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612년 1월에 경기수사 나대용이 별세한 이후의 현창(顯彰) 활동을 살펴보자. 1795년(정조 19)에 ‘이충무공전서’가 간행되었다. 이충무공 전서의 ‘나주목지(羅州牧誌)’에는 나대용이 소개되어 있다.
“나대용은 현령으로 임진란을 당하여 충무 순신을 따라 거북선 3척을 꾸며서, 적을 격파하는 공이 있었다. 승급하여 경기수사에 보임되었다.”
1799년(정조 23)에 발간된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도 나대용의 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나대용: 자는 시망(時望). 호는 체암(遞菴). 본관은 금성(錦城), 양절공(良節公) 익희(益禧)의 후손이고 참봉(參奉) 공석(公奭)의 손자이다. 경술(經術)에 능통했고 기사(騎射)를 잘하였으며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년(1592)에 왜변이 있을 것임을 알고 이충무공에게 나아가 비어책(備禦策)을 아뢰었다. 거북선을 정비하고 발포를 진수하다가 영남으로 옮겨갔다. 이공이 평소 공이 장재(將才)가 있음을 알았으므로 유격장(游擊將)을 삼았다. 옥포에 이르러 왜적의 큰 배 두 척을 침몰시킴에 이공이 포상을 청하는 계를 올리며 말하길 “몸을 돌보지 않고 힘을 낸 자는 오직 나대용뿐이다.”라 하였다. 당포 싸움에서 탄환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 힘써 싸우기를 평소처럼 하였다. 정운과 함께 왜선 40여 척을 불태워 마침내 대승을 거두었다. 또 복병으로서 왜장 망고질(亡古叱)을 붙잡아 적정을 알아내어 연승을 하였다. 사천에서 포위된 중에 또 탄환에 맞았으나 물러나지 않고 왜선을 대파하니 임금께서 특명으로 남해의 요충지를 지키도록 하였다. 해추선(海鰌船)을 만들어내었고 여러 차례 기공(奇功)을 이루니 세상에서 회전(淮甸)의 좋은 법규(良規)이고 한산(閑山)의 대첩이라고 아울러 칭송하였다.
상이 포상하는 교(敎)를 내려 말하길 “우리 강토를 굳건히 하여 호표(虎豹)가 산에 있는 기세를 과시하여 그들이 엿보는 것을 그치게 하여 고래가 파도를 일으키는 것을 끊도록 하라.”고 하였다. 일곱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청백으로 이름을 떨쳤다.
교동수사(喬桐水使)에 승진하였고 삼지창(三枝槍)과 청룡도(靑龍刀)를 하사(下賜)받았으며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세주: 종제(從弟)인 치용(致用)은 노량에서 순절하였고 족질(族侄)인 적(迪)과 선(選)은 합천에서 순절하였다.] 1)(김동수 교감·역주, 호남 절의록, 경인문화사, 2010, p 260)
이 해(1799년)에 나대용은 나주 송재사(松齋祠)에 추배되었다. 송재사는 나주시 문평면 동원리 서원마을에 있는 사우로 송재(松齋) 나세찬(羅世纘, 1498~1551)을 모시기 위해 1702년(숙종 28)에 처음 건립되었다. 나세찬과 나대용은 삼종조손(三從祖孫) 간이었다. 2)
나세찬은 1545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이 해에 인종이 재위 9개월 만에 승하하고 12살의 명종이 즉위하자 모친 문정왕후(중종의 계비)가 수렴청정하였다. 이러자 외삼촌 윤원형이 인종의 외삼촌 윤임등을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유희춘 등이 유배당하게 되자 나세찬은 이를 반대하다가 체직 당하였다. 나세찬은 전주부윤으로 좌천되었다가 별세했다.
한편 1800년에 임병원이 ‘체암선생행장’을 지었다. 3) 행장’에는 나대용 행적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었다. 종제 치용과 함께 충무공을 찾아갔다는 점, 거북선 세 척을 찬조(贊助)하였다는 점, 사천 해전에서 왜적의 탄환을 맞았다는 점, 나대용·송희립·종제 치용과 함께 노량해전에 참전하였다는 점, 해추선 세 척을 창안하여 광해군으로 받은 교서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어서 1859년에 나병상이 ‘기행’, 1860년에 나찬현이 ‘행록’, 1872년에 홍순형이 ‘행적’, 이병수가 ‘묘갈명’을 지었다. 1912년에는 금성나씨 종중에서 ‘체암공행적’(초간본)을 간행했고, 1932년 9월에는 ‘체암공행적’(중간본)을 간행했다.
1974년 10월에 나대용의 국난극복 공적과 구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체암 나대용장군 기념사업회’가 발족하였고, 이은상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75년 4월엔 체암 나장군(紀蹟碑) 기적비 건립되었는데 이은상이 비문을 지었다. 1976년에 『체암나대용장군실기』간행되었다.
이어서 1977년 9월 29일에는 나대용 장군 생가와 묘소가 호국유적지 전남지방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고, 1978년에 소충사가 건립되었으며, 1983년부터 매년 4월 21일 과학의 날에 제향하고 있다.
1999년 6월 9일에는 옥포 대우 조선소에서 건조한 제8호 잠수함을 ‘나대용 함’으로 명명(命名)하였다.
2007년에는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를 발족하였고, 2012년 4월에 소충사 앞 기념공원 안에 나대용장군 동상과 거북선 모형을 조성하였다. 2015년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을 발간하였다.
2022년 11월 18일에 호남사학회·(사)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 주최로 나주 시민회관에서 ‘임진왜란과 거북선, 나대용 구국정신의 재조명’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제장명이‘나대용의 임란시기 활동과 역사적 의미’기조강연을 하였고, 나선화가 ‘나대용 장군의 가계와 성장 배경’, 김병륜이 ‘나대용과 임란시기 거북선’, 이수경이 ‘나주 체암나대용 유적의 현황과 활용방안’, 김대중이 ‘나대용의 과학기술 사상과 호국정신의 선양 및 계승방안’을 발표하였으며, 이해준 ·이욱 ·김낙진 ·김세곤 ·임광철 ·윤여정 ·김희태· 정경성이 종합토론을 하였다.
토론자로 참여한 필자는 토론문에 ‘학술대회를 통하여 얻은 성과’를 적었다.
첫째, 제장명 교수님이 발표하셨듯이 나대용에 대한 재평가를 새롭게 하였다. 지금까지 나대용은 단순히 거북선을 만든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는 거북선·창선·해추선을 건조한 조선(造船)과학자이자, 구국의 용장, 명나라 사신을 접대한 외교활동, 강진·능성·남해 현감 등 7개 수령 활동을 한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2015년부터 해군이 해군학술상을 '나대용상(賞)'으로 이름 지은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국방일보, 2016. 1. 11)
둘째, 나주 지역의 해양활동, 고려 때 나유의 전선 300척 건조 등 나대용 조상의 활동, 그리고 태종 때 거북선 건조를 건의한 병조판서 탁신의 나주 유배 등이 나대용의 전함(거북선 포함) 건조의 원동력으로 밝혀진 것은 큰 성과이다.
셋째, 임진왜란 해전사에서 나대용의 활동이 재조명되었고, ‘난중일기’· ‘임진장초’ 등을 통하여 이순신과 나대용의 관계도 소상히 알 수 있었다.
넷째,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여러 교수님들이 역사적 사실과 구전(口傳 혹은 전설)의 관련성과 구분을 심도있게 논의한 것도 큰 성과였다. (예 : 나대용이 봉사직을 그만두고 낙향했는지 여부)
주1)호남절의록은 나대용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나대용은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지 않았다.
주2) 송재사에는 1705년에 임형수를 추가로 모셨으며, 1799년에는 나대용을 추배하였다. 송재사는 1868년 훼철되었다가 1924년 사우를 다시 세웠는데 나덕원, 나무송, 나무춘을 배향하였다.
주3)‘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2015)에서는 임병원이 1860년에 ‘행장’을 지었다고 적었다. 이는 오류이다.
임병원은 1798년에 64세였다. 1798년(정조 22년) 8월 4일의 ‘정조실록’에 실려있다. "... 장계로 보고한 내용을 보건대, ... 유학 임병원(林炳遠)은 나이가 64세이고, 고 충신 김천일(金千鎰)의 봉사손(奉祀孫)인 유학 김득려는 나이가 63세라고 하였다. ... ”
( 참고문헌 )
o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세창문화사, 2015
o 호남사학회·(사)체암 나대용장군 기념사업회, 임진왜란과 거북선, 나대용 구국정신의 재조명학술대회,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