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나대용, 해추선 3척을 건조하다.
- 작성일
- 2022.11.22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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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 66회 나대용, 해추선 3척을 건조하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607년(선조 40)에 나대용은 경상도 곤양군수(昆陽郡守, 종4품)에 임명되어 2년여간 곤양을 다스렸다. 그런데 나대용은 1608년(광해 즉위년) 12월 18일에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사간원이 아뢰었다. (...) 곤양 군수 나대용은 하는 일도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 아래 구실아치들로부터 멸시를 당하고 있으며, 영월군수 정상철은 백성들을 학대하고 자신을 살찌우느라 못하는 짓이 없으며, 훈련 도정 이윤덕은 재상의 반열에 있는 신분으로 사사로운 욕심을 자행하여 거칠고 비루한 일들이 뚜렷이 드러났으니,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이러자 전교하였다. "이윤덕·정상철은 체차하고 그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광해군일기 1608년 12월 16일 1번째 기사)
이후 나대용은 2년 정도 쉬고 있다가 1610년 10월경에 남해현령에 임명되었다. ‘광해군일기’를 보면 1610년 10월 26일에 사헌부는 남해현령에 임명된 나대용에 대해 “사람됨이 어리석고 망령스러운데다 술을 좋아해 위의(威儀)를 잃고 있으니 백성을 직접 상대하는 관원으로 적합하지 않다”면서 임명취소를 건의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나대용의 일은 소장으로 진달한 것을 여러 차례 보건대 계략이 있는 듯한데, 부임한 지 오래되지 않았으니 우선 방백이 처치하기를 기다리도록 하라.”고 전교하였다.
(광해군일기 1610년 10월 26일) 1)
이러자 10월 27일에 사헌부가 다시 아뢰었다.
“남해현령 나대용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망령스럽습니다. 전에 통제사(統制使)의 군관으로 자망(自望)하여 초료(草料)를 받아낸 뒤에 모면할 목적으로 감히 소장을 진달하여 능력을 과시할 꾀를 내었는데, 그가 조목별로 진달한 내용을 보면 기이한 계책이라고 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게다가 병적으로 술을 탐한 나머지 가는 곳마다 취해 쓰러지고 있으니, 변란을 대비해야 할 관방(關防)의 자리를 이런 자에게 맡길 수는 결코 없는 일입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속히 파직을 명하소서.”
이에 광해군은 이미 유시했으니 윤허하지 않는다.(答曰: 已諭, 不允)고 답하였다.”2)
여담이지만 나대용이 얼마나 술을 많이 마셨길래 사헌부의 남해현령 임명 취소 사유에 포함되었을까?
아무튼 광해군의 신임을 받은 나대용은 남해현령으로서 맡은바 소임을 다하고 해추선 3척을 건조하였다. 1611년에 여러 수군진을 순시한 비변사 구관 낭청 최현이 다음과 같은 보고했다.
“남해현령 나대용이 성실하게 만든 전선은 군사를 제일 적게 쓰고, 다른 배에 비해 2배나 가볍고 정예하므로 가자(加資)를 건의함”
보고를 받은 광해군은 1611년 6월 4일에 나대용에게‘포장가자교서(襃獎加資敎書)’를 내리고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에 가자했다. 그러면 ‘포장가자교서’를 읽어보자.
“왕은 이렇듯이 말한다. 적을 막는 방책은 사람을 잘 만나야 하고, 방략이 변진에서 시행되기를 기대했더니, 일을 잘하자면 먼지 기물을 치레해야 하는거라 주집(舟楫 배와 노)은 방어를 위해 마련되었도다.
공로가 있으면 포양(褒揚) 하지 않는 법 없나니, 기왕의 재능을 다하여 더욱 힘쓸지어다.
너는 진작부터 기술을 지녀, 마침내 훈련원에 벼슬하였다. 공(公)을 받들고 사(私)를 잊으니 세상에선 한결같이 우직하다 일렀고, 일에 임하면 회피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정성을 알아주었다. 돌아보건대 남해는 요충지대라 누차 왜적의 침략을 보았다. 진실로 해상에서 무찔러 버려야지, 어찌 육지에까지 조량하게 해서야 되겠느냐. 그래서 기계(器械)를 수선하는 때를 당하여, 드디어 배 만드는 역사를 일으켰도다. 가깝게는 한산의 큰 승첩을 입증하여 모양은 거북선을 모방했고, 멀리는 회전(淮甸)의 좋은 법규를 본받아 형세는 요자(鷂子)보다 빠르도다.
오직 재력의 핍박이 극심하여, 이에 네 손발로 노력해서 이루었도다. 고을 다스린지 겨우 열 달 만에 공역을 끝내어 세 척을 만들었다니. 이미 직책을 다한 실효가 있는데, 어찌 공을 보수하는 특전이 없을소냐. 이러므로 너에게 통정대부를 가자하고, 남해현령을 이전과 같이 거행케 한다.
아! 우리 봉강(封疆)을 굳건히하여 호표(虎豹)가 산에 있는 기세를 과시하고, 적의 침략을 근절시켜 경예(鯨鯢)가 파도를 일으키는 근심을 없이하라. 넌지시 이와같이 교시하노니, 마땅히 체득할 줄 믿는다.
만력 39년(1611) 6월 초4일”
이처럼 나대용은 남해현령(종5품)으로 부임한지 열 달 만에 해추선(海鰌船) 세 척을 건조한 공으로 1611년 남해현령직을 유지하면서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에 가자(加資)되었다. 3)
그런데 사헌부는 1611년 6월 8일부터 6월 20일까지 거의 매일 나대용의 당상관 가자를 취소하라고 상소했다. (6월 8일, 10일, 12일, 13일, 14일, 15일, 16일, 17일, 18일, 19일, 20일)
하지만 광해군은 사헌부의 상소를 끝내 수용하지 않았다. ‘광해군일기’를 살펴보자.
6월 8일
사헌부가 아뢰었다. " (...) 근래에 작상(爵賞)을 너무 남발하여 명기(名器)가 혼탁해지고 있으므로 식자들이 오래 전부터 한심하게 여겨오고 있습니다. 다대포 첨사 정사서와 남해 현령 나대용이 비변사 낭청 최현의 장계로 인하여 당상의 중한 상가(賞加)까지 받았는데 만일 눈에 띄는 공로가 있었으면 본도에 있는 감사와 통제사가 필시 벌써 사실대로 포상·장려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일개 낭청의 계사를 인하여 함부로 중전(重典)을 시행하다니, 심히 미안한 일입니다. 더구나 이 서장(書狀)을 살펴보면, 군기(軍器)를 정밀하게 마련하고 전선(戰船)을 장만하였다는데 이는 모두 직분 내의 일이니만큼, 얼마 안되는 작은 공로로써 이 외람스런 은상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제목(除目)이 내려지자 듣고 보는 이들이 다들 놀라고 있으니, 정사서·나대용을 모두 개정(改正)하도록 명하소서."
이러자 광해군은 답하였다. "정사서 등에 대해서는 이미 참작하여 포상한 것이니, 그만 논하도록 하라. " (광해군일기 1611년 6월 8일 5번째 기사)
6월 10일
사헌부가 아뢰었다.
"정사서·나대용 등의 상가(賞加)를 개정하소서."
답하기를,"이미 유시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6월 17일
사헌부가 연계하여 정사서·나대용의 상가를 개정하도록 청하니 답하기를, "한 자급 올려 준들 남발이 되지는 않으니, 고집을 부리지 말라." 하였다.
6월 20일
사헌부가 연계하여 정사서·나대용의 상가를 개정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는 뜻을 이미 유시하였는데 어찌 꼭 번거롭게 논하는가." 하였다. (광해군 일기 1611년 6월 20일)
이처럼 광해군의 신임을 받은 나대용은 1611년 9월까지 남해현령으로 근무하다가, 11월에 경기수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탄환에 맞은 상처가 재발하여 1612년 1월 29일에 57세로 별세하였다. 나대용은 나주시 문평면 대도리 선영 아래에 예장되었다. 묘비엔 ‘가선대부 행 경기도수군통어사 나대용지묘’라 적혀있다. 가선대부(嘉善大夫)는 종2품(從二品)이다.
주1) 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에는 나대용은 1610년 11월에 부임하여 1611년 8월 파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광해군 일기’에 나대용은 1610년 10월에 임명되었다.
주2) 국사편찬위원회의 1610년 10월 27일 ‘광해군일기’는 제목이 ‘사헌부가 이욱의 체차를 청하고 청주 목사와 남해 현령의 교체를 청하니 들어주다 ’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오역이다.
주3) 해추선(海鰌船 해추를 풀이하면 ‘바다의 미꾸라지’이다. 배가 날렵하고 빠르게 움직여 포위망 속에서 잘 빠져 나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나대용이 1611년에 만든 군선이 “가장 작고 가볍고 예리하다”는 경상감영의 보고를 보면, 해추선도 기본적으로 크기를 줄이고 속도에 중점을 둔 군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병륜, 나대용과 임진왜란기의 거북선, 호남 사학회·(사)체암 나대용장군 기념사업회, 임진왜란과 거북선, 나대용 구국정신의 재조명 학술대회, 2022, p 96-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