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거북선은 철갑선인가?
- 작성일
- 2022.11.1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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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64회 거북선은 철갑선인가?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 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정주영과 거북선
“이건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이오. 우리는 300년 전에 이런 배를 만들었던 민족이오! 믿고 돈을 빌려주시오!”
1971년에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영국 바클레이 은행을 설득해 허허벌판 울산에 조선소를 지었다. 당시는 500원 지폐에서 보듯이 거북선을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알았다.
# 2016년에 미국 해군연구소(USNI)는 거북선을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세계 7대 군함’으로 선정했다. 다른 6개의 군함은 모두 1900년대 이후에 제적된 것이지만 거북선만 1592년에 제작되었다. (서울경제신문 2016.4.10.)
그러면 나대용이 만든 거북선은 철갑선인가? 먼저 사료들부터 살펴보자.
1592년 6월 14일에 이순신은 사천·당포·당항포·율포해전 승리를 조정에 보고한 장계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서 거북선을 언급했다.
"신이 일찍이 섬 오랑캐가 침노할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귀선(龜船)을 만들었습니다. 앞에는 용의 머리를 달았고 입에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꼬챙이를 꽂았습니다.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엿볼 수 없게 해서,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에서라도 쉽게 돌입하여 대포를 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
1592년 5월 1일 자 ‘선조수정실록’을 읽어보자.
“(...) 이에 앞서 이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거북선은 배 위에 판자를 깔아 거북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其制船上鋪板如龜, 背上有十字細路, 纔容我人通行, 餘皆列揷刀·錐)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었고, 입은 대포 구멍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구멍을 설치하였다. (前作龍頭, 口爲銃穴, 後爲龜尾, 尾下有銃穴) 좌우에도 총구멍이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 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左右各有銃穴六, 藏兵其底, 四面發砲, 進退縱橫, 捷速如飛)싸울 때에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화총(火銃)을 일제히 쏘았다. 그리하여 적선 속을 횡행(橫行)하는데도 아군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적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나 승리하였다. (...)”
이순신의 조카 이분의 ‘이충무공행록’에도 거북선이 언급되어 있다.
“공이 전라좌수영에 계실 때에 왜적이 반드시 쳐들어올 것을 알고 싸움배(戰船)을 창작하였는데 크기는 판옥선만 하며 위를 판자로 덮었고, 판자 위에 십자(十字) 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게 하였으며, 그 나머지 부분에는 모두 칼과 송곳을 꽃아 사방으로 발 디딜 곳이 없도록 하였다.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어 붙였으며 그 입은 총구멍이 되고, 뒤는 거북의 꼬리처럼 되었는데 그 꼬리 밑에도 총구멍이 있었고 좌우로 각 6개씩 총구멍이 있었다. 그 모양은 대체로 거북 모습과 같았기 때문에 이름을 거북선(귀선 龜船)이라 하였다.”(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제4권, 2006, p 324)
이를 보면 거북선이 기본적으로 공격을 최선두에서 선도하는 돌격선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탑승 수군을 보호하기 위해 판옥선 위에 뚜껑(蓋板·개판)을 씌운 것이었다.
# 그런데 거북선이 철갑선의 근거는 일본에서 나왔다. 최초의 문헌은 임진왜란에 참전한 68세의 일본 수군 도노오카 진자에몬(外岡甚左衛門)이 1592년 7월 28일에 부산포에서 쓴 회고록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이다.
그는 안골포 해전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와키자카 님의 전투 소식을 들으신 구키 요시타카님과 가토 요시아키 님은 부산포에서 출발하여 가덕도를 지나 안골포 항에 들어갔다. 10일 오전 8시경부터 적의 큰 배 58척, 작은 배 50척 가량이 공격하여 왔다.
큰 배 가운데 3척은 메꾸라부네(盲船,장님배,거북선을 말함)로, 쇠로 방어를 하고 (쇠로 되어 있는 요해 要害) 대포·불화살·끝이 둘로 갈라진 화살 등을 쏘았다. 오전 8시경부터 오후 9시경까지 번갈아 공격하여 아군 배의 고루(고루)며 통로며 발을 보호하여 주는 방어 시설까지 모두 부수었다.
(후략) (류성룡 저·김시덕 역해, 교감·해설 징비록, p 317-319)
이 기록 중 ‘큰 배 가운데 3척은 ‘장님 배(目クラ船)로 ‘철로 요해(鐵ニテ要害シ)’라고 기록했는데, 장님 배가 거북선이고 안골포 해전에서 거북선이 3척 출동한 근거가 되었다. (최관·김시덕 공저, 임진왜란 관련 일본 문헌 해제, 도서출판 문, 2010, p 217)
여기에서 철갑선 논쟁과 관련된 부분은 ‘철로 요해(鐵ニテ要害シ)’이다.
이를 어떻게 번역하여야 하나? 김시덕의 번역대로 ‘쇠로 되어 있는 요새’라고 하여야 하는 지, 철갑을 둘렀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창검을 꽂았다’고 번역해야 할지 난해하다.
그런데 68세의 일본 수군이 안골포 해전 중에 거북선에 직접 올라가서 거북선의 실체를 확인했을 리는 만무하고, 상당히 멀리서 외관으로만 보았을 것인데 ‘철로 요해’란 표현만 가지고 거북선이 철갑선이라고 단정하기는 너무나 어설프다.
이럼에도 해군 중장 사토 데쓰타로는 해군대학 강의교재인‘제국국방사론(1908년)’에서 이순신의 장갑전함(거북선) 창조를 칭송했다.
# 서양인들은 거북선을 철갑선으로 보았다.
서양에서는 거북선을 철갑선으로 보았다. 미국인 선교사 겸 동양학자였던 윌리엄 그리피스(1843~1928)가 1882년에 펴낸 『은둔의 나라, 한국』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군의 군함을 설명하면서 “금속으로 감싼(covered with metal) 배”가 등장한다.
파란 눈의 애국자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1863~1949)는 미국 잡지 ‘하퍼스 뉴 먼슬리 매거진(Harper’s New Monthly Magazine)’ 1899년 6월호에 거북선을 철판(Iron Plate)으로 감싼 구조라고 기고했다. 헐버트는 거북선을 ‘철갑선(Ironclad)’의 일종이라고 간주하면서 “한국은 철갑선과 금속 활판 기술을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발명한 국가”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헐버트는 1906년에 출간된 자신의 저서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순신은 거북 모양과 비슷하게 생긴 기묘한 철갑선을 발명했다. 선미는 철판으로 덮여 있어서 적의 총탄에도 뚫리지 않았다. (...) 이순신 장군의 승리는 임진왜란의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다. (...) 이때부터 왜의 침략 야욕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헐버트 지음·신복룡 역주, 대한제국 멸망사, 2019, p 122)
한편 1929년에 영국의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이 거북선을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소개했다. 이는 서양인들에게 거북선이 철갑선임을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어서 1943년 4월 22일 미국 상원의원 알렉산더 와일리는 미국 상원에서 아래와 같이 연설했다.
“세계에서 일본은 쳐 이긴 나라는 조선뿐입니다.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여러 번 전쟁이 있었는데, 1592년에 조선 해군 대장 이순신이 철갑선을 처음으로 만들어 일본 해군을 함몰시켰습니다. 그 뒤 조선은 360년 동안을 무사히 지냈습니다. ”(박종평, 이순신, 지금 우리가 원하는, 꿈결, 2017, p 160)
1945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전쟁의 역사’를 발간한 총사령관 버나드 로 몽고메리(1887~1976)는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철갑전투함이라고 적었다.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장군 이순신은 전략가이자 전술가였고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제작에도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중략) 일본 해군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장군 이순신의 철갑 전투함(거북선)에는 저항할 수 없었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 역사책에는 철갑선 때문에 일본이 졌다고 소개되어 있고, 우리나라 역사책에는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말이 없다는 점이다. (초등학교 사회 학습백과사전’에서)
# 거북선이 철갑선인지 여부는 지금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조선은 1895년 유길준이 ‘서유견문’을 통해 “거북선이 천하에서 가장 먼저 만든 철갑선”이라고 주장했고, 단재 신채호(1880-1936)가 1908년 5월2일부터 8월18일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조선 제1위인 이순신 전’에서 거북선을 세계 철갑선의 원조로 평가했다. 또한 1915년에 백암 박은식이 중국 상해에서 발표한 ‘이순신 전’에서도 이순신을 세계 철함의 발명 시조라고 하면서 거북선의 독창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신채호는 1931년 6월 21일자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사 11’에서 철갑선을 장갑선으로 수정하였다.
“‘이충무공 전서’의 그 설명한 귀선의 제도를 보건대 선(船)을 목판으로 장(裝)하고 철판으로 함이 아닌 듯하니 이순신을 장갑선의 비조라 함은 가하나 철갑선의 비조라 함은 불가할 것이다.”(최원식, 이순신을 찾아서, p 115)
1977년에 김재근은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것은 신화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남천우도 이에 동의하였다. 이들의 견해는 철갑을 입혔다는 사료가 전혀 없고, 거북등판에 철갑을 입히면 거북선이 지나치게 무거워지고 전복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 1980년대 초반 박해일은 거북선이 철갑선이 아니라면 화공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면서 1748년(영조 24)의 ‘인갑기록’을 찾아내 거북선은 얇은 비늘과 같은 첩판을 씌웠다고 주장했다. (박재광, 임진왜란기 거북선의 구조와 역할, 전남대학교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 조선시기 여수좌수영의 거북선, 2009, p 93-95)
거북선은 해전이 시작되면 제일 먼저 적진으로 들어가 싸운 돌격선이었다.
적에게 곧장 돌진하여 적의 진영을 혼란에 빠뜨리고 왜장의 배를 최우선 적으로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려면 속도가 매우 빨라야 했다.
김정진은 “거북선은 돌격선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속도가 중요했다. 철판은 목판보다 15배 이상 무겁기때문에 속도가 최우선인 전투력 향상에 저해된다. 또한 철판은 바닷물에 쉽게 녹이 슨다.”(김정진·남경완, 거북선 신화에서 역사로, 랜덤하우스 중앙, 2005, p 38)고 논평했다.
한편 박재광은 ‘최근 연구자들의 경향은 거북선이 철갑선이 아닌 단순 장갑으로 보고 있다.’고 정리했고, (박재광, 위 책, p 95)
김병륜은 “거북선이 철갑선인지 여부는 일단 조선측 사료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의 철갑 유무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이 없다는 점”을 주목했다. (김병륜, 나대용과 임진왜란기의 거북선, 2022)
( 참고문헌 )
o 김정진·남경완, 거북선 신화에서 역사로, 랜덤하우스 중앙, 2005
o 김태훈,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일상이상, 2014
o 박재광, 임진왜란기 거북선의 구조와 역할, 전남대학교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 조선시기 여수좌수영의 거북선, 2009,
o 최원식, 이순신을 찾아서, 돌베개,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