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나대용, 1599년에 창선을 건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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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15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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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62회 나대용, 1599년에 창선을 건조하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이후의 나대용(羅大用, 1556~1612)의 행적을 살펴보자. 이은상이 비문을 지은 ‘체암 나대용 장군 기적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에 장군은 순찰사 한효순의 군관이 되어 창선(鎗船)이라 이름한 배 25척을 새로 만들었고, 광해군 때에 곤양군수를 지내고 남현현감이 되어서는 해추선이라는 쾌속선을 다시 고안해 내기도 했으며 그러한 공로로 경기수사에 승진되었건만 전쟁때의 탄환 상처를 다시 앓아 부임하기 전에 세상을 여의니 광해군 4년 서기 1612년 정월 29일 향년 57세요
나주군 문평면 마전동에 장례 모셨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종제 나치용이 순국하자 능성현령(綾城縣令) 나대용은 통곡했다. 1)
1599년 3월에 나대용은 이순신의 종사관(從事官)이었던 반곡 정경달 (1542~1602)을 만났다. 두 사람이 만난 기록이 ‘반곡일기(盤谷日記)’에 있다.
“기해년(1599) 3월 초7일. 상산(霜山)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능성현감 나대용을 만나 술을 마셨다”
그런데 윤 4월 1일에 사간원 정언 임수정이 선조에게 능성현령 나대용을 파직할 것을 아뢰었다. (선조실록 1599년 윤4월 1일)
“ ‘(전략)능성 현령 나대용은 도임한 뒤 오직 음주만을 일삼아 일체의 관청 사무를 오로지 하리(下吏)에게 위임시키고는 백성을 침학하여 자신을 살찌우기만을 일삼고 있는데, 고향(나주)에서 머잖은 지역에 있어 범람한 일이 더욱 많습니다. 그리고 조정에서 고을을 통합한 의도는 본래 잔민(殘民)을 소생시키고자 해서인데 소속된 화순(和順) 백성들을 대하기를 마치 월(越)나라 사람이 진(秦)나라 사람의 병고를 보듯이 하며 더욱 침탈을 가하므로,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중략)
선조는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했다.”
화순 지역은 1418년에 이르러 능성현 ·화순현· 동복현 세 현이 있었는데, 1597년 정유재란의 피해가 너무 심하여 화순현의 백성들은 스스로 폐현을 자청하고 능성현에 합하였다. (화순군청 인터넷 홈페이지, 화순군 소개 연혁)
윤 4월 1일에 파직된 나대용은 1599년 어느 시점에 전라도 순찰사 한효순의 군관이 되어 창선(鎗船) 건조에 주력하여 전선(戰船) 25척을 감조(監造)하였다.
‘선조실록’을 보면 한효순은 1598년 12월 18일에 경상감사에 부임하여 1599년 윤4월 20일에도 경상감사를 한 것으로 나와 있다. 한효순은 1599년 7월 6일에 전라도 순찰사를 한 것으로 나오는데, 1600년 5월 5일에 병으로 사직을 청하여 체직되었다.
나대용이 1599년에 한효순의 군관으로 일한 것은 1606년 12월 24일의 ‘선조실록’에 나온다.
“겸 삼도 통제사(兼三道統制使) 이운룡이 치계하기를,
‘나주에 사는 전 현령 나대용의 상소 내용에 ‘신은 나주에서 성장하였다. (...) 1591년에는 수사(水使) 이순신의 감조전선출납군병군관(監造戰船出納軍兵軍官)이 되었다. (...) 사천 등지의 15여 회에 달하는 전투에서는 모두 수공(首功)을 세웠으므로 이름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강진현감에 제수되었으며 그 뒤로 연이어 금구·능성·고성 현령에 제수되었다. (...) 대체로 왜적을 막는 데에는 수군보다 앞설 것이 없다. (...) 정유재란(1597년) 뒤에는 간신히 마련한 전선의 숫자가 삼도(三道)를 통틀어 60여 척이었으니 각처에 배분하는 데 있어 극히 소홀하여 뜻밖의 사태가 일어날 경우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으니 뉘라서 숫자를 늘리는 것을 바라지 않을까마는 군사가 부족하여 만들지를 못하였다. (...) 신이 늘 격군을 줄일 방도를 생각하다가 기해년(1599년) 순찰사 한효순의 군관이 되어 별도로 전선 25척을 감조(監造)하였을 때, 판옥선도 아니고 거북선도 아닌 다른 모양의 배를 만들었는데 칼과 창을 빽빽이 꽂았으므로 이름을 창선이라 하였다. 격군 42명을 나누어 태우고 바다에 나아가 노를 젓게 하였더니 빠르기가 나는 듯하였고 활쏘기의 편리함도 판옥선보다 나았다. 그 뒤로 나라가 평화로워지자 한 번도 전쟁에 쓰지 않은 채 여러 해를 버려두어 썩어가고 있다. (...)’고 하였습니다. (후략)”
1599년 하반기부터 1600년 초에는 왜군이 재침해 올 것이라는 분위기가 농후하였다. 일본은 히데요시를 옹위하는 세력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돕는 세력으로 양분되어 조선침략이 돌파구로 모색되었다.
전라순찰사 한효순은 왜침을 막으려고 수군 강화부터 했는데, 격군부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1600년 1월 4일에 한효순이 올린 장계를 읽어보자.
“전라 순찰사 한효순이 장계하기를, "전선은 포작(鮑作)이 없으면 운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대가(代價)를 지급하지 않으면 전장(戰場)에 나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처자를 무휼(撫恤)할 만한 가물(價物)을 넉넉히 지급할 일을 행이(行移)하여 알렸습니다.
각처의 포작들이 격군(格軍)으로 동원된다는 영(令)을 듣고는 온갖 계책을 다하여 이를 피하려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처자를 배에다 싣고 먼 해도(海島)로 들어가는 자가 열이면 8∼9명이나 됩니다.
이것이 계속된다면 수군의 일이 마침내 형편없게 될 것이니, 매우 안타깝습니다. (후략) (선조실록 1600년 1월 4일)
이윽고 1월 12일에 전라도 병마절도사겸 장흥도호부사 이광악이 장계하였다.
"(...) 병영(兵營)의 원래 입방(入防)하는 군졸이 평시에는 기병과 보병을 합쳐 한번 입번하는 숫자가 3백 50명인데 난리를 겪은 뒤로는 이들 군사가 겨우 삼 분의 일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은 실정입니다.
내지(內地)의 경우에는 살략(殺掠)당한 것이 더욱 극심했습니다. 바닷가의 나주·장흥·강진·영광·무장·함평 등의 고을은 배를 타고 피난하였기 때문에 간혹 전몰(全沒)한 경우가 있었어도 생존자가 그래도 내지(內地)보다는 나았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병영을 부지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나주 등 6개 고을의 군사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수군을 중히 여기고 육군을 가볍게 여겨 수순의 격군(格軍)을 마련할 적에 병영으로 들어올 여섯 고을 군사의 호보(戶保)를 거의 다 속오(束伍)에 편입시켰습니다.
신은 속수무책일 뿐 아니라 명색은 주장(主將)이지만 일개 별장(別將)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후략) ”(선조실록 1600년 1월 12일)
한편 1월 28일에 좌의정 이항복이 호남과 영남으로 순찰가면서 왜적의 침입에 대한 방비책을 논하는 차자(箚子)를 올렸다.
" (...) 대마도에서 부산에 닿을 경우 정동풍을 만나기만 하면 한번 돛을 올려서 금방 도착하게 됩니다. 이에 의거 말해 본다면 수군의 대진(大陣)을 부산에 설치한 후에, 남은 병력을 나누어 견내량 입구를 지키고 고금도의 전면에 웅거하게 하여야 바야흐로 좋은 계책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수군과 함선이 호남에 견주어 영남이 더욱 단약(單弱)하기 때문에 지금 영남 좌도의 수군을 옮겨다가 부산의 전면을 전담시키고, 우도의 수군을 신지(信地)에서 진을 쳐 양남(兩南)의 요로를 끊게 함으로써 부산의 성원(聲援)이 되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함선의 숫자와 군액(軍額)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막강한 왜적을 을 대적하기에는 부족한 실정입니다.
지금 의논하는 이들은 ‘부산은 이미 적이 나오는 순로(順路)인데 호남의 형세는 위에서 진달한 것과 같으니, 적의 대병(大兵)이 반드시 바다에서 유숙하고 도서(島嶼)에 출몰하면서 부산의 순로를 버리고 위태로운 곳을 거쳐 호남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호남의 수군을 다 철수시켜 부산에 집결시킨 다음 한번 결사전을 벌여 승부를 짓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이 또한 소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성교(聖敎)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곧바로 호남을 공격하여 아군의 후면으로 돌아나올 상황을 더욱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외에도 아주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임진 왜란 이후 호남 연해의 백성들은 한번 수군에 예속되면 죽지 않고서는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본토(本土)를 멀리 떠나서 한산도나 영남의 지역에 가서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호남의 백성들은 수군을 귀굴(鬼窟)로 여기고 있습니다.
군정(軍情)이 이러하기 때문에 지난 병 신년(1596년)과 정유년(1597년) 사이에 조정에서 통제사(統制使)를 독책하여 노량(露梁) 밖에다 진을 치도록 누차 독촉하여 왔습니다만, 수군이 감히 한산도에서 일보도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안골포와 가덕도 이하의 해로(海路)의 형세가 진을 설치하기가 곤란해서일 뿐만이 아니라, 호남의 군정이 일보를 나아가면 그만큼 고통이 가중되고 고통이 가중되면 금방 무너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군정에 따르고 지의(地宜)를 살펴 주저하며 감히 나아가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전라 순찰사 한효순이 통제사 이하 장관(將官)들과 상의하여 경도(鯨島)에 1진(陣)을 설치하고 고금도에 1진을 설치하려 하고 있는데, 비변사에서는 ‘통제사가 멀리 경도에 가 있게 되면 부산·거제도로 오는 적에 대해 성세(聲勢)를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달려가 구원하려 해도 반드시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니, 경상우도 근처로 나아가 주둔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하였습니다.
한효순이 이 때문에 수일 전에 신에게 서신을 보내어 ‘적이 향하는 곳을 어떻게 미리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전함을 영남으로 다 옮기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하였는데, 이것이 상의 분부에 이른바 ‘호남 우도에 중병(重兵)을 주둔시켜야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밖에 또 ‘영남에 나아가 진을 설치한다면 민심이 안정되기 어려운 것은 물론 인력도 지탱하기가 어렵고 군량도 계속 잇대기 곤란하다. 지금의 사세로는 부득불 호남과 영남을 나누어 지키는 것이 득책(得策)이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양남(兩南)은 물력(物力)이 너무도 단약(單弱)하여 두 도(道)의 병력을 합쳐 일면(一面)만을 지키게 하여도 오히려 진(陣)을 이루지 못할 형편인데 여러 진영으로 나누어 주둔시키면 형세가 멀고도 외로와서 수미(首尾)가 서로 돌볼 수 없게 되니, 결국 패전 할 수도 있습니다.
육군의 경우는 더더욱 두서가 없으니 이는 근일 수군에만 전력하고 육군은 돌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형세가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주야로 걱정하면서도 계책을 세울 방법을 모르는 이유인 것입니다.
양남의 근일 형세가 대략 이와 같습니다. 마침 상의 분부를 받들어 신이 멀리 떠나야 하므로 대강 한두 가지를 진달하였습니다.”(선조실록 1600년 1월 28일)
이처럼 1600년 1월의 조선 정세는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7년 전쟁의 피해가 가장 심한 전라도는 더더욱 힘들었다.
주1) ‘능주군읍지(綾州郡邑誌)’에서 ‘羅大用 武朝奉大夫戊戌九月自金溝換拜己亥三月遞’ 확인되므로 나대용은 무술년(1598) 9월부터 기해년(1599) 3월까지 능성현령(綾城縣令)으로 재임하였다. (이수경, 나주 체암(遞菴) 나대용 유적의 현황과 활용방안, 202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