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이순신,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다.
- 작성일
- 2022.11.10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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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61회 이순신,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 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598년 11월 19일 새벽에 조명연합수군이 화공전을 격렬하게 펼치자 마침내 왜군은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왜군은 어둠 속에서 관음포 내항을 바다로 나가는 외양(外洋)으로 오인하고 필사적으로 탈출했다.
이순신은 선두에서 도망가는 왜선을 쫓았다. 해남군수 유형, 당진포 만호 조호열, 진도군수 선의경, 사량만호 김성옥의 함선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날이 서서히 밝아오자 왜군은 넓은 바다가 아닌 관음포 안으로 들어간 것을 알았다. 관음포는 포구 입구에서 안쪽까지 거리가 멀어서 잘못 보면 수평선과 지평선을 혼동하기 쉬운데, 어두운 밤에 치열한 접전 속에서 왜군이 착각한 것이다.
포구 안에 갇혔다는 사실을 안 왜군은 일부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쳤고, 나머지는 조명연합 수군의 포위를 뚫기 위해 사생결단하였다.
이순신은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고 왜군을 몰아붙이자 전투는 더욱 격렬해졌다. 해남 현감 유형(1566~1615)은 조총 6발을 동시에 맞고 쓰러졌다. (유형은 1602년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순신은 화살과 총알이 빗발치는 격전 속에서 직접 북채를 잡고 독전(督戰)려했다. 그런데 갑자기 날아온 적탄이 이순신의 왼쪽 가슴을 관통했다. 치명상이었다.
그러면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쓴 ‘이충무공 행록’을 읽어보자.
“11월 19일 여명(黎明), 공(이순신)이 한참 싸움을 독려하고 있었는데, 문득 날아드는 총알에 맞았다. 공은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 ”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다.
이때 공의 맏아들 아들 회과 조카 완이 활을 잡고 곁에 있다가 울음을 참고 서로 말하였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다니, 망극, 망극하구나”
“그렇지만 지금 만일 곡성(哭聲)을 냈다가는 온 군중이 놀라고 적들이 이 틈을 타서 기세를 올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시체를 보전하여 돌아갈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저 참으면서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그리고는 곧 시체를 안아 방으로 모시니, 오직 공을 모시고 있던 종 김이(金伊)와 회, 완 세 사람만 알 뿐이요, 공이 친하게 믿고 지냈던 송희립 등도 알지 못했다.
(회와 완)두 사람은 다시 기를 휘두르며 싸움을 독려하였다.
왜적이 도독 진린의 배를 에워싸서 거의 함몰당하게 되자, 여러 장수들은 공의 배에서 독전(督戰)하는 것을 보고 서로 다투어 달려들어 포위 속에서 도독의 배를 구하였다. 싸움이 끝났다.”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제4권, 비봉출판사, 2006, p 358-359 ; 최원식 지음, 이순신을 찾아서, 돌베개, 2020, p 359-360)
노량해전은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정오 무렵에 조명수군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 수군은 200척이 침몰당했고 100여척이 나포되었으며, 온전하게 도망친 왜선은 50척에 불과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함선은 반파 상태가 되어 창선도를 거쳐 가까스로 도망쳤고, 다치바나 ·소 요시토시· 데라자와 등도 겨우 거제도까지 철수하였으나 암초 또는 얕은 여울에 좌초한 배도 많았다.
시마즈의 부장인 키이레 세주노카미 등은 격전 끝에 군사 500명을 이끌고 배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반사반생으로 헤엄쳐서 남해도에 기어 올라갔다.
이들은 소 요시토시가 만든 왜성에 잠복하고 있다가 뗏목을 만들어 타고 창선도로 도망쳤다.
한편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는 자신을 구하려 온 왜군이 몰살당하는 중에 묘도 서쪽 수로를 통과하여 남해도 남쪽으로 우회하여 부산으로 탈출했다.
전투가 끝나자 진린이 이순신의 배에 가까이 다가와 왜군에 포위된 그를 도와준 것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려고 “통제사, 속히 나오시오. 속히 나오시오.”라고 외쳤다. 이순신의 조카 완이 뱃머리에 서서 울면서 “숙부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진린은 세 번이나 쓰러지더니, “나는 공이 손수 나를 구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찌하여 죽었단 말이요?”하고 가슴을 치면서 한참이나 통곡하였다. 그러자 곁에 있던 군사들도 슬퍼하니 군사들의 울음소리가 온 바다를 울렸다.
노량해전에서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가리포 첨사 이영남도 전사하였다. 나중에 이영남은 완도 고금도 충무사에 이순신과 함께 신위가 모셔졌다.
‘호남절의록’에는 이설, 정기수, 나치용(나대용의 종제), 오용운, 오극성, 남병, 나득룡, 김몽성, 이충실, 김덕방, 김예의, 김득효 강극경, 이덕수, 김득룡, 이응춘, 신인수, 김두흥, 이덕경, 김말동, 김백운 등도 전사자로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 부총병 등자룡과 진잠의 부장 도명재 등 명나라 수군도 상당수 전사하였다. 조선 수군 전함은 4척, 명군은 2척이 침몰되었다.
이은상이 지은 ‘체암 나대용 장군 기적비문’엔 이렇게 적혀 있다.
“마지막 무술년 11월 노량해전에서는 이순신과 종제 치용이 순국하므로 (나대용)장군은 통곡하기를 마지 못했다.”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p 324)
우연하게도 이순신이 순국한 11월 19일에 류성룡이 파직당했다. 안동으로 낙향한 류성룡은 1604년에 ‘징비록(懲毖錄)’을 썼다.1)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징계하는 의미였다.
징비록 ‘서문’을 읽어보자.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 아아, 임진년의 재앙은 참으로 가혹하였다. 수십일 사이에 한양 개성 평양 세곳의 도성을 지키지 못하였고 팔도가 우르르 무너져 임금께서 난을 피해 한양을 떠나게 되셨다.
이러한 일을 겪고도 지금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하늘이 도와주신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지난 일을 경계하여 앞으로 후환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징비록을 지은 까닭이다. ”(류성룡 지음·오세진 외 2인 역해, 징비록, 2015, p 17) 2)
한편 부산에 집결한 왜군은 차례로 일본으로 철수하여 11월25일 저녁엔 단 한 사람의 왜군도 부산에 없었다. 이로써 만 6년 7개월 12일 계속된 임진왜란은 종말을 고했다.
# 이순신의 장례와 추모
1598년 11월 1일의 선조수정실록을 읽어보자
“(...)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수군을 거느리고 그들(고니시 왜군)의 구원병을 크게 패퇴시켰는데 순신은 그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순신이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다 날아온 탄환에 가슴을 맞았다. 좌우(左右)가 부축하여 장막 속으로 들어가니, 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하고, 말을 마치자 절명하였다. 순신의 형의 아들인 이완(李莞)이 그의 죽음을 숨기고 순신의 명령으로 더욱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군중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진린이 탄 배가 적에게 포위되자 완은 그의 군사를 지휘해 구원하니, 적이 흩어져 갔다. 진린이 순신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구해 준 것을 사례(謝禮)하다 비로소 그의 죽음을 듣고는 놀라 의자에서 떨어져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였고, 우리 군사와 중국 군사들이 순신의 죽음을 듣고는 병영(兵營)마다 통곡하였다.
그의 운구 행렬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모두 제사를 지내고 수레를 붙잡고 울어 수레가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조정에서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했고, 바닷가 사람들이 자진하여 사우(祠宇)를 짓고 충민사(忠愍祠)라 불렀다. ”
그랬다. 이순신의 유해는 관음포에서 가까운 남해 충렬사에 임시로 안치되었다가 바닷길로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는 고금도로 이송된 후에 아산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백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통곡하면서 그 뒤를 따랐다. 선비들은 제물을 차리고 제문을 지어 곡을 하였는데 슬퍼하기를 마치 친척의 죽음 맞이 하듯이 하였다.
1599년 2월 11일에 이순신은 아산 음봉면 금성산 밑에 묻혔다. 묘터를 잡아 준 이는 풍수지리에 능했던 명나라 무장 두사충이었다. 이후 16년이 지난 1614년에 이순신은 지금의 어라산 아래로 이장되었다.
한편 전라좌수영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충민사를 지었고, 1600년에 사액되었으며, 전라우수사 이억기·보성군수 안홍국이 배향되었다.
1603년 가을에 전라좌수영 수졸들이 이순신을 그리워하며 타루비(墮淚碑 보물 제1288호)를 세웠다. 글자 그대로 ‘눈물이 떨어진다’는 이 비는 여수시 고소대에 있는데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 장수 양호의 고사를 인용하여 비를 세웠다. 이 비는 일제 강점기에 행방불명되었다가 광복후 경복궁에서 발견되었다. (김대현 지음, 충무공 이순신, 예맥, 2014, p 137-139)
이순신은 1604년 10월에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1643년에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1793(정조 17년)에 영의정으로 가증되었다.
# 임진왜란 여파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지축을 뒤흔들었다.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추종세력을 물리치고 패권을 장악했다. 고니시는 패하여 죽임을 당했고,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은 멸문지화 당했다. 중국에선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청나라를 세웠다.
전쟁터인 조선은 피해는 처참했다. 기근·전염병·포로 등으로 인구가 격감하고 국토는 황폐해졌다. 인구는 1591년의 1,300만 명이 1598년에는 1,085만 명으로 215만 명이 감소하였다. 서책·도자기·불상 등 각종 문화재도 불타거나 약탈당했다.
또한 왜군들은 수많은 조선인을 일본으로 끌고가 노예처럼 부리고 나가사키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팔아먹기도 하였다. 일본에 잡혀간 조선 포로는 최소한 1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한편 조선은 명나라를 재조지은(再造之恩, 거의 망하게 된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으로 섬겼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친명(親明)으로 일관했다. 이러자 1627년에 정묘호란, 1636년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 태종에게 신하의 예를 갖췄고 두 왕자와 수십만 명의 백성들이 중국으로 끌려갔다. 1644년에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했다.
그러나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고 유명조선(有明朝鮮)을 외치며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외면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312년 된 1910년에 일본을 조선을 강점했다. 조선은 35년간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 징비록은 1695년에 일본 교토에서 ‘조선징비록’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2) 임진왜란을 징비(懲毖)하자. 단재 신채호가 말했듯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참고문헌 )
o 김대현, 충무공 이순신, 예맥, 2014
o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제4권, 2006
o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세창문화사, 2015
o 제장명, 이순신 백의종군, 행복한 나무, 2011
o 최원식 지음, 이순신을 찾아서, 돌베개,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