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순천 왜교성 전투 (3)
- 작성일
- 2022.11.10 14:07
- 등록자
- 문화예술과
- 조회수
- 298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59회 순천 왜교성 전투 (3)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 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1월 초에 도원수 권율이 유정이 예교로 출발하였음을 치계하였다.
"유제독이 11월 1일 다시 공격하기 위해 예교(曳橋)로 출발하였고, 진유격의 군대는 다음날 떠났습니다. 마병(馬兵)도 다시 공격하려 한다고 하지만 아직 기일(期日)을 정하지 않고 있는데 현재 왕참정(王參政)과 비밀리에 모의하여 고니시와 강화(講和)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신들에게는 ‘저들을 속여 소굴에서 나오게 해서 바다 건너는 것을 기다려 협공하려고 한다.’고 말 하나, 사실은 구차하게 수습하려는 계책인 바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선조실록 1598년 11월 11일)
당시에 고니시는 유정과 은밀하게 화의를 진행하였다. 고니시는 유정에게 순천왜성을 고스란히 물려주기로 하고 철수를 보장받고자 했다. 유정도 긍정적이었다.
11월 9일에 이순신은 도독 진린과 함께 고금도를 떠났다. 조명 연합함대는 10일 전라좌수영 앞바다에서 도착하여 11일에 순천 앞 유도에 진을 쳤다.
13일에 고니시는 왜선 10척을 선발대로 출항시켰다. 고니시는 유정에게 뇌물을 주어 왜군 철수를 보장받은 상태이어서 조명 수군도 눈감아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진린과 이순신을 계산에 넣지 않은 고니시의 착각이었다.
이순신은 장도(獐島 여수시 율촌면 장도, 일명 노루섬)에 나타난 왜선 10척을 추격하였다. 왜군 선발대는 조명연합함대에 걸려 퇴각하고 말았다.
이윽고 이순신은 진린과 함께 예교성이 바로 보이는 장도에 진을 쳤다. 이로써 고니시의 바닷길은 완전히 봉쇄되고 말았다.
분개한 고니시는 왜교성에 인질로 머문 명군 40명을 구속하고, 그중 2명의 팔을 잘라서 유정에게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러자 유정은 진린에게 말했다.
“고니시가 군사를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풀어 보냄이 좋겠소.”
진린은 유정에게 답하였다.
“수군과 육군은 각각 책임이 다르니 각자 행동하는 것이 좋겠소.”
이에 유정은 고니시에게 “진린이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 진린을 설득하라”고 말했다.
이윽고 고니시는 진린에게 은 1백 냥과 보검(寶劍) 50구를 보내며 “전쟁에는 피를 보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길을 내주어주어 환국하게 해 주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진린은 고니시에게 수급 2천을 주면 길을 열어주겠노라고 대답하였다.
이즈음 유정이 왜병에 대한 계책을 아뢰는 게첩을 올렸다.
"왜노(倭奴)가 웅거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누구도 그들의 진영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불녕(不佞)이 북을 치고 나아가 그들의 중심부까지 쳐들어가 약간의 참획(斬獲)이 있었으니, 어찌 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만 기특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성은 여러 겹이고 해자는 깊으며 총탄은 비오듯 하는데 온갖 계책으로 도전하여도 성을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으므로 불녕은 10여 일이나 침식(寢食)을 폐하여 괴로움이 극심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중로(中路)의 보고(중로군 동일원이 사천에서 시마즈에게 패한 일)및 불녕과 귀 방의 초탐병(哨探兵)이 정탐한 보고에 왜적의 구원병이 두치강(頭恥江 하동군 하동읍 서쪽의 섬진강을 이르는 말)등지에 이르렀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는 반드시 우리의 후방을 차단하려고 하는 것이기에 잠시 순천 왜교에서 철수하여 왜적을 유인해서 별도로 조처하려 합니다. “
(선조실록 1598년 11월 14일)
11월 14일에 왜선 두 척이 강화하자고 바다 가운데까지 나왔다. 도독 진린이 일본어 통역관을 시켜 조용히 왜선을 맞이하여 붉은 기(旗)와 환도 등 물건을 조용히 받았다. 오후 8시에 왜장이 작은 배를 타고 도독부로 들어와서 돼지 두 마리와 술 두 통을 도독에게 바치고 갔다.
그런데 이 날 진린은 왜군 통신선 1척을 남해 쪽으로 보내주고 말았다. 여기에는 왜군 8명이 타고 있었다.
이것이 노량해전의 시발이었다. 고니시가 순천 왜성에 고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왜군이 곧바로 고니시 구출 작전에 나설 것은 뻔하였다. 더구나 남해에 머물고 있는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의 사위였다.
11월 15일 이른 아침에 이순신은 진린에게 가서 잠시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왜선 두 척이 강화하자고 두 번 세 번 진린의 진중으로 드나들었다.
11월 16일에 진린은 부하 장수이며 조카인 진문동(陳文同)을 왜군의 진영에 들여보냈다. 얼마 뒤 왜의 사신이 배 세 척에 말 한 필과 창, 칼등을 가져와서 진 도독에게 바쳤다. 이후 왜의 사자(使者)들이 도독부에 끊임없이 왕래하였다.
이윽고 진린은 이순신에게 화친을 허락해 주도록 부탁하였다.
이러자 이순신이 말했다.
“대장된 사람은 화친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 원수를 결코 놓아 보낼 수는 없습니다.”
진린은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왜의 사자가 또 오자 진린이 말했다.
“내가 너희 왜인들을 위하여 통제사에게 말을 했다가 거절을 당했다. 이제 두 번 다시 말할 수 없다.”
이러자 고니시는 이순신에게도 뇌물을 바쳤다. 한밤중에 조총과 일본 도검등 선물을 가지고 와서 간절히 청했다.
이순신은 이를 물리치며 야단쳤다.
“임진년 이래로 무수히 많은 적들을 잡아서 얻은 총과 칼이 산처럼 높이 쌓였는데 원수의 심부름꾼이 여기서 뭣하려 찾아온다 말이냐?”
이러자 왜군 사자는 아무말도 못하고 돌아갔다.
조금 있다가 고니시가 또 사람을 보내어 “조선 수군은 마땅히 명나라 수군과는 다른 곳에 진을 쳐야 할 터인데 같은 곳에 진을 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다. 이러자 이순신은 “우리 땅에서 진을 치는 것은 우리 마음이다. 너희 적들이 알 바가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조금 후에 진린은 이순신에게 말했다.
“나는 잠시 이곳의 고니시는 내버려 두고, 먼저 남해에 있는 왜적들을 토벌하러 가고자 하오”
이순신이 말하였다.
“남해에 있는 자들은 모두 적에게 포로로 잡혀간 우리 백성이지 왜적이 아니오”
진 도독이 다시 말했다.
“이미 적에게 붙은 이상 그들 역시 왜적이오. 이제 그곳으로 가서 토벌한다면 힘도 안 들이고 머리를 많이 벨 수 있을 것이요”
이순신이 대꾸했다.
“황상(명나라 황제)이 왜적을 무찌르라고 명령하신 것은 작은 나라(小邦)의 백성들의 생명을 구하시기 위해서였소. 그런데 구해내지는 않고 도리어 그들을 죽이겠다는 것은 황상의 본의가 아닐 것이오”
도독은 화를 내며 “우리 황제께서 내게 장검(長劍)을 내려주셨소”하고
이순신을 위협하였다.
이순신은 다시 “한번 죽는 것은 아까울 것이 없소. 나는 대장으로서 결코 적을 놓아주고 우리 백성을 죽일 수는 없소” 하였다.
이처럼 진린과 이순신은 한참동안 다투었다.
(이분의‘이충무공 행록’;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제4권, 2006, p 356-357 )
이후 진린이 이순신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밤이면 천문을 보고 낮이면 사람의 일을 살펴봤는데, 동방에 대장별이 희미해져 가니 멀지 않아 공에게 화가 마칠 것입니다. 공이 어찌 이를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어찌하여 무후(武候 제갈량)의 예방하는 법을 쓰지 않으십니까?”
11월 17일에 이순신은 진린에게 답장을 보냈다.
“저는 충성이 무후(武候)만 못하고, 덕망이 무후만 못하고, 재주가 무후만 못합니다. 세가지 모두 다 무후만 못하므로 비록 무후의 법을 쓴다 한들 어찌 하늘이 들어줄 리 있겠습니까?
(답진도독린서 答陳都督璘書, 이 답서는 중국 청산도에 있는 진린 도독 비문에 새겨져 있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제4권, p 225-226)
이 날 초저녁에 고니시가 봉화를 올려서 남해에 있는 적들과 서로 연락 하였다. 고니시가 구원을 요청하고 남해의 왜군이 호응 한 것이다.
이에 이순신은 군관 송희립과 해남현감 유형 등 여러 장수를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먼저 송희립이 말했다.
“순천왜성의 왜군을 구하기 위하여 시마즈 등의 왜군이 구하러 올 것입니다. 순천을 포위하고 있는 형태로 구원군에 대처한다면 앞 뒤 양쪽에서 적을 맞는 것이 되므로 바깥 바다로 전선을 움직여 전투를 벌여야만 합니다.”
이어서 해남현감 유형도 거들었다.
“왜군 구원군을 먼저 격퇴하고 나서 고니시의 귀로를 차단하여야 합니다.”
마침내 이순신은 남해 쪽으로 출전하여 구원군부터 격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날(11월 17일) 이순신은 생애 마지막 ‘난중일기’를 썼다.
“어제 복병장인 발포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등이 왜의 중간 배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쫓아 나갔던 일을 보고하였다. 왜적은 한산도에서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