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순천 왜교성 전투 (2)
- 작성일
- 2022.11.10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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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58회 순천 왜교성 전투 (2)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 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598년 10월 7일에 명나라 제독 유정은 왜교성의 포위를 풀었다. 9일에 유정은 각종 무기와 군량 수천 석을 방치한 채 남원 부유창(富有倉)으로 완전 철수하고 말았다.
이순신도 진린과 함께 10일에 전라좌수영, 12일에 나로도에 도착하여 고금도 진영으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조명연합군의 왜교성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10월 12일에 우의정 이덕형이 중국군의 패전에 관하여 치계하였다.
"제독이 밤을 틈타 철수하자 군대가 뿔뿔이 흩어져 왜교(倭橋)에서부터 순천에 이르기까지 쌀이 길바닥에 낭자하였고 왜교에 남은 식량도 아직 3천여 석이나 되었는데 모두 불태우라고 명하였으나 타지 않은 것은 왜적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철수할 때 수군은 조수를 이용해서 전진하여 성을 공격하려고 하였습니다. 금번의 거사(擧事)에 우리 군사는 거의 1만 수천 명이나 되었고 성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도 매우 훌륭하였는데, 적의 성을 한쪽도 무너뜨리지 못하고 도리어 적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였으며 적에게 식량을 제공하였으니, 아픈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선조실록 1598년 10월 12일)
10월 14일에 선조는 비변사에 전교하면서 ‘유 제독에게 배신당한 것 같다. 유 제독이 일부러 힘써 싸우지 않았고 우리 나라 장수가 싸우기를 청해도 듣지 않았다’고 하였다. (선조실록 1598년 10월 14일)
10월 16일에야 유정은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왜교로 나아가 군대를 사열하였다. (조경남의 ‘난중잡록’)
이즈음에 일본 특사는 왜군 지휘관들에게 11월 15일까지 부산으로 철수하여 귀국하라는 지시문을 전달했다. 장생포의 가토, 사천성의 시마즈,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는 철수 준비에 들어갔다.
이에 고니시는 유정과 은밀하게 화의를 진행하였다. 내용은 유정에게 순천왜성을 고스란히 물려주기로 하고 철수를 보장받는 것이었다.
이 때 유정은 오광 부총병에게 40명을 내주어 왜교로 들여보내니 고니시는 크게 연회를 베풀었다. 오광은 함께 간 사람들을 넘겨주고 화친의 일을 의논하고 돌아왔다.
11월 2일에 좌의정 이덕형이 유정의 전투 상황에 대해 치계하였다.
"제독이 수군에게 순천으로 전진할 것을 재촉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김수·권율 등과 계책을 물었더니, 유 제독이 말하기를 ‘2일이나 3일에 이곳의 병마(兵馬)를 출발시켜 순천 근처에 나아가 주둔하여 그곳에 있는 병마와 합세하라. 나는 하루나 이틀 지나 장비를 검열하고 사체(事體)를 헤아려 수군과 거병을 약속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반드시 장비를 완비하고 계책을 결정하여 수군과 육군이 일제히 거병한 후에야 적의 성 밑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소인이 보건대 수군이 왜적을 죽이지 못하자 마음이 사그러진 재와 같이 생기가 없으니, 삼군(三軍)의 사기를 진작시켜야 한다’고 말하니 제독은 ‘그때에는 왜적을 위협하여 추격하여서 성 밑까지 쫓아 들어가려고 한 것이고 성을 공격할 계획은 하지 않았다. 지금 만약 나아가지 못한다면 마땅히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제독이 말은 이렇게 하여도 일처리 하는 것을 보면 한결같이 교만하고 경솔하며 돈과 여자를 좋아할 뿐입니다. 그래서 여러 장수들은 그를 하찮게 여겨 두려워 하지 않고 있으니 더욱 염려스럽습니다.
이방춘 부총과 우백영 유격 등의 경우는 더욱 싸우려는 뜻이 없어서 늘 적의 진을 뒤에 두고 진군하기가 불편하다고 말하여 의심하는 마음을 부추기고 또 남원에서 거느리던 기생을 진중으로 데리고 왔으므로 편장(褊將)과 군사들도 다투어 여자를 데리고 다녀 진중이 문란하기 비길 데 없습니다. 이는 모두 대장이 계획을 정하지 않고 법이 엄격하지 않은 까닭이니 보기에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신이 남해의 일로 도독 진린에게 은밀히 고하였더니, 도독이 신의 말을 옳게 여겼지만 그래도 순천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하면서 신의 군관을 불러 조용히 재거(再擧)할 뜻을 말하기를, ‘나는 다시 왜적의 성을 공격하려고 하는데, 유모(劉某 유정)가 약속을 어기고 싸우지 않으면, 내가 조그마한 배를 타고 가서 유모의 머리를 벤 다음 반드시 고니시를 죽이겠다.’고 했다 합니다. " (선조실록 1598년 11월 2일 4번째 기사)
이 날 선전관 허전도 중국 군대의 전투 상황에 대해 아뢰었다.
"(...) 제독이 남원 부유창에 주둔하니 이방춘 부총(副摠)은 제독을 따르고 오광 부총은 순천성 안에 진을 쳤으며, 조희빈 부총·사유격(司遊擊)·왕 유격·우유격과 전라 방어사 원신은 순천성에서 5리쯤 되는 곳에 진을 쳤고, 부유격(傅遊擊)과 충청 병사 이시언은 구례에 진을 치고 각 진영의 장수들이 날마다 기병 1백여 명을 보내 왜적의 굴 밖에서 정탐하게 하였는데, 하루는 적이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몰래 기병을 내보내 갑자기 습격하려고 하는데, 뒤에 있던 중국 군사가 소리를 치며 돌격하니 왜적이 달아나 도로 소굴로 들어가 다시 나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유 제독이 요양(遼陽)의 기생 하나를 데리고 왔고 또 우리나라의 여자가 왜적의 소굴에서 나와 오 부총병의 진영에 도착했는데, 유 제독이 그 여자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또 불러들여서 모두 남자의 복장을 입히고 수행하게 하니, 휘하의 장수들이 분개한다고 합니다.
신이 왕참정(王參政)의 진영에서 들으니, 중국인 오자화라는 자가 왜적의 소굴에 들어가 고니시를 보니, 고니시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미 죽고 국가에 큰 변고가 있어서 내가 들어갈 것이다. 원컨대 도사(都司) 오종도를 인해 제독 유정을 뵙고 10월 28일에 즉시 철병하겠다.’고 하므로 10월 22일에 오종도가 적중(賊中)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1598년 11월 2일 3번째 기사)
이 날의 실록 말미에는 사신(史臣)의 논평이 실려 있다.
“고시(古詩)에 ‘여자가 군중에 있으면 사기가 드높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여색(女色)의 해는 사람의 마음을 고혹시키고 일을 실패하게 한다. 비록 평시라도 경계해야 하는데 더구나 적진과 대치하고 전쟁할 때이겠는가. (...) 유정이 황제의 명을 받아 만 리나 되는 곳에 출정하여 몸소 삼군(三軍)의 무리를 거느리고 왜적과 30리 거리에 대치하고 있는바 성패 존망(存亡)이 순간 사이에 달려 있는데도 요양의 기생과 적진의 요사한 계집을 좌우에 두고 있으니, 군사들이 분개하여 싸움할 뜻을 잃고 교전도 하기 전에 먼저 패해 도망가 기(旗)를 버리고 종적없이 흩어져서 수습할 수 없게 된 것이 당연하다. (...) 황제가 위임시켜 보낸 명령을 저버린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11월 7일에 선조는 비망기로 승정원에 전교하였다.
(선조실록 1598년 11월 7일 3번째 기사)
“지금 유 제독이 다시 진군을 도모하니 관계된 바가 막중하다. 반드시 내가 몸소 남쪽으로 내려가 그 뒤에서 책응(策應)해야 군량 수송과 군사 모집에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장수가 듣고 마음 쓰기를 달리할 것이다. 목숨이 끊기지 않았는데 어찌 물러나 있겠는가. 이 뜻을 군문에게 고하고 모든 일을 미리 준비하여 빠른 시일에 내려가게 할 것을 비변사에게 말하여 속히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이날의 실록 말미에는 사관의 논평이 실려 있다.
“사신은 논한다. 왜적은 만세(萬世)토록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아갈 수가 없는 자들이니, 임금이 몸소 삼군(三軍)을 통솔하여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용감하게 적진을 공격한다면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수 있을 것이고, 씩씩한 무사로서 누구인들 왕의 선봉이 되어 싸우려고 하지 않겠으며, 다투어 시석(矢石)의 아래에서 죽으려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임진왜란 때는 왜적이 서울에 이르지도 않아서 대가(大駕)가 이미 서쪽으로 파천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왜적이 겨우 남쪽 변방에 이르자 내전(內殿)이 먼저 황해도로 옮겨갔다.
7년 동안 행한 모든 일이 구차하게 보전하려는 계책뿐이었고, 쇄신 분발하여 적을 섬멸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리를 진작시키지 않았으니, 지금 비록 남쪽으로 내려가겠다는 하교(下敎)가 있지만, 신은 믿어지지 않는다.”
한편 완도 고금도에 머물고 있는 이순신은 11월 9일에야 진린과 함께 수군을 움직였다.
11월 8일과 9일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10월 13일부터 11월 7일까지의 난중일기는 빠져 있다.)
11월 8일
명나라 도독부를 방문하여 위로연을 베풀었다. 하루 내내 술을 마시고 어두워서야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도독 진린이 보자고 청하였다. 바로 갔더니 도독이 “순천왜교의 적들이 11월 10일 사이에 철수하여 도망간다는 기별이 육지로부터 왔습니다. 급히 진군하여 돌아가는 길을 끊어 막자.”고 하였다.
11월 9일
진 도독과 함께 일시에 군대를 움직여서 백서량(여수시 남면)에 이르러 진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