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 작성일
- 2022.11.04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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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49회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7월 18일 새벽에 도원수진 합천에서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전몰 소식을 들었다. 그는 통곡했다. 조금 있다가 도원수 권율이 이순신을 찾아왔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권율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일이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그러자 이순신은 “내가 해안지역으로 가서 직접 보고 듣고 한 후에 대책을 세우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권율은 매우 반가워하며 승낙하였다.
이순신은 지체 없이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 등 군관 9명과 함께 길을 떠났다.
7월 21일에 이순신은 노량에 이르렀다.
이 날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 (...) 점심을 먹은 뒤 노량에 이르니, 거제현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10여명이 그에게 와서 통곡하였다. 또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경상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았다. 우후 이의득이 보러왔기에 만나서 패한 상황을 물어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기를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육지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육지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원균의 잘못은 말로 다 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 먹고 싶다”고 하였다. 거제 소속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현령 안위와 새벽 2시까지 이야기하였다.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
7월 22일 아침에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순신을 보러 왔다. 배설은 이순신에게 원균이 패하여 죽은 사실을 장황하게 말하였다.
이 날 조정에선 비로소 칠천량 패전 보고를 받고 선조 주재 하에 어전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이순신을 전라좌수사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했다.
23일 아침에 이순신은 공문을 작성하여 송대립에게 주어 합천의 권율 원수부에 보냈다. 24일부터 26일까지 이순신은 이홍훈(하동군 육종면)의 집에 머물면서 사람들을 만났다.
27일에 이순신은 정개산성 건너편에 있는 손경례의 집(진주시 수곡면 원계리)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진주목사·남해현령 등과 대책을 논의하면서 6일간 머물렀다.
8월 3일 이른 아침에 이순신은 뜻밖에 선전관 양호로부터 교서(敎書)와 유서(諭書)를 받았다. 그 내용은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교서의 제목은 '상중에 다시 3도 통제사를 임명하는 교서(起復授職 三道統制使 敎書)'이다. 1)
“임금은 이와 같이 이르노라. 아! 나라가 의지하여 보장으로 생각해 온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고 다시 흉한 칼날이 번득이게 함으로써 마침내 우리 대군이 한 차례의 싸움에서 모두 다 없어졌으니, 이후 바닷가 여러 고을들을 그 누가 막아낼 수 있겠는가. 한산도를 이미 잃어 버렸으니 왜적들이 무엇을 꺼려하겠는가.
초미의 위급함이 조석으로 닥쳐온 상황에서 지금 당장 세워야 할 대책 은 흩어져 도망간 군사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배들을 거두어 모아 급히 요해처에 튼튼한 큰 진영을 세우는 길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도망갔던 무리들이 돌아갈 곳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한참 덤벼들던 왜적들 또한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위엄과 은혜와 지혜와 재능에 있어서 평소 안팎으로 존경을 받던 이가 아니고는 이런 막중한 임무를 감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하건대 그대의 명성은 일찍이 수사로 임명되던 그 날부터 크게 드러났고, 그대의 공로와 업적은 임진년(1592년)의 큰 승첩이 있은 후부터 크게 떨쳐 변방의 군사들은 마음속으로 그대를 만리장성처럼 든든하게 믿어 왔었는데, 지난번에 그대의 직책을 교체시키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이고 백의종군하도록 했던 것은 역시 나의 모책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며, 그 결과 오늘의 이런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더 무슨 말을 하리오! 더 무슨 말을 하리오!
이제 짐은 그대를 상복 중에 기용하고 또 그대를 백의 가운데서 뽑아내어 다시 옛날같이 전라좌수사 겸 충청·전라·경상 3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바이니, 그대는 부임하는 날 먼저 부하들을 불러 어루만져 주고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찾아내어 단결시켜 수군 진영을 만들고 나아가 형세를 장악하여 군대의 위풍을 다시 한 번 떨치게 한다면 이미 흩어졌던 민심도 다시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며, 적들 또한 우리 편이 방비하고 있음을 듣고 감히 방자하게 두 번 다시 들고 일어나지 못 할 것이니, 그대는 힘쓸 지어다.
(...) 그대는 충의의 마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나라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나의 소망을 이루어주기 바라면서, 이에 교서를 내리노니 그렇게 알지어다.”
이순신은 숙배를 한 뒤 삼가 받았다는 서장(書狀)을 써서 봉해 올리고, 곧바로 전라도로 향했다. 수하에는 군관 9명과 졸병 6명뿐이었다.
이순신이 광양 두치를 거쳐 석주관(구례군 토지면)에 이르자, 구례현감 이원춘이 복병하고 있다가 이순신을 보고는 적을 토벌할 일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날이 저물어 구례현에 이르니 경내 전체가 적막하였다. 성 북문 밖(구례군 구례읍 봉북리)의 옛날 머물렀던 집에서 여장을 풀었는데 주인은 피난을 갔다. 곧 손인필이 찾아왔는데 곡식까지 지고 왔으며 손응남은 때 이른 감을 바쳤다. 2)
한편 7월 하순에 왜군은 울산 죽도성에서 회의를 열고 우군과 좌군으로 나누어 전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전라도부터 침공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이 따른 것이었다. 우키타 · 고니시 · 시마즈 등이 이끄는 5만 6천 명의 좌군은 하동, 구례, 남원을 거쳐 전주에 도착하고, 모리 히데모토와 가토가 이끄는 6만 명의 우군은 거창, 진안을 거쳐 전주로 가도록 하였다. 8월 3일에 왜군은 진주를 함락시키고 하동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8월 4일
이순신 일행은 압록강원(곡성군 죽곡면 압록리)에 이르러 점심밥을 짓고 말의 여물을 먹였다. 고산 현감(전북 완주군 고산면)이 군사들을 넘겨주기 위해 왔다가 수군에 관한 일을 많이 말했다. 오후에 이순신이 곡성에 이르니 관아와 여염집들이 온통 비어 있었다. 이순신은 곡성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8월 5일
아침 식사 후에 옥과(곡성군 옥과면) 경계에 이르니 피난민들이 길에 가득 찼다. 이순신은 말에서 내려 이들을 타일렀다. 피난민들은 울부짖고 곡하면서 말하기를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이제 우리는 살았다”고 하였다.
옥과현으로 막 들어설 때 이순신은 이기준 부자를 만났다. 이기준은 거북선 돌격장을 한 사람이다. 고을에 이르니 정사준과 정사립이 마중 나와 함께 이야기 하였다. 옥과현감 홍요좌는 처음엔 병을 핑계 대고 나오지 않다가, 잡아내어 처벌하려고 하니 찾아왔다.
8월 6일
이순신은 옥과에 머물렀다. 송대립(송희립의 형)은 왜적의 동태를 시시각각 파악하여 이순신에게 동향 보고하였다. 한편 전쟁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고니시의 좌군은 사천·남해 등지를 분탕질하고, 가토의 우군은 초계·함안을 통과하였다. 진주 목사는 정개산성을 버리고 경상우병사는 악견산성을 버렸다. 전라병사 이복남은 퇴각하여 옥과로 향하였다.
8월 7일
이순신은 일찍 떠나 곧바로 순천으로 갔다. 이순신은 길에서 선전관 원집을 만나 밀지를 받았다. 전라병사 이복남의 군사들은 모두 도망가고 있었다. 이순신 일행은 이들에게서 말 3필과 활과 화살 약간을 빼앗았다. 이순신은 곡성 강정마을(곡성군 석곡면 유향리)에서 잤다.
8월 7일에 고니시의 왜군은 구례를 점령하였다. 석주관을 지키고 있던 구례 현감 이원춘은 적의 기세에 눌려 남원으로 퇴각했다. 이 때 구례 의병들은 석주관을 지키다 순절했다.
이순신과 왜군은 간발의 차이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왜군은 남원으로 향하고, 이순신은 곡성에 머물렀다.
8월 8일
새벽에 곡성을 떠난 이순신은 부유창(순천시 주암면 창촌리)에서 아침을 먹었다. 부유창은 전라병사 이복남이 명령하여 불을 질렀기 때문에 재만 남아 있었다.
광양현감 구덕령, 나주 판관 원종익 옥구현감 김회온 등이 부유창 아래에 있다가 이순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급히 달아났다. 이순신이 말에서 내려 명령을 내리자 한꺼번에 나와 절을 하였다. 이순신이 왜 이리저리 피해 다니기만 하느냐고 크게 꾸짖자, 그들은 모두 그 죄를 전라병사 이복남에게 돌렸다. 3)
이순신 일행은 저녁 때 순천에 이르니 성 안팎에 인적이 드물었다. 스님 혜희(惠熙)가 이순신을 찾아와서 인사하였다. 이순신은 그에게 승병장 직첩을 주었다.
순천부에는 관청과 창고에 곡식과 군기 등이 그대로 있었다. 달아난 병사들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결과였다. 이 일은 오히려 이순신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처음으로 군수품을 얻은 것이다. 이순신은 병기 가운데 장편전은 군관들을 시켜 짊어지게 하고, 총통과 같이 운반하기 어려운 것은 깊이 땅에 묻고 표시를 하도록 하였다.
8월 9일
이순신 일행이 일찍 길을 떠나 낙안(순천시 낙안면)에 이르니 많은 사람들이 5리까지 나와서 환영하여 주었다. 백성들은 이순신이 다시 왜적을 물리쳐 주길 기대하고 있다.
이어서 도망가는 많은 백성들을 보았다. 까닭을 물어보니 모두들 말하기를 “전라병사 이복남이 왜적이 가까이 왔다고 미리 겁을 먹고는 창고에 불을 지르고 물러갔기 때문에 백성들도 흩어져 도망간 것”이라고 하였다. 관청에 들어갔더니 인기척이 전혀 없었고, 관청 건물과 창고와 병기들이 모두 다 타버린 뒤였다.
오후에 이순신 일행은 길을 떠나 십 리쯤 가니 늙은이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다투어 그들에게 술병을 바쳤다. 이순신 일행이 술을 받지 않자 노인네들은 울면서 강제로 권하였다.
이순신은 보성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순천부사 우치적과 김제군수 고봉상이 합류하였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은 ‘이순신 행록’에서 ‘8월 3일에 진주에서 출발할 때 15명밖에 안 된 군사가 순천에서는 60명이 되었고 보성에 이르렀을 때는 120명으로 늘어났다.’고 적었다.
이 날 저녁에 이순신은 보성 조양창(보성군 조성면)에 도착했다. 다행히 창고의 곡식은 봉인된 채 그대로 있었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많은 군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군졸 4명을 시켜 조양창을 지키게 하였다.
이후 이순신은 8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보성에서 머물렀다. 보성은 이순신과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장인 방진이 보성군수를 하였다.
8월 10일에 이순신은 몸이 불편하여 김안도의 집에서 계속 머물렀다. 동지 배흥립도 같이 있었다.
8월 11일 아침에 이순신은 거처를 양산원의 집으로 옮겼다. 집주인도 벌써 바다로 피난하였는데 곡식이 집에 가득 쌓여 있었다. 늦게 송희립과 최대성이 보러 왔다.
8월 12일
아침에 이순신은 장계의 초안을 작성했다. 늦게 거제현령 안위, 발포만호 소계남이 와서 이순신의 명령을 들었다. 이순신은 그들에게서 배설이 겁을 먹고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모양을 전해 들었다. 이순신은 괘씸하기 짝이 없다고 탄식했다.
8월 13일
거제현령와 발포만호가 돌아갔다. 우후 이몽구가 전령을 받고 왔는데 여수 본영의 군기를 하나도 싣고 오지 않았다. 곤장 80대를 때려서 보냈다.
하동현감 신진이 와서 전하기를 8월 3일에 내가 떠난 뒤에 진주의 정개산성과 벽견산성에 있던 군사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저절로 무너졌다고 한다. 통탄할 노릇이다.
8월 14일
아침에 이순신은 여러 내용을 담은 장계 7통을 봉하여 윤선각을 시켜 보냈다. 오후에 어사임몽정과 만날 일로 보성에 이르러 열선루(列仙樓 보성군 관아 뒤에 있는 누각)에서 잤다. 밤에 비가 몹시 내렸다.
8월 15일에 이순신은 열선루에서 선전관 박천봉이 유지를 가지고 온 선조의 유지를 받았다. 8월 7일에 작성된 선조의 유지는 “수군의 전력이 너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는 수군을 폐지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순신은 곧바로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라는 장계를 작성했다.
“임진년으로부터 5,6년 간 왜적이 감히 호남과 충청에 돌입하지 못한 것은 우리 수군이 적의 진격로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일 수군을 전폐시킨다면 이것이야말로 적에게는 순풍에 돛을 달듯이 다행한 일로 왜적은 호남과 충청연해를 거쳐 단번에 한강까지 도달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今臣戰船尙有十二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저의 전선 수가 적다하나 보잘것 없는 신이 아직 죽지 않은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는 못 할 것입니다.”
이순신은 수군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선조의 어명을 따르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이순신은 이 날 일기 끝에 ‘과음해서 잠들지 못했다.’고 적었다.
주1) 기복(起復)이란 원래 어버이의 상중에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는 것이 조선의 예법인데, 관례를 깨고 상중이라도 벼슬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주2) 손인필은 4월 26일과 5월 14일에 이순신이 권율 원수진으로 백의종군할 때 숙소를 제공한 사람이다.
주3) 8월 8일에 사헌부는 선조에게 군대의 기강 확립을 지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성을 버린 채 흩어지고, 군사들은 왜군이 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도망가는 사태가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고 있어 사헌부가 나선 것이다. 선조는 도체찰사에게 군율을 엄정히 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이런 어명이 실제로 지방 수령들에게 잘 먹혀들었을까? 심히 의심스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