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복병장 나대용, 왜군을 사로잡다
- 작성일
- 2022.11.0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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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42회 복병장 나대용, 왜군을 사로잡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이순신, 한산도로 진영을 옮기다.
진주성 전투때 이순신은 한산도 근처 바다에 있었다. 당시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6월 21일
새벽에 진영을 한산도 망하응포로 옮겼다.
6월 22일
배를 만들기 위하여 자귀로 나무를 깎기 시작하였다. 목수 214명이 일을 하였다.
6월29일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황진, 최경회, 서예원, 김천일, 이종인, 김준민 등이 전사했다고 한다.
7월 4일
흉악한 적의 무리 수만명이 위세를 내보이면서 죽 늘어서 있다. 분하기 짝이 없다. 저녁에 진영을 한산도 거을망포로 물러나 거기서 잠을 잤다.
7월 6일
한산도에서 새로 만든 배를 중위장이 여러 장수를 인솔하여 가서 끌어왔다.
7월 7일
날쌘 배 15척을 뽑아 견내량으로 정탐을 보냈다.
7월 9일
남해 현령이 다시 와서 광양 순천이 이미 분탕질 당했다고 전했다.
밤 12시가 넘자 본영의 탐후선이 들어와서 적의 소식을 전하였다. 광양의 적들은 진짜 왜적이 아니고 영남의 피난민이 왜적처럼 차리고 광양으로 뛰어들어 민간의 집들은 분탕질 하였다는 것이었다.
7월 13일
본영의 탐후선이 들어왔다. 광양·두치 등의 지역에는 적들의 그림자도 없다고 한다. 순천 거북선 격군을 맡은 경상도 사람인 종 태수가 도망치다가 붙잡혀 처형당하였다. 1)
7월 14일
진영을 두을포(통영시 한산면, 지금의 한산도)로 옮겼다.
7월 16일에 이순신은 친구인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편지를 썼다. 2)
“(전략) 난리를 치른 후 그리운 마음 간절했는데, 뜻밖에 하인 편으로 이달 초에 띄어 보낸 편지를 받아 급히 읽어보고 위로 받음이 평상시 보다 배나 되었습니다. (...) 가만히 생각해보면.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입니다. 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국가지보장 약무호남 시무국가) 그래서 어제 한산도로 진을 옮겨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런 난리 중에도 옛정을 잊지 않고 멀리까지 위로해주고 또 여러 가지 선물을 받고 보니, 모두가 진중에서는 진귀한 물건 아닌 것이 없어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느 날에야 전쟁을 끝내고 평소처럼 같이 놀고 싶어 하던 정회를 실컷 풀어볼 수 있을는지요. 막상 편지를 쓰려고 종이 앞에 앉으니 공연히 슬픈 생각만 간절해집니다. 더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마음이 산란하여 이만 씁니다.”
그랬다. 조선 8도 중 유일하게 왜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호남은 병참기지, 병력 송출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국가 존망의 위기에 호남이 조선을 살린 것이다.
#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다.
8월 15일에 조정은 삼도수군 통제사 직책을 신설하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삼도수군 통제사를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종래에 수군절도사 3명
(이순신·이억기·원균)이 협의를 통해 작전을 수행하던 체제가 1인 체제로
된 것이다. 3)
선조의 임명교서를 읽어보자
“돌아보건대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이른바 통솔할 이가 없음인 바, 서로
제 형편만 지킨다면 어찌 팔이 손가락 놀리듯 할 수 있으며 또 서로 관할
하고 통섭함이 없으면 혹은 뒤늦게 오고 혹은 앞서 도망가는 폐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이민웅, 이순신 평전, p 245)
한편 10월 1일에 선조가 서울로 돌아왔다. 1592년 4월30일에 서울을
떠난 지 16개월 만이었다. 선조는 정릉동의 월산대군의 옛집(지금의
덕수궁)을 행궁(行宮)으로 삼았다.
# 복병장 나대용, 왜군 정찰병 1명을 사로잡다.
윤 11월 3일에 견내량을 순찰 중인 복병장 나대용은 왜군 정찰병 1명을
산채로 사로잡아 이순신에게 보냈다. 이순신은 왜군을 심문하여 윤11월
17일에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4)
“삼가 상의드릴 일로 아룁니다.
남아있는 흉악한 적들은 물러나와 연해 지방에 버티고 앉아 오래 머물 작정을 하고 도망갈 기색이 없습니다. (...) 그래서 견내량 요충지 한 곳에 장수를 정하여 매복시켰는데, 윤 11월3일에 복병장이며 신의 군관 주부 나대용 5)이 왜적의 정탐꾼 1명을 산 채로 사로잡아 신에게 묶어 보냈기로 문초한 바, 그가 진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름은 망고질지이고 나이는 25세이며 거주지는 일본국 시거구(시고쿠 사국)인데, 작년(1592년) 12월 중에 조선으로 나온 조승감(조소아베 모도지카)이 거느린 군사 3천여 명이 패한 후, 군사 6백명을 더 뽑아 보낼 때 활쏘는 군사로 뽑혔으며, 거느리는 장수는 온노질기였습니다.
금년(1593년) 2월 2일 시거구(시코쿠)에서 배를 탔는데, 같이 출발한 배는 모두 8척이었으며 2월 28일에 웅천 앞바다에 상륙하여 양산까지 가서 그곳에서 조승감을 만나 두서너 달을 머물렀습니다. 날짜는 기억할 수 없으나 6월 중에 양산, 마산, 밀양 등지에 있던 배 5백여 척이 거제땅 영등포 장문포 원포 등지로 옮겨서 정박했습니다. 왜장은 6명으로 우단둔과 대은둔 등은 각각 군사 1천명을 거느리고 영등포 산봉우리에 성을 쌓고 둔거했으며, 심아손문은 군사 1,300명을 거느리고 영등포 성안에 둔거했릅니다. 조승감은 군사 900명을 거느리고, 아로감미는 군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장문포에 성을 쌓고 진을 쳤으며, 가사연둔은 군사 1,200명을 거느리고 원포에 성을 쌓고 진을 쳤습니다.
11월 4일에 중간 배 1백여척이 병든 왜인들을 싣고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그 때 왜장 아로감미는 안질이 나서 잘 보지 못하였고, 대은둔은 국왕의 조카이므로 역시 그 배를 타고 돌아갔으며, 또 1백 여척은 군량을 싣어올 일로 11월 27일에 부산포로 갔는데, 군량은 본국으로부터 연달아 실어다가 30여 칸 곳간에 가득 채우고도 남았으나 소비하지 않고, 왜의 졸병들은 곳간 밖에 있는 곡식으로 형편에 따라 먹였습니다. 사로잡혀온 조선 사람들 중에 여인들은 차례차례 일본으로 들여 보내고, 남자는 혹은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게 하고 혹은 부산 등지로 드나들며 장사하여 살아가게 하거나 배의 격군으로 보충하기로 하였습니다.
소인은 본래 왜군의 졸병이기 때문에 다른 일은 자세히 모르고 활은 조금 쏠 줄 압니다. 처음 본국에서 뽑혔을 때 조선에서 전공을 세우면 종노릇을 면하게 해주고 또 금른보화를 상으로 준다고 하였는데, 이곳에 와서는 먹는 것은 적고 하는 일은 많아서 그 고생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종 출신의 졸병 야삼화노와 서로 비밀히 약속하기를, 여기서 이렇게 굶어가며 일하기 보다 조선에 투항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윤 11월 1일에 같이 도망쳐서 풀숲에 엎드려 있는데 같은 부대에 있던 왜인들이 쫓아와서 야삼화노는 붙잡히고, 소인은 그대로 도망쳐서 강변으로 갔다가
마침 굴을 캐는 여인 3명을 만났는데 그 여인들이 소인을 붙잡고 소리치자 조선의 전선이 뜻밖에 달려와서 결박하여 싣고 온 것입니다.
부산 등지에 있는 각 진의 왜장들의 이름은 일일이 다 외우지 못하지만, 부산포의 왜장은 도심만둔이고, 웅포의 왜장은 즉묵감둔이며, 김해와 양산에는 심안둔(나베시마 가츠시게) 6)이 주둔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제에 사는 정병 김은금, 양가집 여인 세금, 금대, 덕지등이 왜인을 만나서 붙잡았던 과정을 물어서 진술받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피난민들로서 지난 윤11월 3일 간도 (통영시 용남명 해간도)근처해변에서 굴을 캐고 있었는데, 저 왜놈이 오양역(거제시 사동면 조양리)쪽에서 달려 나와 섰다 앉았다 하며 중얼거리면서 가지 않으므로 우리들이 힘을 합쳐 붙잡아 놓고 복병선을 소리쳐 부르자, 복병하고 있던 사람들이 노를 재촉하여 달려와서 결박하여 배를 실었습니다.’
간사한 왜놈이 감히 비밀스런 꾀를 내어 숲속으로 출몰하면서 우리 측의 허실을 정탐하던 행적이 뻔한데도, 이미 사로잡혔고 또 살지 못할 것을 알고는 항복한다는 말을 하고 있으니 더욱 흉측하여 목숨을 늦추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참이든 거짓이든 간에, 적들의 형편을 대강 진술받았으나 더 추궁할 것도 있을 것 같아서 목을 매어 도원수 권율에게 압송하였습니다.
한편 거제의 양가집 여인 세금 등 3인은 피난 중에 굶주리고 지쳐있는 여인들이면서도 왜적을 보고도 피하지 않고 힘을 합쳐 왜적을 붙잡고 복병장을 불러 결박하게 하였으니, 저 소문만 듣고도 도망쳐 달아나는 사람들과 천 번 만 번 다르므로, 각별히 타이르고 아울러 양식을 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본 받도록 권장하고자 하오니, 본 도 감사에게 분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순신 지음·조성도 역, 임진장초, p 154-157;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제2권, p 175- 178 ;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p 57-61)
이순신의 장계로 말미암아 조정은 나대용의 공을 알게 되었다. 나대용의 공로는 1594년 8월에 나대용이 강진현감에 제수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주1) 1593년에 거북선은 3척이 되었다. 나대용은 본영과 방답 거북선에 이어 순천부 선소(여수시 시전동)에서 순천 거북선을 만들었다.
주 2) 이 편지는 한산도 충무사 사당 안에 병풍으로 만들어져 있다.
주3) 이럼에도 원균은 이순신을 통제사로 모시지 않은 듯하다.
주4) 그런데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책에 수록된 충무전서에는 나대용이 왜인 포로를 잡은 시기가 정유년(1597년)으로 되어 있다. 이는 오기(誤記)이다.
주 5) 나대용은 1592년 봉사(종8품)에서 주부(종6품)로 승진했다.
주 6) 정유재란때 왜군은 전라도에서 야만적인 살상과 납치, 약탈과 방화 그리고 코베기를 자행하였다. 왜장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에 따라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통으로 보냈다. 1597년 9월에 나베시마 가츠시게는 금구와 김제에서 취한 코 3,369개를 도요토미에게 보냈는데 접수증명서가 지금도 남아 있다. 정유재란 당시에 나대용은 금구현령(종 5품 1597년-1598년 8월)이었다.
( 참고문헌 )
o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제2권, 비봉출판사, 2006
o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세창문화사, 2015
o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2
o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교감 완역 난중일기, 민음사, 2010
o 이순신 지음, 송찬섭 엮어 옮김, 난중일기, 서해문집, 2004
o 이순신 지음·조성도 역, 임진장초, 연경문화사, 199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