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창의사 김천일과 경상우병사 최경회 등, 진주성에서 순절하다
- 작성일
- 2022.11.02 10:03
- 등록자
- 문화예술과
- 조회수
- 110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41회 창의사 김천일과 경상우병사 최경회 등, 진주성에서 순절하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 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593년 6월 20일 이른 아침부터 성안이 갑자기 술렁거렸다. 적군의 선봉 기병 200여 명이 진주성 외곽 마현에 나타나 진주성을 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성안에서는 복수의병 선봉장 오유와 적개의병 선봉장 이잠이 뛰쳐나갔다. 한참 있다가 이들은 적병의 목을 말안장에 차고서 돌아왔다. 성안의 군사들은 환호했다.
이를 본 명나라 왕필적과 상주목사 정기룡도 감탄하면서 의기가 대단함을 치하했다. 왕필적은 “유총병의 군사가 성의 외곽에서 지원하고자 하는데 그 선봉은 이미 삼가에 도착했으니 경들은 잘 방어를 하라”하며 돌아갔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는 이후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날 밤에 양산숙이 남강을 통해 간신히 성에 들어왔다. 며칠 전에 김천일은 양산숙을 상주에 있는 명나라 장수 유정에게 은밀히 보냈다. 김천일은 급히 유정을 만난 결과를 묻자 양산숙은 침울하게 말했다.
“유총병에게 고종후 복수의병장이 써 준 글을 읽어 드렸더니, 유정은 문장 마다 힘이 넘쳐나고 곧은 기개가 서려 있어 탄복했습니다. 심지어 유정은 글을 들으면서 옷깃을 여미며 자세를 고쳐 앉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유정은 지원군을 보내기는 어렵다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일본과 명나라 간에 강화협상이 진행 중인 데다가 진주성을 쳐들어오는 왜적의 기세가 너무 커서 군사를 출동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진주성은 말 그대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이었다. 10만 명이나 되는 왜적이 진주성을 겹겹으로 에워싸고 있었고, 명군도 조선군도 도와주지 않았다. 홀로 싸워야 하는 호남 의병들. 어두운 그림자가 진주성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러면 1593년 6월 21일부터 6월 29일까지 9일간의 싸움을 살펴보자. 1)
6월 21일
왜군 선봉대 기병 200명이 척후활동을 시작했다. 척후병은 마현 봉우리 위에서 활동하더니, 조금 뒤에 10여만 명의 왜군이 성을 세 겹으로 포위했다. 그런데 왜군은 탄알 한 발 쏘지 않고 위세를 보인 뒤에 물러갔다.
6월 22일
왜군의 첫 공격이 시작됐다. 아침 10시부터 왜군 10만 명이 일제히 밀려왔다. 개경원 산 중턱에 진을 친 가토가 이끄는 1진과 향교 앞길에 있던 고니시의 2진이 동시에 쳐들어왔다. 첫 교전은 아군의 승리였다. 아군은 왜적 30명을 쏘아 맞히니 왜군들이 물러갔다. 초저녁에 다시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다가 2경에 물러갔고 3경에 다시 진격해 와서 5경이 돼서야 물러갔다.
6월23일
이 날도 왜군은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낮에 3번 싸워 3번 물리치고, 밤에 또 4번 싸워 4번 물리쳤다.
이 날 고성 의병장 최강과 이달의 군사 300여명이 진주를 구원하려고 달려왔다가 적의 세력에 놀라서 다시 고성으로 돌아갔다.
6월 24일
왜적의 증원군 5∼6천 명이 와서 마현에 진을 치고 또 5∼600명이 더 와서 동편에 진을 치고 아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성 안팎에 죽은 자의 수효가 헤아릴 수 없었다.
6월 25일
왜적이 동문 밖에 흙을 메워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흙집을 지어서 성 안을 내려다보고서 탄환을 비처럼 퍼부었다. 그러자 순성장 황진도 성 안에 높은 언덕을 쌓았는데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황진이 직접 옷과 전립을 벗고 몸소 돌을 짊어지고 나르니 성 안의 남녀들도 힘을 다해 축조를 도와 하룻밤 사이에 완성됐다.
이에 현자총통을 쏘아서 적의 소굴을 부쉈으나 적이 곧 다시 만들었다. 이 날도 3번 싸워 3번 물리치고, 밤에 또 4번 접전해 4번 다 물리쳤다.
6월 26일
왜군은 새로운 전술을 시도했다. 군사들이 큰 나무 궤짝 위에 짐승 가죽을 입힌 뒤 그것을 방패삼아 성벽 밑으로 육박해 성을 헐려고 했다. 이에 성 위에서는 비 오듯이 활을 쏘고 큰 돌을 연달아 굴러 내려서 왜군을 격퇴시켰다. 그러자 왜적은 큰 나무 두 개를 동문 밖에 세우고 그 위에 판옥을 만든 뒤 성안으로 불화살을 쏘아 보냈다. 그 불화살이 성안의 초가에 떨어져 화염이 자욱했다. 황진도 마주 보고 나무를 세우고 판자 집을 만든 뒤 대포를 쏘아 왜군의 판옥을 무너뜨렸다. 성안 사람들이 물을 길어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마침 소나기가 내려 불이 꺼졌다.
이 날 거제현령 김준민이 무너진 성벽 틈으로 뛰어드는 적을 막다가 죽었다. 아군 장수 가운데 최초의 희생자였다.
6월 27일
전투가 1주일 되는 날이었다. 왜군은 동문과 서문 밖 다섯 군데에 흙산을 만들었고, 그 위에 대나무로 방책을 만들어 그 위에서 총탄을 발사했다. 성안의 군사 300여명이 전사했다. 또 왜군은 귀갑차를 이용해 성 밑으로 접근해 쇠망치로 성벽에 구멍을 뚫었다. 조선군이 섶에 기름을 붙여 귀갑차를 태우자 왜군이 퇴각했다.
왜군의 공격이 계속되자 진주목사 서예원이 겁을 먹고 허둥거리며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했다. 김천일은 장윤을 임시로 목사에 임명해 사태를 진정시켰다.
왜군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 글은 ‘대국의 군대도 항복했는데 너희 나라가 어찌 감히 항거하는가. 온 백성이 성안에서 일시에 모조리 죽음 당하는 것은 처참한 일이 아닌가. 항복하면 생명은 보장해 주마’라는 내용이었다. 성 안에서 곧 답장을 보냈다. ‘우리는 죽음으로 싸울 뿐이다. 더구나 명군 30만명이 지금 너희들을 추격해 남김없이 섬멸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이 답장을 보고 왜군은 옷을 걷고 볼기를 두드리며 말하기를 ‘명군은 이미 다 물러갔다’ 했다.
6월 28일
1주일이 지나자 왜군은 더욱 공세 수위를 높였다. 왜적이 다시 북문을 침범해 성문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이곳은 진주목사 서예원이 지키고 있었는데, 왜군이 성을 뚫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으므로 성이 장차 무너지려 했다. 적이 바야흐로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왔는데, 김해부사 이종인이 힘껏 싸워 물리쳤다.
왜적이 또 동쪽과 북쪽의 성을 침범해 크게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종인이 다시 물리쳤다. 황진이 순찰차 이곳에 이르렀다가 성 아래를 굽어보고 말하기를, “적의 시체가 참호에 가득하니 죽은 자가 거의 1천여명은 되겠다”고 했다. 이 때 왜군 한 명이 성 아래에 잠복해 있다가 위를 향해 철환을 쐈는데 황진의 왼쪽 이마에 맞았다. 황진은 용맹과 지략이 으뜸이어서 그를 믿고 의지했었는데, 그가 죽자 성안이 흉흉해지며 사기가 저하됐다. 이 날 황진의 죽음을 조문하는 듯 장맛비가 음산하게 내렸다.
6월 29일
최후 순국의 날이었다. 황진이 죽자 서예원을 순성장으로 삼았다. 그는 겁에 질린 나머지 혼이 빠져 갓을 벗은 채 말을 타고 울면서 돌아다녔다. 최경회가 군사들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해 서예원을 참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고는 장윤에게 대신 순성장을 맡겼다. 장윤은 명망이 황진 다음 가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장윤마저 분전 중에 탄환에 맞아 죽었다.
오후 1~3시경에 왜군이 동문 성벽의 기초 석 몇 개를 뽑아내자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왜적의 무리가 개미떼처럼 기어올랐고 이어서 서문과 북문도 뚫렸다. 창의사 김천일 부대가 사력을 다했지만 버텨내지 못했다. 드디어 왜적은 성에 올라와 병기를 휘두르니 성벽을 지키던 군사들이 흩어져 촉석루로 들어갔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김천일을 부축해 피하기를 권했다. 그러나 김천일은 꿋꿋이 앉아 움직이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여기서 죽겠다”하고 아들 김상건 및 최경회·고종후·양산숙 등과 함께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남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 때 경상 우병사 최경회는 죽음 앞에서도 삼장사 시를 읊었다.
촉석루 누각 위에 올라 있는 세 장사
한 잔 술에 웃으면서 장강 물을 가리키네.
장강 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니
저 물이 마르지 않는 한 우리 넋도 죽지 않으리.
한편 이종인, 이잠, 강희열등 10여명은 장검을 뽑아 들고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적이 대대적으로 도륙을 자행했다. 목사 서예원 및 판관 성여해도 죽음을 면하지 못했으며, 여러 장령(將領)들도 다 죽었다. 성안의 백성들도 앞을 다퉈 남강에 투신해 시체가 강을 메웠다. 대략 죽은 자가 6∼7만 명이나 됐고, 성이 온통 폐허가 됐다.
9일간의 진주성 혈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명나라와 관군이 버린 진주성을 호남의병과 몇 지역의 경상도 관군이 사수했지만 버틸 수 없었다. 병력만도 무려 10대 1이었으니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전투였다. 이 싸움은 진흙 속에서 꿈틀거리던 버마재미 한 마리가 수레바퀴를 밀어내려 한 것에 비유하기도 한다.
며칠 후 왜군은 촉석루에서 축하연을 열었다. 이때 최경회의 소실 논개는 기생으로 변복해 왜장의 흥을 맞추다가 의암 바위에서 왜장과 함께 남강에 뛰어들었다.
왜군은 비록 진주성 전투에서 이겼지만 당초 목적인 호남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왜군은 진주성 전투의 피로가 겹쳐서 하동, 구례, 순천 등지를 잠시 분탕질하고 경상도로 돌아왔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명나라 유격 오종도는 글을 지어 김천일(1537-1593)을 추모했다.
그런데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김천일을 혹평했다.
“김천일이 데리고 온 군사는 모두 한양 거리에서 모집한 자들이었고, 게다가 김천일 자신도 군사전략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고집대로 하는 인물이었다. 더욱이 그는 원래부터 (진주목사) 서예원과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시기하고 명령이 어긋났다. 이러고서야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p 240-241; 류성룡 지음·오세진 외2인 역해, 징비록, p 222 ; 유성룡 저·김문수 엮음,징비록, p 183 ; 류성룡 저·김시덕 역해, 교감·해설 징비록, p 447)
하지만 안방준은 ‘은봉전서 권 7’의 ‘진주서사’에서 류성룡의 김천일에 대한 혹평에 반박했다.
“ 7월 2일에 왜적은 호남을 향해서 출발했다. 선봉장 육모리록가미(六毛里鹿加未)등의 한 부대는 하동에 이르렀고, 한 부대는 구례 석주관에 이르렀다.
한 왜장이 가토 기요마사에게 말했다.
‘열흘 동안 성을 공격하면서 정예병이 많이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 병졸로는 호남에서 뜻을 이룰 수 없으니 병졸들을 쉬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에 가토가 동의하고 즉시 철수 명령을 내렸다. (중략)
그런데 서애는 ‘징비록’에서 말하기를 ‘진주성의 함락은 전적으로 김 창의사(김천일)의 실책에서 비롯되었다’하고, 또 말하기를 ‘죽음에 임하여 통곡함으로써 마치 죽음을 두려워한 둣하였다’하니 서애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 점을 간략하게 변론하려고 한다.
‘(전략) 홀몸으로 외로운 성을 굳게 지켜 적의 길을 막아 호남을 보전하였는데, 서로 8일 밤낮을 버티니 적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적의 피가 도랑을 이루었다. 비록 불행하게도 지키지 못했으나 선봉을 꺾어 위축시킴으로써, 호남 쪽으로 몇 걸음도 넘지 못하게 하였으니 중흥의 일등공신을 논할 때 김천일 공을 빼면 누가 있는가? (...) 공이 진주성에서 죽은 것을 두고 헛되이 사람 목숨을 죽였다 하니, 아! 슬프다. (...) 공이 진주를 지키지 않아 적의 예봉을 꺾지 못했다면, 호남의 50여 성이 어육(魚肉)을 당함은 진주성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 공의 이름과 충절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러러 추앙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사람도 부러워하며 흠모하였다.
내(안방준)가 또 들으니, 진주성의 포위는 열흘이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안에서 지키는 것이 비록 견고하였으나 밖에서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에 힘이 다한 뒤에 함락되었으며, 아무도 굴하지 않았다. 또 이 싸움에서 왜적은 너무나 많이 죽었기 때문에 강을 건너서 서쪽으로 진격할 수 없었으니, 왜적이 호남으로 가지 못하도록 가로 막은 공(김천일)이야 말로 멀리 나가서 직접 왜적과 싸운 것과 맞먹지 않겠느냐.”
(안방준 저·안동교 역주, 국역 은봉전서, p 342-360)
한편 1593년 6월 1일의 ‘선조수정실록’에는 진주성 싸움의 평가가 있다. 요점만 적는다.
“적이 10배의 병력으로 계속 들이닥쳤으니 이는 김시민이 당하던 적과는 중과(衆寡)가 현저하게 다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김천일 등은 충의만을 가지고 군사와 백성을 격려했던 것인데 황진·이종인·장윤·김준민 등이 왜적을 살상하면서 9일이 지나서야 힘이 다했으니, 전투 방어가 잘못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때 김천일 등이 아니었더라면 겁 많고 미련한 서예원으로서는 필시 하루 이틀도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서예원의 형 서인원이 김천일을 교묘하게 비방하면서 서예원을 신원하려고 했던 까닭에 사대부들 사이에 이론(異論)이 있게 됐고, 심지어는 선조 앞에서 ‘김천일의 뜻은 숭상할 만하나, 재주가 졸렬해 일을 그르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천일이 국사를 그르친 것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처럼 김천일은 9일간 싸워 호남을 온전케 했는데도 나라 위한 순절이 당쟁의 불씨가 됐다. 2)
1) 진주성 전투일지는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조경남의 '난중잡록', 조경의 '재조번방지', 안방준의 '진주서사'등을 참조했다.
2) 나주시 동신대학교 뒤에는 정렬사(旌烈祠)가 있다. 이곳에는 창의사 김천일과 큰아들 김상건 그리고 참모 양산숙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한편 1593년 6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는 김천일의 졸기가 적혀 있다.
“김천일은 자(字)가 사중(士重)으로 이항(李恒)에 사사(師事)하여 학문으로 명성이 있었으며, 강방(剛方)하고 염직(廉直)했다. 입대(入對)할 때마다 할 말을 다하면서도 임금의 뜻에 맞았는데, 정성을 다해 관직을 수행해 남다른 치적을 세웠다.
그러나 체질이 허약해 병이 많았는데, 군대 내에서 세월을 지내다 보니 고생으로 몸이 야위어 옷의 무게도 이길 수 없을 정도가 됐으나 지기(志氣)가 견정(堅貞)하고, 충성(忠誠)이 분개(奮慨)했다. 그래서 뭇사람들로 하여금 적과 대치해 목숨을 내걸고 싸우게 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 참고문헌 )
o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
o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2, 온새미로, 2013
o 류성룡 저·김시덕 역해, 교감·해설 징비록, 아카넷, 2013
o 류성룡 지음·오세진 외2인 역해, 징비록, 홍익출판사, 2015
o 류성룡 지음·장윤철 옮김, 류성룡의 징비록, 스타북스, 2015
o 안방준 저·안동교 역주, 국역 은봉전서, 신조사, 2001
o 유성룡 저·김문수 엮음, 징비록, 돋을새김, 2009
o 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을유문화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