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왜군, 진주성을 공격하다
- 작성일
- 2022.10.28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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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40회 왜군, 진주성을 공격하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593년 5월말 경에 10만 여명의 왜군이 부산에 모여들었다. 이는 또 다른 재앙을 잉태하고 있었다. 왜군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 아니라 진주성 공격을 준비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진 것은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당초 왜군의 전략은 현지에서 군량을 확보해 전쟁을 치른다는 계획이었는데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하자 군량 조달에 큰 차질이 생긴 것이다.
이런 차질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1592년 10월에 치른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의 패배였다. 2만 명의 왜군이 김시민이 이끄는 3,800명의 조선군에게 대패해 호남 공략이 저지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진주성을 점령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2월부터 5월 사이에 세 차례나 명령서를 보냈다. 그러면 5월에 히데요시가 보낸 세 번째 작전지시서를 읽어 보자.
“목사성(일본은 진주목사 김시민 때문에 패전해 이 성을 목사성이라 불렀다) 공략은 흙주머니와 죽창을 만들도록 명하고 부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할 것이며, 한 명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일 것. 그렇게 한 후에 전라도로 출진해서 승리하도록 할 것. 전라도를 완전 토벌 한 후, 성들을 견고하게 만들고 군사의 다소에 따라 성의 크기를 결정하고 각자 소유할 것.”
일본 입장에서 보면 진주성 공격은 임진년의 참패로 저하된 왜군의 사기를 높일 수 있는 기회였다. 진주성을 빼앗으면 호남을 공략할 수 있고, 보다 유리한 강화교섭 여건도 마련할 수 있었다. 1)
왜군은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진주성 전투를 준비했다. 왜군은 제1대에서 제6대까지 편성했고 병력은 도합 10여만 명이었다. 1대는 2만5천600명으로 가토와 구로다가 맡았고, 2대는 2만6천200명으로 고니시가, 3대는 1만8천800명으로 우키다가 지휘했다. 4대는 모리가 이끄는 1만3천600명, 5대는 고바야카와의 군대 8천700명이었다. 6대는 보조 병력이었고, 수군도 합류했다.
왜군의 움직임이 명군에 알려지자, 경락 송응창은 고니시를 따라 부산까지 간 심유경을 꾸짖었다. 당황한 심유경은 고니시에게 항의했으나 고니시는 가토 기요마사가 한 일이라고 시치미를 뗀 다음 진주성을 비우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엄포를 놓았다.
이윽고 선산에서 도원수 김명원을 만난 심유경은 진주성을 비우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했다. 마치 고니시의 대변인 같다.
그러면 당시에 명군과 조선군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명군 총병 유정은 유격 오유충과 더불어 대구에 있었고, 참장 낙상지와 유격 송대빈은 남원에, 유격 왕필적은 상주에 있었다.
왜군을 추격해 영남으로 내려 온 조선군은 창녕, 의령 등에 포진했다. 도원수 김명원은 선산에, 순변사 이빈은 의령에 주둔했고, 전라병사 선거이, 충청병사 황진, 전라방어사 이복남 등도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전라순찰사 권율도 창녕에 있었다.
왜군의 공격 징후가 농후해지자, 도원수 김명원은 급히 전군에 명령해 의령에 집결토록 했다. 권율, 선거이, 이복남, 황진, 최경회, 고언백, 정명세, 이종인등 관군과 김천일, 고종후, 곽재우 등 의병장들이 의령에 모였다.
이들은 대책을 논의했다. 먼저 창의사 김천일이 말문을 열었다. 그는 진주성을 지켜야 한다고 강력히 외쳤다.
“왜적의 계책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그들이 다만 진주를 공격하리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 호남은 나라의 근본이고 진주는 호남에 가까이 있는 곳이니 실로 입술과 이빨의 관계인데, 진주가 없어지면 호남 또한 없어지고 말 것이다. 혹시 진주성을 비움으로써 왜적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수들은 고개를 돌렸다. 명나라가 성을 비우자는 입장이고 조선 조정도 성을 비우는 것에 동조하고 있으며, 더구나 왜군이 30만 명이라는 소문도 있으니 얼마 안 되는 군사를 가지고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김천일이 다시 나섰다.
"여러 장군들이 진주성을 안 지키겠다면 나 혼자라도 진주성을 지키겠소. 제아무리 적이 10만 대군일지라도 나는 적이 두려워 도망가지는 않을 것이오.”
안타까운 일은 경상우도감사 김성일이 4월 29일에 전염병(콜레라로 추정됨)으로 진주성에서 죽은 점이다. 그는 죽으면서 누이의 아들 유복립에게 ‘진주성을 반드시 지키라’고 유언했다.
이런 김천일의 충심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장수들은 물러갔다. 권율, 이복남 등은 운봉으로 후퇴했고 순변사 이빈은 산음으로, 의병장 곽재우도 창녕으로 돌아갔다. 여러 장수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김천일과 같이 진주성을 지키고자 하는 의로운 장수들도 있었다. 충청병사 황진과 경상우병사 최경회, 복수의병장 고종후 등 주로 호남 장수들이었다.
한편 명나라 이여송은 장수 유정·오유충 등에게 명령해 군사를 전진시켜 진주성을 구원하게 했다. 하지만 명나라 장수들은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진주성을 지키는 일은 홀로서기였다. 권율 등이 이끄는 관군과 곽재우의 영남 의병도 포기한 진주성을 왜 호남의병들이 지키려 했을까. 그 이유는 호남과 진주가 입술과 이빨의 관계라는 것에 대한 강한 믿음에서 비롯됐다. 진주가 무너지면 호남도 무너진다는 신념은 이미 죽은 김성일의 지론이었다.
6월 14일에 창의사 김천일은 큰 아들 김상건· 참모 양산숙과 함께 300명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성안에는 이미 김해부사 이종인, 거제현령 김준민의 부대가 들어와 있었다.
진주성에는 왜군이 다시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인근 고을에서 피난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들 대부분은 노인이거나 여자 아니면 어린 아이들이었다.
이날 저녁 늦게 진주목사 서예원과 판관 성수경이 부랴부랴 성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명나라 군사를 상주에서 영접하던 중이었다.
6월 15일에 충청병사 황진이 해미현감 정명세, 태안군수 윤구수, 당진현감 송제, 황대중 등 군사 700명과 함께 입성했다. 경상우병사 최경회도 문홍헌, 고득뢰, 최희립과 함께 군사 500명을 데리고 왔고, 복수의병장 고종후도 부장 오유와 오빈, 김인혼, 고경형 등과 군사 400명을 이끌고 뒤따라 왔다. 전라좌의병의 부장이며 사천현감인 장윤도 남응개, 김대민, 김신민 등 이 300명의 군사와 함께, 웅의병장 이계련이 100여 명, 적개의병장 변사정의 부장 이잠이 300명, 태인 의병장 민여운이 2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 광양 도탄의병장 강희열과 강희보 형제, 해남의병장 임희진, 영광의병장 심우신 등도 진주성에 들어왔다.
이들 군사들은 모두 합해 3,500명 정도였다. 진주성 관군 2,500명과 합하면 모두 6천 명이었고, 성안의 백성들은 6만 명 남짓됐다.
김천일은 곡식과 병기 등을 점검했다. 그는 진주목사 서예원을 불러 창고의 양곡을 계산해 보니 족히 수십만 석이 됐다. 4월 말에 진주성에서 전염병으로 별세한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이 비축해 놓은 양곡이었다. 모든 장수들은 크게 기뻐했다. “성은 높고 튼튼하며 식량은 갖춰 있고 병기도 충분하니, 여기가 바로 목숨을 바칠만한 곳이로다”라고 말하면서 사기가 높았다.
김천일은 여러 장수들과 상의해 진주성을 지킬 부대편성을 다시 했다. 창의사 김천일이 의병의 절제사,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관군의 절제사가 됐고, 총사령관은 김천일이 맡았다. 충청병사 황진이 수성장을 맡았으며 각 군 부장은 장윤, 양산숙, 민여운, 이종인, 김준민, 고득뢰, 강희보이고, 전투대장으로 강희열, 심우신, 임희진, 문홍헌, 서정후, 김인갑, 송제, 양응원, 남응개 등이 4대문에 각기 배치됐다.
이 당시의 상황을 김천일의 장계를 통해 살펴보자. ‘선조실록’ 1593년 7월 10일의 기사이다.
“창의사 김천일이 치계했다.
신이 이달 (6월) 14일에 진주성에 도착했는데, 목사 서예원이 명군을 접대하는 일로 나갔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습니다. 그와 함께 변란에 대처하는 여러 가지 일을 상의하여 결정했습니다. 15일에 전라 병사 선거이, 조방장 이계정, 충청 병사 황진, 조방장 정명세, 경기 조방장 홍계남, 경상 우병사 최경회, 복수의병장 고종후들이 잇따라 달려왔는데, 다음날 전라 순찰사 권율이 전라 병사와 장령 등에게 전령해 모두 나오게 하므로 제장(諸將)이 일시에 달려가니 성중이 흉흉해 이 때문에 일이 누설됐습니다.
신이 최경회·황진 등과 더불어 겨우 수합(收合)했으나 3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성안은 넓은데 이처럼 주린 군사로서는 방어하기가 쉽지 않으니 지극히 우려됩니다. 대개 진주는 바로 전라도의 보장인데 순찰사 등이 진주에서 철수해 산음으로 옮겨 갔으니 더욱 우려됩니다."
김천일의 장계에는 근심이 가득하다. 진주성을 지킬 일이 걱정스럽다.
그러면 여기에서 왜군 상황을 살펴보자. 6월 15일에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1진을 비롯해 9만 3천명의 왜군은 김해와 창원에 집결했다. 6월 16일에 선봉이 함안에 도착했다. 그때 이빈·권율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함안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일시에 무너져 달아났다. 18일에 왜군이 함안으로부터 정암나루로 건너오자, 홍의장군 곽재우는 형세가 불리해 후퇴했다. 권율·이빈·이복남 등은 물러나와 산음으로 향했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남원으로 들어갔다. 왜적은 의령에 들어가 노략질했다.
조정에서는 위급한 상황을 명군에 보고하니, 서울에 있는 이여송이 유정·오유충·낙상지 등에게 전령해 군사를 전진시켜 구원하게 했다. 그러나 현지에 있는 명나라 장수들은 적의 형세가 막강함을 두려워해 감히 진격하지 못했다.
6월19일에 전라병사 선거이·경기도 조방장 홍계남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에 도착했다. 그들은 김천일에게 말하기를, “적의 군사는 엄청 많고 우리는 군사가 적어 군사 수가 크게 차이가 있으니 잠깐 물러나서 몸을 보존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에 김천일이 크게 화를 내며 꾸짖었다. 그는 “호남은 우리나라의 근본이요, 진주는 실로 호남의 방패이니, 진주를 지키지 못하면 이는 바로 호남을 없애는 것이다” 하고,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사수하기를 다짐했다. 이후 선거이 등은 군사를 끌고 전라도 운봉에 진을 쳤다.
상주목사 정기룡도 상주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 유격 왕필적과 함께 진주성에 당도했다. 김천일은 예를 표한 뒤 명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주1)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이 함락되기 하루 전인 6월 28일에 일본 나고야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아 7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이 조건은 (1) 명나라 황제의 딸을 일본의 후비로 보낼 것 (2) 일본 무역선의 왕래를 보장할 것 (3) 조선을 분할해 서울과 4개도는 조선 땅으로 하고 나머지 4개 도는 일본 영토로 해 줄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 참고문헌 )
o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
o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2, 온새미로, 2013
o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제2권, 비봉출판사, 2006
o 윤인식, 역사추적 임진왜란, 북랩,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