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왜군, 서울에서 철수하다.
- 작성일
- 2022.10.28 15:29
- 등록자
- 문화예술과
- 조회수
- 96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38회 왜군, 서울에서 철수하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593년 2월 12일 행주산성 패전 이후 왜군은 의기소침하였다. 왜군은 다급해졌다. 명군과 조선군의 포위 속에 마음대로 서울 근교를 돌아다닐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최악의 경우 서울이 무덤이 될 수도 있었다.
3월 8일에 명나라 경략 송응창(1536-1606)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1) 조선에서 완전 철수하고 점령지를 모두 반환할 것 (2) 가토 기요마사에게 포로로 잡힌 임해군과 순화군 등 조선의 두 왕자와 대신들을 석방할 것 (3)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 황제에게 사죄할 것의 세 가지 조건을 실행한다면, 명나라 병부는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하는 계획을 명나라 황제에게 건의하겠다는 것이었다.
(송응창 지음·구범진외 7명 옮김, 명나라의 임진전쟁 2 평양수복, p 404-406)
3월 13일에 경략 송응창의 지시를 받은 부총병 사대수는 용산에 있는 왜군 군량 창고 23곳을 불화살을 쏘아서 태워버렸다. 여기엔 1만 4천석의 군량미가 있었는데 고스란히 타버린 것이다.
이러자 고니시는 화친을 원하는 서한을 강화도에 있는 창의사 김천일에게 보내 조정에 전달하도록 했다. 김천일은 이 편지를 류성룡에게 전달했고, 곧 명나라 제독 이여송(1549-1598)에게 건네졌다.
이러자 이여송은 심유경을 서울로 보냈다. 3월 15일에 고니시와 심유경의 회담이 서울 용산에서 열렸다. 1) (기타지마 만지, p 150-151)
이 회담에서 심유경은 큰소리치기를, "상국(上國)이 장차 40만 대군을 몰아 앞뒤에서 차단하여 너희들을 치려 한다. 너희가 지금 조선의 왕자와 배신을 돌려보내고 군사를 거두어 남쪽으로 떠나간다면 봉사(封事)를 성립시킬 수 있고 두 나라가 무사할 것이니, 어찌 온편한 일이 아니겠는가."하였다.
고시시는 봉공(封貢)의 일을 원만하게 처리한 뒤에 서울에서 철수하겠다고 하면서 명나라 사절을 일본에 파견 요청했다. 그러면서 왜군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해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러자 경략 송응창은 고니시의 요구를 수락하였다.
3월 25일에 경략 송응창은 선조에게 자문을 보냈다. 현재 전황을 고려하여 왜의 귀국 요청을 윤허할 예정이므로 존선군이 왜의 잔당을 가로막거나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지시하는 문서였다.
“ (전략) 진실로 걱정인 것은 전라도와 강원도 등에서 왜를 온전히 보내고자 하는 저의 뜻을 살피지 않고 왜를 공격한다면 조선의 분란의 실마리가 될 것입니다. 이에 자문을 보내니 청컨대 왕께서 살펴 속히 전라도 등의 배신 권율로 하여금 군사를 주둔시켜 굳게 지키고 왜의 잔당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십시오”(송응창 지음·구범진외 7명 옮김, p 445-446)
4월 6일에 평안도 관찰사 이원익이 치계하였다.
“송응창이 명군에게 왜적을 죽이지 말 것을 명하고 조선군에게도 교전하지 말 것을 명하였습니다.” (선조실록 1593년 4월 6일)
4월 8일에 강화 회담이 타결되었다. 4월 18일에 고니시는 용산의 창고에 쌓아뒀던 곡식 2만 석을 명군에게 넘겨주고 서울에서 철수했다.
그런데 명나라 장수들이 왜적을 뒤따라가며 엄호해주었기 때문에 조선의 군사들은 감히 왜적을 공격하지 못했다. 심지어 명군은 한강변에 벌려 서서 조선군의 전진을 막아 구타하고, 쇠사슬로 중위 선봉장 변양준의 목을 묶고 땅에 끌어 중상을 입히기도 하였다. 순변사 이빈, 방어사 고언백등도 잡아두어 전진하지 못하게 했다. 이여송은 우격 척금을 보내 노량진의 나룻배를 수거하여 조선군이 도강하지 못하게 했다. 전라도 관찰사 권율이 선봉대로 하여금 왜군을 추격하게 하자, 이여송은 권율을 잡아다가 추궁했다.
(김영진, p 338-339)
이러자 왜군은 조령을 넘으면서 풍악을 울리고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부산에 도착했다.
1593년 4월 1일의 ‘선조수정실록’을 읽어보자.
“한양에 주둔하던 왜장들이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부산으로 돌아갔다. 명나라 경략 송응창이 막하의 책사(策士)인 사용재(謝用梓)·서일관(徐一貫) 등으로 하여금 중국 사신으로 가장하여 적영(賊營)에 들어가서 고니시 등을 개유하게 하고, (중략) 4월 19일에 우키다 등이 대군을 철수하여 한강을 건넜는데, 창고에 쌀 2만 석을 남겨 두어 제독의 차관(差官)인 심세현에게 인계하였다.
가토 기요마사는 두 왕자 및 재신과 중국 관원인 사용재·서일관 두 사람을 데리고 갔으며, 심유경은 처음부터 고니시를 행장을 따랐다. 여러 적장들은 곧장 조령(鳥嶺)을 넘었는데 도중에서 풍악을 울리고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해상에 이르렀다.”
한편 류성룡의 ‘징비록’에도 한양 수복 기록이 실려있다.
“4월 20일 도성이 수복되었다. 명나라 군대가 성으로 들어왔는데 제독 이여송은 소공주댁(小公主 나중에 남별궁 南別宮이라 칭했다)에서 여장을 풀었다. 하루전에 왜군은 이미 빠져 나갔다.
내가 명군을 따라 도성에 들어가서 보니, 성 중의 유민들은 백에 한둘도 남아 있지 않았고, 생존자도 굶주리고 지친 나머지 안색이 귀신과 같았다.
그때 날씨가 무척 더웠는데 사람들은 이름 모를 병으로 죽고, 말(馬)들도 아무런 까닭없이 쓰러지니 그 수효가 적지 않았다. 거리마다 사람과 말이 즐비하게 죽어 썩는 냄새가 가득하여 사람들이 코를 막고 다녀야 했다.
관청과 사삿집들은 하나같이 비어 있었으며 오직 불탄 기왓장들뿐이었다. 숭례문 동쪽에서 남산 밑 까지는 적이 숙소로 삼았던 지역이라 다행히 남아 있었다. 종묘와 세 대궐도 모두 재가 되어 버렸다.
나는 먼저 종묘로 들어가 한바탕 통곡 했다. 그리고 나서 이여송 제독에게 들려 인사를 나누었다. 여러 대신들도 만날 수 있었다. 나를 맞는 대신들과 얼마동안 붙들고 서로 통곡하였다.
이튿날(4월 21일) 나는 또 제독 이여송을 찾았다. 인사를 마치고 나서 나는 제독에게 왜적이 그리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니 추격하면 크게 이길 것이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제독의 대답은 나의 뜻과는 멀었다.
‘나도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급히 쫓지 못하는 것은 한강에 배가 없기 때문이오. 강을 건널 길이 없으니 어찌하겠소’하면서 짐짓 난처한 빛을 띠었다.
이에 나는 경기우감사 성영과 경기수사 이빈에게 글을 보내어 배들을 한강에 모이게 하였다. 이리하여 한강에 배 80척이 준비되었다.
이러자 이여송은 이여백으로 하여금 1만여 기(騎)를 거느리고 앞서가게 하였는데 군사가 반쯤 강을 건넜을 때, 이여백이 갑자기 발이 아프다면서 가마를 타고 도로 성으로 들어왔다. 이 제독이 실은 적을 추격할 생각이 없으면서 다만 우리에게 책임을 다했다고 보여주려고 한 것이었다.
23일에 나는 병으로 자리에 눕는 몸이 되었다. ”
(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p 231-234)
한편 조경남은 ‘난중잡록’에서 아래와 같이 적었다.
“우키다가 고니시 등의 적과 더불어 충주에 모여 새재[鳥嶺]를 넘는데, 심유경 및 두 왕자와 김귀영 등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말을 타고 앞을 인도하게 하고, 또 서울과 지방의 미녀와 가수ㆍ광대ㆍ악공을 모아서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며 크게 음악을 베풀고, 군사의 대오를 정돈하지도 아니하고 산에 들에 가득 차서 밤낮으로 음악을 하여 개선(凱旋)한다는 것을 보이다.”
이처럼 왜군은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고스란히 부산에 집결했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에 따라 진주성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1) 서울 용산 회담은 1592년 9월 1일의 평양 회담과 마찬가지로 조선 대표는 아예 배제되었다.
(참고문헌)
o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
o 김성한, 7년 전쟁 4, 산천재, 2012
o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2, 온새미로, 2013
o 김영진, 임진왜란 2년 전쟁 12년 논쟁,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21
o 류성룡 저·김시덕 역해, 교감·해설 징비록, 아카넷, 2013
o 송응창 지음·구범진외 7명 옮김, 명나라의 임진전쟁 2 평양수복, 국립진주박물관, 2020
o 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을유문화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