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웅포해전
- 작성일
- 2022.10.28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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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37회 웅포해전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592년 9월 1일 부산포 해전을 이후 이순신은 더 이상 출전하지 않았다.
1593년 1월 22일에 이순신은 선전관 채진이 가져온 선조의 유서를 받았다.
“명나라 이여송이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 서울을 수복하려고 진군하면 왜군들이 도망할 것이므로 그대는 수군을 지휘하여 왜군의 귀로를 차단하고 섬멸하라”
이어서 1월 25일에 안세걸이 선조의 유서를 가져왔다.
“1월 8일에 이여송이 평양을 수복하고 계속 진군하니 그대는 수군을 정비하여 바다 길로 도망치는 왜군을 섬멸하라”
이에 이순신은 2월 6일에 출전하였다. 이순신은 7일에 견내량에서 경상 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고, 8일엔 전라우수사 이억기를 만났다.
2월 10일에 조선 연합함대 89척(전라좌수군 42척, 전라 우수군 40척, 경상우수군 7척)은 온천도를 출발하여 웅포(창원시 진해구 웅포동 소재)로 향했다.
이 당시 웅포는 부산포 해전 이후 왜군이 다시 집결하여 산록에 수군 진지를 구축하고 주변인 안골포·제포·장문포·영등포·천성 및 가덕도 등지에 요새지를 두어 어느 한 곳이 공격을 당하더라도 쉽게 지원하고, 또 방어할 수 있는 태세를 각추고 있었다.
이순신은 부산 섬멸을 목표로 하였는데 먼저 웅천현 웅포일대의 왜군을 먼저 소탕하기로 했다. 이는 전술상 배후의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선결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웅포의 왜군은 진지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바다에 나오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대로 조선 수군과 해전를 철저하게 회피한 것이었다.
2월 10일에 제1차 웅포해전이 일어났다. 이 날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오전 6시에 배를 띄워 바로 웅천현 웅포로 나아갔다. 적의 배가 여전히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두 번이나 꾀어 냈으나 우리 군대에 지레 겁을 먹고는 나올 듯 하다가도 들어가 버리므로 끝내 잡아 없애지 못하였다. 매우 분하였다! 밤 10시경에 영등포 뒤의 소진포(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리)로 돌아와 배를 대고 밤을 지냈다.”
11일에 이순신은 군사들을 쉬게하고 그대로 소진포에 머물렀다.
12일에도 이순신은 웅포로 진격했으나 여전히 왜군은 웅크리고 있었다.
2월 17일에 이순신은 거제 칠천량 앞바다에서 선전관 이춘영으로부터 ‘적들이 돌아가는 길목에 빨리 나가서 도망치는 적을 몰살하라’는 선조의 유지를 받았다. 이순신은 교지를 받았다는 회신을 하면서 웅천의 적을 수륙으로 협공할 것을 아뢰었다.
“ 선전관 이춘영이 받들고 온 우부승지의 서장을 오늘 2월 17일에 받았습니다. (중략) 10일 웅천 앞바다에 도착하니 적들이 포구 깊숙이 배를 감추고 소굴을 많이 만들어 두고 있었습니다. 우리 수군이 연일 유인을 하였으나, 우리 군사의 위세를 겁내어 끝내 출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칠천량과 가덕도 앞바다를 왕래하면서 진을 치고 여러 가지 계책을 세워 기어코 섬멸하려 했으나, 부득이 길목을 지키는 적을 섬멸한 후에 양산과 김해의 길을 끊어서, 뒤로부터 둘러쌓일 염려를 없앤 후에 부산으로 진격하여 도망치는 적을 섬멸하려 합니다. 이에 바다와 육지에서 한꺼번에 공격하려고 급히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병마를 거느리고 웅천을 공격하도록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에게 공문을 보내어 재촉하였습니다.”
2월 18일에 조선 수군은 웅포의 왜군에게 3차 공격을 시도했다. 왜군들은 여전히 응전하지 않았다. 이러자 이순신은 유인작전을 시도했다. 그는 사도첨사 김완을 복병장으로 임명하여 여도만호, 녹도가장, 좌우별도장 및 좌우 돌격장 등을 거느리고 송도에 복병하게 한 후 여러 전선을 포구로 돌진시켜 왜선이 나오게 유도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왜선 10여 척이 뒤따라 나오는 것이었다.
이때 좌별도장이며 이순신의 군관인 주부 이설과 좌돌격구선장 주부 이언량1) 등이 도망가는 왜선 3척을 끝까지 추격하여 그 배에 타고 있던 100여명을 사살했다.
한편 왜군이 해전을 기피하고 육지에만 머물고 있어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김성일에게 두 번째로 육군의 웅천 공격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김성일은 “명나라 군사를 대접하는 일에 경황이 없고 또 남아 있는 군사도 없으므로 첨지 곽재우를 시켜 먼저 창원을 무찌른 다음에 웅천으로 진격하라고 하였다”고 답했다. 하지만 경상우도 육군은 아예 나타나지 않았다. 이순신은 크게 실망하였다.
19일에는 서풍이 크게 불어 출발하지 못하고 20일 새벽에 사화랑을 떠나 강풍을 맞으면서 웅천으로 향했다. 그런데 전투가 시작될 즈음에 갑자기 큰 바람이 불었다. 전선들이 서로 충돌하여 파손되어서 배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이순신은 즉시 호각을 불고 초요기를 세워 전투를 중지시켰다.
다행히 모든 전선이 크게 손실을 입지는 않았으나 흥양 1척, 방답 1척, 순천 1척 본영 1척이 서로 부딪쳐 크게 파손되었다. 전라좌수영 전선 네 척이 크게 파손되기는 처음이었다. 2)
2월 21일에는 강풍에 비까지 내렸다. 22일에도 새벽에 동풍이 세게 불었다. 그러나 적을 치는 일이 시급하므로 이순신은 출항하였다. 사화랑에 이르러 바람이 약해지자 이순신은 길을 재촉하여 웅포에 다달았다.
2월 22일의 전투상황을 ‘난중일기’를 통해 살펴보자.
“삼혜와 의능 두 승병장과 의병장 성응지를 웅포 서쪽인 제포로 보내어 상륙하는 체하게 하였다. 또 전라우도 여러 장수의 배가운데 튼튼하지 못한 것을 뽑아서 동쪽에 보내어 또한 상륙하는 체하게 하였다. 그러자 왜적들이 감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였다. 이 때 배를 모아 일시에 뚫고 들어가니 적의 세력이 흩어지고 힘이 약해져서 거의 섬멸하였다.
그러나 발포 2선, 가리포 2선(강진현 소재, 현 완도군 완도읍 지역)이 명령도 없이 뛰어들었다가 얕은 곳에 걸려서 적들에게 공격당하고 말았다. 3) 분하고 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얼마 뒤 진도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전라좌수사)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냈다. 그런데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못 본 체하고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4)
괘씸하여 말하기 조차 싫다. 분하고 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우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우수사(원균) 때문이다.”
2월 28일에 이순신은 새벽에 출항하여 웅포에 이르렀다. 웅천의 적들은 여전히 웅크리고 있을 뿐 대항할 생각을 안 했다. 이순신은 낙동강 하구까지 진출했다가 사화랑으로 돌아와 머물렀다. 이 날 이순신의 아들 염이 왔다.
3월 6일에 이순신은 7차로 웅포를 공격하니 적의 무리들이 급히 산 중턱으로 도망쳐서 진을 쳤다. 이에 조선 수군들이 탄환과 화살을 비오듯 퍼붓고 비격진천뢰를 쏘니 왜군들이 많이 죽었다. 이순신의 전투에 비격진천뢰가 등장한 것이다. 이윽고 조선 수군은 억류되어 있던 사천 여인 한 명을 구출했다. 이 날 밤 이순신은 칠천량에서 묵었다.
3월 8일에 이순신은 한산도에 되돌아 왔다. 3월 11일에 본영의 탐색선이 왔다. 3월 12일 아침에 이순신은 각 관청의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아들 염과 나대용, 덕민, 김인문도 본영으로 돌아갔다. 5)(3월 12일의 난중일기)
그런데 조선 수군이 출전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명군의 소식은 아득하여 전혀 알 길이 없고, 농사철을 맞이하여 연해안 각 진의 수군이 모두 출전하여 농사에 차질이 생겼다. 특히 전염병이 생겨 사망자가 연달아 생겼다. 이리하여 4월 3일에 이순신은 출전을 종료하고 각자의 본영으로 돌아갔다.
4월 6일에 이순신은 ‘웅천의 적을 수륙협공한 일을 아뢰는 장계’와 ‘통선 1척이 전복되어 많은 사상자가 생기게 한 것에 대한 죄를 기다리고 있음을 아뢰는 장계’를 조정에 보냈다.
웅포해전은 이순신에게는 불운이었다. 전라좌수영 배 4척이 파손되고, 1척이 전복된 것이다.
주1) 1592년 5월 29일 사천해전 때 나대용과 함께 부상 당한 이설은 전 훈련원 봉사(종8품)이었는데 주부(종6품)로 승진하였다. 1593년에는 나대용도 주부로 승진하였을 것이다.
2) 4월 6일에 이순신이 올려보낸 ‘웅천의 적을 수륙협공한 일을 아뢰는 장계’에는 함선 4척 파손은 아예 빠져 있다.
3) 4월 6일의 ‘웅천의 적을 수륙협공한 일을 아뢰는 장계’는 ‘난중일기’와 내용이 다르다.
“(전략) 좌도의 발포 통선장(統船將)이며 그 포구의 군관인 이응개와 우도의 가리포 통선장 이경집 등이 승리한 기세를 타고 서로 다투어 돌진하여 적선을 깨뜨렸으나 , 돌아 나올 무렵에 두 배가 서로 부딪쳐 방패가 흩어지고 떨어져서 사람들이 적의 철환을 피하려고 한쪽으로 몰리게 되어 그만
뒤집어졌는데,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서서히 헤엄쳐서 육지로 올라갔고, 혹은 자기네 집으로 도망간 자도 있었으므로 지금 색출하고 있으므로 그 결과를 곧 보고하겠습니다.”
이어서 4월 6일에 이순신은 ‘통선 1척이 전복된 뒤에 죄를 기다리고 있음을 아뢰는 장계’에서 “(전략) 적을 가벼이 여기면 반드시 패배하는 것이라 하였지만 오히려 경계하지 않고 마침내 통선 1척을 전복시켜 많은 사망자가 생기게 하였는바, 이는 신이 군사를 다스리는 방법이 좋지 못하고, 잘못 지휘한 때문으로 지극히 황공하와 거적자리에 엎드려 죄를 기다립니다. ”라고 보고 하였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소관 발포선 1척이 뒤집어 진 것만 조정에 보고한 것이다.
그런데 전라우수사 소관 가리포 통선이 전복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가리포 선도 전복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주4) 4월 6일자 이순신의 장계에는 ‘진도 지휘선’ 관련 사항은 아예 빠져 있다. 진도 지휘선은 전라우수사 소관이라서 장계에 뺀 것이리라.
주5) 나대용이 웅포해전에 출전하였다가 3월12일에 본영으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3월 11일 본영 탐색선을 타고 왔다가 다시 본영으로 돌아갔는지 알 수가 없다. 추후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o 김종대,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가디언, 2012
o 김태훈 지음,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일상이상, 2014
o 류성룡 저·김시덕 역해, 교감·해설 징비록, 아카넷, 2013
o 배상열, 난중일기 외전, 비봉출판사, 2007
o 백지원, 조일전쟁, 진명출판사, 2009
o 신호영, 이순신의 전쟁, 돋을새김, 2012
o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2
o 이봉수, 이순신이 지킨 바다, 가디언, 2021
o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교감 완역 난중일기, 민음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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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제장명, 이순신 파워인맥, 행복한 나무, 2008
o 조성도, 충무공 이순신, 연경문화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