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행주대첩
- 작성일
- 2022.10.28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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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36회 행주대첩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593년 1월 8일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이끄는 5만 3천 명의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했다. 그러나 1월 27일에 이여송은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여 개성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여송은 마냥 웅크리고만 있었다.
이 시기에 전라도 순찰사 권율(1537-1599)은 수원 독성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서울 탈환을 위해 진영을 서울 근처로 옮기기로 했다. 1)
그는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을 시켜 한강 너머에 병력을 주둔시킬 만한 곳을 찾아내도록 했다. 조경은 한강을 굽어볼 수 있는 야트막한 야산을 발견했는데 이곳이 행주산성(幸州山城)이다.
행주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산성으로 이용된 곳이나 관리가 되지 않아 사실상 성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서쪽은 한강이 흐르고 남쪽은 창릉천으로서 북서쪽 구릉지대 한 쪽만 방어하면 되는 천혜의 요충지였다.
권율은 군사를 두 패로 나누어 4천 명을 전라도 병사 선거이에게 주어 금천(衿川)에 머물도록 하고, 자신은 조방장 조경과 함께 승장 처영이 지휘하는 1천명을 포함한 군사 2천 3백 명을 거느리고 고양(高陽)의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한편 양천 일대에는 전라도 소모사(召募使) 변이중(邊以中 1546-1611))이 1천 명이 주둔하고, 창의사 김천일은 강화도로부터 나와 해안에 진을 쳤으며, 충청감사 허욱은 통진에 진을 치고, 충청수사 정걸 또한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파주의 도원수 김명원 부대, 양주의 경기도 방어사 고언백 군사도 서울을 포위하는 형국이었다.
한편 조방장 조경은 산성에 성책을 쌓아야 한다고 권율에게 건의했으나,
권율은 명나라 군대가 많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2월 8일에 양주에 머문 체찰사 정철이 전황 논의차 권율을 불렀다. 조경은 권율이 출타한 틈을 타서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이틀 만에 목책(木柵)을 제1, 제2 목책을 쌓았다. 2겹으로 쌓은 목책은 2월 9일에 완성되었고 행주 전투는 2월 12일에 있었으니 조경은 선견지명이 있었다.
이러자 왜군 3만 명이 행주산성 점령에 나섰다. 서울의 왜군을 배후에서 위협하는 권율 부대를 섬멸하여 근심의 싹을 없애 버리려는 속셈이었고, 지난번 이치전투에서 권율에게 패한 설욕도 겸했다. 총대장은 우키다 히데이에 였고 고니시 등 왜장 대부분이 참전했다.
전투는 12일 아침 해 뜰 무렵부터 저녁 해 질 때까지 일곱 번 싸웠는데 왜군이 참패했다. 그러면 행주산성 전투를 자세히 살펴보자.
12일 새벽에 정탐군이 보고하기를, “적이 좌우익(左右翼)으로 나뉘어서 홍색과 백색의 깃발을 가지고 본영을 향하여 온다.”하였다. 권율은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조선 군사는 높고 험준한 데에 1성책, 2성책, 산성등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아침 6시쯤 왜군 제1대의 공격이 시작됐다. 선봉장은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고니시는 1월 8일 평양성 전투에서 패한 이후 1월 27일의 벽제관 전투에도 참가하지 않고 있다가 이번 전투를 설욕의 기회로 삼아 조총부대를 앞세워 산성을 올려다 보고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제1 성책 바로 몇 걸음 앞까지 왜군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선두에 있던 조선 장수가 큰 북을 세 번 울려 공격 명령을 내리자 조선군은 미리 준비한 화차로 포를 발사했다. 화차는 장성 출신 변이중이 만든 것인데 이 전투에 40량이 투입되었다. 화차는 전면과 좌, 우측 3면에 승자총통을 장착해 40발이 연속 발사되는 신무기였다. 또한 수차석포에서 돌을 뿜어내었고, 비격진천뢰·총통(銃筒) 등을 쏘아댔다. 궁수들도 일제히 활을 쏘았다. 고니시의 제1대는 왜군은 조선군의 갑작스런 집중 포화공격을 받자 처참한 피해를 입고 물러갔다.
조금 있다가 제2대장 마에노 나가야스가 이시다 미쓰나리 ·마시다 나가모리·오오타니 요시쓰구 등 3봉행과 더불어 돌진하였다. 조선군은 큰 화살을 연달아 쏘아 적장 마에노의 흉부에 관통상을 입혔다. 왜군 제2대 역시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어 제3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는 지난해 9월 연안성 전투에서 조선군의 방어 능력을 실감했기에 공성 무기인 누대로 공격해 왔다. 누대 위에 조총수 수십 명을 올려놓고 성안을 향하여 조총을 쏘면서 나머지 군사들은 조선군 진지에 근접시키지 않는 신중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조방장 조경은 지자포를 쏘아 누대를 깨뜨리고 또 포전 끝에 큰 칼날 두 개씩을 달아 쏘게 하니 맞는 자는 즉사하였다. 왜군은 공격을 주저하면서 게걸음 작전으로 피하였는데, 조선군이 비격진천뢰로 공격하니 왜군들은 폭발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왜군의 피해가 늘어나자 제3군도 퇴각하고 말았다.
왜군의 계속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제1성책(城柵)도 돌파하지 못하자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는 매우 분노하였다. 마침내 우키다가 손수 왜군을 이끌고 최선두에 섰다. 그의 소속 제4대 군사들은 죽음을 무릎 쓰고 돌진하였다. 조선군도 필사적으로 응전하였다. 그렇지만 왜군의 공세가 너무 강하여 제1 성책이 무너지고 말았다.
제1성책을 무너뜨린 왜군은 여세를 몰아 제2성책까지 접근하였다. 이때 권율은 북을 울리면서 전투를 독려하였다. 그는 도망가는 조선군 두어 명을 칼로 베면서 큰 소리로 싸우도록 명령하니 조선군은 도망갈 생각을 아예 포기하고 힘껏 싸웠다. 이윽고 조선군은 화차의 총통을 총대장 우키다에게 집중 사격하였다. 마침내 우키다 히데이에는 부상을 당하고 부하의 부축을 받아 퇴진하였다. 또한 봉행 이시다도 부상을 입었다.
왜군은 여러 번 달려들었다가 번번이 퇴각하였는데 이번에는 제5 대장 키카와 히로이에가 나섰다. 왜적은 갈대를 가지고 바람 부는 방향을 따라 불을 놓아 제2 성책을 불태우려 하였다. 황급히 성안에서는 물을 끼얹어 불을 꺼버렸다. 그러나 왜군은 화전을 집중하여 쏘아 목책 일부가 불타기 시작하였다. 조선군은 침착하게 미리 준비한 물통으로 불을 끄고 화살과 돌을 퍼부으니 부대장 키카와 또한 부상을 입고 물러났다.
이어 제6 대장 모리 모토야스는 힘을 다하여 제2성책을 점령하려고 맹공을 가하였다. 이때 승장 처영은 1천 명의 승병을 거느리고 적의 공격을 끝까지 막아냈다. 적들이 근접하자 재주머니의 재를 뿌려서 적이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전법까지 전개하여 왜군은 마침내 물러갔다.
이제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왜군은 초조했다. 왜적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공격방향을 바꾸었다.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 제독 이여송을 격파한 제7대장 고바야카와 다카가게는 선두에 서서 승병이 지키고 있는 서북쪽의 자성을 공격하여 그곳의 일각을 뚫자 승병이 붕괴되어 내성으로 들어와 일진(一陣)이 헤져지고 쓰러졌다. 이에 권율이 칼을 빼어 들고 승군에게 총공격을 명령하자 다시 승군이 힘을 내어 치열한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옆 진영에 있던 조선군들도 적을 향하여 수많은 화살을 집중 발사하니 전투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때 조선군은 화살이 다하여 투석전을 폈는데 왜군이 이를 알아차리고 기세를 올리려 하였다. 이때 충청수사 정걸(1514-1597)이 배 두 척에 화살을 싣고 바다 쪽에서 성안으로 들여보냈다. 이에 조선군은 사기가 충천하였다. 2) 이어서 전라도 조운선 40척이 도착하여 양천포구를 뒤덮으니 왜군은 지원군으로 착각하고 말았다.
패배를 인정한 왜군은 시체를 네 군데에 모아서 불태우고 서울로 퇴각하였다. 왜군은 총대장 우키다를 비롯해서 키카와, 이시다, 마에노 등 4명의 장수가 부상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 전투로 조선 육군은 일거에 명예를 회복하였다. 2천300명의 군사로 열배가 넘은 3만 명의 왜군을 물리친 쾌거였다.
다음날 명나라 부총병 사대수(査大受)가 접전한 곳을 와서 보고 말하기를,
"외국에 진짜 장군이 있다." 하였다.
명나라 경략 송응창은 우리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 위로하고 추장(推奬)하는 한편 비단과 은(銀)을 상으로 주고 황제에게 주문(奏聞)하였다. 명나라 신종 황제가 홍려시(鴻臚寺)의 관원을 보내 우리나라에 선유(宣諭)하기를, "조선은 본디 강국으로 일컬어졌는데, 지금 보건대 권율이 참획한 것이 매우 많으니 그것을 알 수 있겠다.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선조 수정실록 1593년 2월 1일 8번째 기사)
그러면 행주대첩의 승리요인은 무엇인가? 이는 권율의 철저한 방어 준비와 지휘, 그리고 전라도 관군과 의병·승병의 투혼 때문이다. 그런데 행주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변이중이 만든 화차였다. 국방 과학 신무기 화차는 권율 자신 스스로 “행주 전투에서는 진실로 화차에 힘입어 승리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고, ‘간양록’의 저자 수은 강항이 지은 변이중 묘지명에도 ‘중흥의 공은 행주가 제일이고, 화차의 힘이 많았던 것이다’ 라고 하였다. 정조 임금도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때 소모사 변이중이 처음으로 화차를 만들어 한 차에 총구 40개를 뚫어서 연속발사가 되게 했다. 전라순찰사 권율의 행주대첩은 이 화차에 힘 입은바가 크다”했다.
(홍재전서 권 13 군기인 軍器引 )
주1) 1592년 7월 8일 이치전투에서 승리한 광주목사 권율은 9월에 전라 도 관찰사로 승진하였다. 이러자 권율은 서울 수복을 위해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서울로 향했다.
주2) 79세의 노장(老將) 정걸은 경상우수사 ·전라좌수사 ·전라병사를 두루 역임한 장수로서,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조방장으로서 1592년 9월 1일 부산포 해전에서 공을 세워 충청수사가 되었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한창 싸울 때 화살이 거의 다 되어 진중이 위태롭고 답답하였는데 정걸이 배 두 척에 화살을 실어 바다로부터 성중에 들여와서 이어 쓰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1593년 2월 1일 자 선조수정실록에는 ‘화살이 거의 떨어지려 할 때 경기수사 이빈(李蘋)이 배로 수만 개의 화살을 실어다 대주었다.’고 적혀 있다.
어느 기록이 옳고 그르냐를 따지기 전에 경기수사 이빈과 충청수사 정걸 모두 한강 하류에 진을 치고 있었기에 화살 보급은 두 사람의 공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전쟁기념관, 임진왜란과 권율장군, p 112)
(참고문헌)
o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
o 김성한, 7년 전쟁 4, 산천재, 2012
o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2, 온새미로, 2013
o 김영진, 임진왜란 2년 전쟁 12년 논쟁,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21
o 이장희 외 3인, 망암 변이중 연구, 삼우사, 2003
o 정명섭 외 4인, 조선전쟁 생중계, 북하우스, 2011
o 전쟁기념관, 임진왜란과 권율장군 - 충장공 권율 도원수 서거 400주년 학술회의 논문집, 전쟁기념관,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