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평양성 탈환과 벽제관 전투
- 작성일
- 2022.10.22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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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35회 평양성 탈환과 벽제관 전투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조명연합군, 평양성을 탈환하다.
1593년 1월 8일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1592년 12월 25일에 명나라 도독동지(都督同知) 이여송이 4만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1) 이여송은 전군을 3군으로 편성하여 좌협대장(左協大將)에 부총병 양원, 중협대장(中協大將)에 부총병 이여백, 우협대장(右協大將)에 부총병 장세작을 임명하였다.
이여송은 의주에서 선조를 접견한 뒤 12월 28일에 현지를 출발하여 1월 1일에 안주까지 진군하였다.
평양성 전투는 조명연합군 5만 3천 명(이여송의 명군 4만 3천 명, 조선군은 승군 2천명을 포함하여 1만명)과 고니시의 일본군 1만 5천명이 1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싸운 전투이다. 이를 살펴보자.
1월 6일
평양성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여송은 곧바로 평양성 밖에 이르러 본성(本城)을 포위하였다. 명군이 평양성 아래로 바짝 진격하여 잇달아 대포를 발사하자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2)
이러자 왜적 2천여 명이 성 북쪽의 모란봉으로 올라가 청기(靑旗)와 백기를 세우고 함성을 지르며 조총을 쏘았고, 왜적 1만여 명은 성위에서 조총으로 응사했다. 이러자 명군은 군사를 거두어 진영으로 되돌아왔다.
이 날 밤, 왜적 3천여 명이 몰래 나와 명군의 진영을 습격했다. 왜군의 습격을 예상했던 명군은 일제히 화전(火箭 불화살)을 쏘았다. 왜군은 성안으로 물러났다.
1월 7일
명군은 평양성 보통문으로 다가갔는데 왜군이 총격을 가하자 명군은 퇴각하여 왜군을 유인하였다. 이 꾀에 걸려든 왜군은 명군을 추격했다.
명군은 군사를 다시 돌려 왜군 3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런 소규모 전투가 하루 종일 벌어졌다. 7일 저녁에도 왜적 약 8백여 명이 명군 진영을 습격했으나 격퇴당했다.
1월 8일
이여송은 전군을 동원하여 평양성을 포위했다. 부총병 사대수와 유격장군 오유충은 모란봉, 부총병 양원과 장세작은 칠성문(평양성의 북문), 부총병 이여백과 참장 이방춘은 보통문(普通門), 부총병 조승훈과 유격 낙상지는 평안병사 이일과 방어사 김응서를 거느리고 함구문(含毬門 평양성의 남문)을 공격했다. 3)
이여송은 친병(親兵) 백여 기를 거느리고 평양성 아래로 진격한 후에 대포 1호를 발사했다. 이를 신호로 각 진에서도 일제히 대포와 화전(火箭)을 발사했다. 화전 하나가 밀덕(密德) 토굴에 닿자 조금 뒤에 붉은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으며 불길이 번져 토굴은 거의 탔다.
이어서 이여송은 모든 군사를 격려하여 성에 올라가게 하니 왜군은 성안에 엎드렸다가 조총을 난사하고 끓는 물을 퍼붓고 돌덩이를 떨어뜨렸다.
왜군이 죽기로써 항거하자, 명나라 군사는 약간 물러섰다.
이여송은 퇴각하는 명군 1명을 참하여 군중(軍中)에 보이고 외치기를, “제일 먼저 올라간 자에게는 은 50냥을 준다.”하니 제일 먼저 절강성 병사가 올랐다. 이어서 낙상지ㆍ오유충 등의 군사들이 기어올라 힘써 싸우니 왜군이 견디지 못하였다.
이윽고 이여송과 장세작의 병사들이 대포를 쏘아 공격하여 칠성문의 문루(門樓)를 깨뜨리고 성안으로 들어갔고, 이여백은 함구문으로, 양원은 보통문으로 앞다투어 들어갔다.
이 때 고니시는 연광정의 토굴에 피신했는데, 칠성문과 보통문의 토굴에 진을 친 왜군이 거세게 저항하였다. 이러자 명군 사상자가 속출하였으며 이여송이 탄 말도 총탄에 맞았다.
여기에서 이여송은 전략을 바꾸었다. 그는 왜병에게 항복한 절강 사람 장대선을 붙잡아다가 왜진에 보내어 “우리 병력으로 너희들을 모조리 없애버릴 수 있으나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어 너희들의 살 길을 열어주는 것이니 속히 물러가라”고 타일렀다. 이에 고니시는 꼭 물러갈 터이니 청컨대 뒷길을 끊지 말아 주라 하였고, 이여송은 이를 허락하였다.
고니시는 잔류병력을 이끌고 밤중에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황해도 봉산으로 패주하였다. 1월 17일에 고니시와 구로다·고바야카와의 왜군은 모두 서울로 진영을 옮겼다.
평양성 전투로 조명연합군은 왜군 1,285급을 참획했고 말 2,985필에 군기(軍器) 45,002건을 노획하였으며, 조선인 포로 1,015명을 구출하였다.
# 명군, 벽제관 전투에서 패전하다.
평양성을 탈환한 이여송은 승승장구하여 1월 10일 밤에 개성에 진을 쳤다. 명군이 개성에 들어 왔다는 정보를 입수한 서울의 왜군은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이여송이 임진강을 건너 파주(坡州)에 닿은 것은 26일이었다.
이 날 가토 미츠야스의 척후 부대가 파주의 고양 근처까지 정찰을 나갔다.
그런데 사대수·조승훈의 정기(精騎) 3천여 명이 고언백과 함께 가다가 영서역(迎曙驛) 앞에서 왜군을 만났다. 사대수는 적을 급습하여 수급 60여 급을 베었는데, 이 일로 명군은 왜군을 적을 가볍게 보았다.
1월 27일 이른 아침에 이여송은 사울로 가는 진격로를 살피기 위해 많지 않은 병력으로 벽제(경기도 고양시)로 향했다.
한편 왜군은 대군을 이끌고 숫돌고개(여석현 礪石峴)에 진을 구축했다. 사대수는 적병의 형세가 큰 것을 보고 벽제로 물러나 진을 쳤는데 왜군은 산과 들에 흩어져서 점점 압축해 왔다.
그런데 이여송은 노상에서 고언백의 군관을 만나 적군을 형세를 자세히 듣고 벽제로 달려가다가 말이 거꾸러지면서 떨어져 얼굴을 다쳤다.
이 날 오전에 왜장 고바야카와는 군사를 3개로 나누고, 한 개 부태를 망객현에 배치하여 약한 듯이 보이게 하고, 한 부대는 망객현 동쪽 구릉에, 나머지 부대는 서쪽 구릉에 매복시켰다.
이윽고 이여송의 명군이 돌입하였다. 이때 이여송 부대는 남군 포병(砲兵)은 아직 도착하지 않아 화기(火器)가 없었고, 휘하의 정기(精騎) 1천여명만 있었다.
미리 배치한 왜군 복병이 명군을 둘러쌓다. 명군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고바야카와의 선봉에 섰던 이노우에 고로베의 기병 3천 명이 이여송을 향해 돌격하였다.
왜군이 명군을 마구 살상하니 전사자가 수백 명이었고, 이비어(李備禦)와 마천총(馬千摠)이 죽음을 당했다. 형세가 위급하게 되자 이여송은 파주로 도주했다. 왜군은 명군을 혜음령까지 추격했으나 양원이 포병을 인솔하여 오는 것을 보고 추격을 멈췄다.
벽제관에서의 명군 패배는 서울 회복을 기대했던 조선측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벽제관 패전이 있은 다음 날 류성룡등이 이여송에게 다시 진격해주길 요청했지만 이여송은 동파로 물러가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군사는 어제 왜적을 이겼을 뿐 별로 패한 일이 없다. 동파로 돌아가 머물면서 며칠 동안 군사를 쉬게 한 뒤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진군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본국에 보고한 이여송의 보고서에는 “서울에 있는 적병이 20여만명이나 되어 중과부적이고 (중략) 신의 병이 심하여, 다른 장수를 대신 파견해 주길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이여송은 전진할 생각 없이 군사를 인솔하여 평양으로 돌아갔다. (선조수정실록 1593년 2월 1일 6번째 기사)
이처럼 중국 장수들은 벽제관에서 패전한 후로 중국 장수들은 싸울 의욕이 없고, 제독 이여송은 오직 철군하여 돌아갈 생각만 하였다. (선조실록 1593년 4월 1일)
주1) 이여송은 10만의 군사로 영하(寧夏)의 적(賊)인 유동양(劉東暘)ㆍ패승은(孛承恩) 등을 토멸하고 막바로 왜군 정벌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그의 조상은 조선인이었다. 그의 조부는 조선 이산(理山) 땅 독로강(禿魯江)에서 살았는데 어떤 일로 사람을 죽이고 중국으로 도망했다. 이여송의 아버지는 이성량으로 광녕총병(廣寧摠兵)이었다. 이여송의 아우 여백(如栢)ㆍ여장(如樟)ㆍ여매(如梅)ㆍ여오(如梧)ㆍ여정(如楨)도 벼슬이 총병에 이르러 가문이 빛났다.
주2) 명나라가 쏜 대포중에는 불랑기포도 포함되어 있다. 불랑기(佛狼機)는 게르만족의 한 갈래인 프랑크(Frank)족을 음차한 것인데, 당시 이 대포를 전해준 마카오 거주 포르투갈인들을 중국은 ‘불랑기’라고 불렀다.
주3) 평양성 전투에는 평안도 방어사 김응서(金應瑞 1564~1624)의 애첩인 평양기생 계월향(桂月香) 이야기가 전해진다.
기생 계월향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에게 잡혀 총애를 받았다. 그녀는 깅응서를 오빠라 속이고 김응서를 자주 출입하게 하거, 왜군의 정보를 빼돌렸다. 그런데 왜군이 이를 눈치채자 김응서는 고니시의 부장을 죽이고 계월향과 같이 도망치다가 계월향은 왜군의 추격에 평양성을 넘지 못하고 죽었다.
남쪽에 논개가 있다면 북쪽에 계월향이 있다. 만해 한용운은 ‘계월향에게’라는 시를 남겼다. 1962년에 박종화는 ‘논개와 계월향’이라는 소설을 지었고, 1977년에는 임권택 감독이 ‘임진왜란과 계월향’이라는 영화도 만들었다.
지금도 평양에는 계월향이 살던 곳을 월향동으로 이름 짓고 대동문 가까이에 의렬사를 지어 계월향을 추모하고 있다. (리명숙 외, 조선의 력사인물 2, 고등교육도서출판사, 2002, p 225-233)
(참고문헌)
o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
o 리명숙 외, 조선의 력사인물 2, 고등교육도서출판사, 2002
o 유성룡 저·김문수 엮음, 징비록, 돋을새김, 2009
o 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을유문화사, 2014
o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1,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 한길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