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부산포 해전
- 작성일
- 2022.10.18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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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33회 부산포 해전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592년 7월 한산과 안골포 해전에서 크게 패한 일본 수군은 부산 본영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7월 13일에 전라좌수영 본영(여수)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잠깐의 휴식을 취한 후에 곧바로 왜군의 심장부인 부산 공격 준비를 한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합동훈련을 하자고 전갈을 보냈다. 8월1일부터 전라 좌·우 수군은 전라좌수영 본영에 모여 맹훈련을 하였다. 출전에 앞서 전라 좌·우 수군이 합동훈련을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함선도 증강되었다. 전선 74척(거북선 2척 포함)과 협선 92척 모두 166척이었다. 전선은 한산 해전 때의 52척보다 40% 늘어났다. 전선감조군관 나대용의 활약이 컸다.
그런데 합동훈련 중에 이순신은 경상우도 순찰사 김수로부터 공문을 받았다.
“육상으로 진군한 왜적들이 낮이면 숨고 밤이면 행군하여 양산 및 김해 강(金海江) 등지로 잇따라 내려오는데, 짐짝을 가득히 실은 것으로 보아 도망치려는 낌새가 현저하다.”
8월 24일에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등과 배를 띄워 조방장 정걸과 함께 출전하여 남해땅 관음포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 1)
8월 24일의 난중일기’를 읽어 보자.
“24일 맑다. 객사 동헌에서 조방장 정걸과 아침을 먹고, 곧 침벽정으로 갔다. 우수사(이억기)와 점심을 먹었는데 정 조방장도 함께 했다. 오후 4시쯤 배를 출발시켰다. 노질을 재촉해 노량 뒷 바다에 닻을 내렸다. 자정에 다시 달빛을 타고 배를 움직여 사천 모사랑포에 이르렀다. (후략)”
전라좌우수군은 8월 25일 사량도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고, 당포에서 하룻밤을 잤다. 26일은 거제도 앞바다에서, 27일에는 원포(창원시 진해구 원포동)에서 밤을 지냈고, 28일에는 가덕도에서 잤다.
8월 29일 조선함대는 가덕도를 출발하여 양산, 김해 앞바다에 도착하였는데, 동래 땅 장림포 앞바다에 왜적 300명이 큰 배 4척과 작은 배 2척에 나누어 타고 양산으로부터 나오다가 우리 군사를 보고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하였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그들을 깨트리고 불태웠다.
이후 조선 연합함대는 군사를 좌우로 나누어 그곳으로 들어가려 하였지만 강 폭이 좁아서 판옥선이 들어가서 싸울 수 없기에,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에 가덕도 북쪽으로 돌아와서 밤새워 원균, 이억기 등과 작전을 상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순신은 “부산은 적의 근거지가 되었으니 그 소굴을 없애버려야만 적의 간담을 꺾을 수가 있을 것이다”하여 이번 작전의 중요성을 다시금 밝혔다.
9월 1일 첫닭이 울자 연합함대는 부산포로 향하였다. 아침 8시경 몰운대(歿運臺)를 지날 무렵에 갑자기 동풍이 일고 파도가 거세어 배를 부리기가 어려웠다.
이순신은 간신히 배를 저어 몰운대를 돌기 직전, 화준구미에서 왜군의 대선 5척을 만나 모두 분멸했다. 다대포(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앞바다에 이르러서는 왜선 8척을 만나 역시 분멸하고,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여 다대포 옆의 서평포(부산시 사하구 구평동)에서 9척을 만나 모두 분멸했다. 이어서 부산포 앞에 위치한 절영도(부산시 영도)에서 왜선 2척을 만났는데 모두 기슭에 줄지어 정박하여 있었다. 연합함대는 왜적의 배들을 남김없이 격파하였다. 2)
이어서 연합함대는 절영도 안팎을 샅샅이 뒤졌으나 왜적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작은 배를 부산 앞바다로 급히 보내어 왜적의 배들을 탐망하게 하였더니 ‘약 500여 척의 배들이 선창 동쪽 산기슭 언덕 아래 줄지어 정박해 있고, 선봉 왜대선 4척이 초량 쪽으로 나오고 있다’는 첩보를 보냈다.
이순신은 곧 원균·이억기 등과 상의하기를 “우리 군사의 위세를 가지고 만약 지금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간다면 적들은 반드시 우리를 멸시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독전기(督戰旗)를 휘두르며 진격하였다.
우부장 녹도 만호 정운, 거북선 돌격장 신의 군관 이언량, 전부장 방답 첨사 이순신, 중위장 순천 부사 권준, 좌부장 낙안 군수 신호 등이 앞장서서 곧바로 돌진하여 왜적의 선봉 대선 4척을 우선 때려 부수고 불태워버렸다.
그러자 왜적들은 헤엄을 쳐서 육지로 올라갔고, 뒤에 있던 조선 함선들은 승세를 타서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면서 장사진(長蛇陣긴 뱀이 앞으로 나아가는 모양)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이때, 왜군의 배들은 부산진성 동쪽에 있는 한 산으로부터 5리쯤 되는 언덕 밑 세 군데에 정박해 있었다. 큰 배, 중간 배, 작은 배, 모두 합쳐 470여 척쯤 되었다. 그런데 왜군들은 우리의 위세에 겁을 먹고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조선 연합 함대는 곧장 앞으로 돌진하여 쳐들어가자 왜선에 있던 왜군들과 산 위의 소굴 속에 있던 왜적들은 모조리 산으로 올라가서 여섯 군데로 나누어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총알과 화살을 마치 비오듯 우박 쏟아지듯 쏘아댔다. 그런데 편전을 쏘는 것은 조선 사람인 것 같았으며, 대철환도 쏘았는데 그 크기가 모과만하며, 수마석(수마석)을 쏘기도 하였는데 크기가 주발덩이 만한 것이 조선 함선에 많이 떨어졌다.
하지만 조선의 장수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천자포, 지자포, 장군전, 피령전, 장편전, 철환 등을 일제히 쏘아대며 하루 종일 맞붙어 싸워 왜선 100여 척을 때려 부수었다.
왜적들은 토굴 속으로 도망하였다. 조선 함대는 여러 배에서 용사들을 뽑아 육지로 올려보내 왜적을 모조리 섬멸하고 싶었으나, 성 안팎 6, 7군데에 진을 치고 있는 수 많은 왜적들이 말(馬)을 타고 용맹을 과시하고 있었다. 말도 없는 수군을 경솔하게 육지로 보내는 것은 만전의 계책이 아니고, 날도 이미 저물어서 부득이 배를 돌려 한밤중에 가덕도로 돌아와서 밤을 지새웠다.
조선 연합함대는 다음날인 9월 2일에 되돌아가서 왜군을 쳐부술 생각을 하였으나 육지로 올라간 왜군들이 예상보다 많아 조선수군과 육군이 함께 공격하여야만 섬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풍랑이 거세어 함선이 서로 부딪쳐서 파손된 곳이 있었고 군량도 충분하지 않아 진을 파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부산포 해전은 어느 해전보다 성과가 큰 전투였다. 1592년 9월 17일에 올린 이순신의 장계를 읽어보자.
“그동안 전후로 4차례 출전하여 10번 싸워서 모두 승리하였으나, 장수와 군사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포 싸움보다 더 큰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전에 서로 싸울 때는 적선이 많아도 70여 척에 불과했으나, 이번에는 적의 소굴로 들어가 정박하여 있는 470여척의 왜선 중에서 100여척을 때려 부수어 적들의 간이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실록은 부산포해전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고 있다.
1592년 8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을 읽어 보자.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왜병이 해상의 전투에서 여러 번 패하자 부산·동래에 모여 웅거하면서 전함을 벌여놓고 항구를 지켰다. 이순신이 원균과 함께 수군을 총동원하여 진격하였으나 적이 군사를 거두고 전투에 응하지 않고 높은 곳에 올라가 총을 쏘므로 수군이 육지로 오르지 못하고 빈 배 400여척만 태워버리고 퇴각하였다. 3) 이때 녹도 만호 정운이 앞장서서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는데 이순신이 애통해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끝부분에 나오듯 녹도만호 정운이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한 것은 큰 손실이었다.
이순신은 1592년 9월 11일에 정운을 이대원의 사당에 배향하기를 청하는 장계를 올렸고 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정운은 고흥 쌍충사에 배향되었다. 이후 정운이 병조참판에 추증되자 이순신은 손수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 주었다. 4)
한편 이순신은 장계에 접전할 때 사상자를 일일이 적었다.
전사자는 5명(방답 1호선 1명, 여도선 1명, 사도 3호선 1명, 본영 한후선 2명)으로 이들은 철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부상자는 25명으로 본영 지휘선 3명, 본영 한후선 3명, 본영 거북선 2명, 여도선 2명, 사도 1호선 4명, 흥양 1호선 1명, 본영 우후선 1명, 방답 1호선 2명, 방답 거북선 3명, 보성선 1명 등 22명은 철환을 맞았고, 본영지휘선 1명, 방답 거북선 2명 등 3명은 화살을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 않았다. 5)
이순신은 전사자는 배에 싣고 돌아가서 장사 지내주고 전사자 가족은 구휼법에 따라 구휼 조치하고, 부상자는 약물을 주어 충분히 치료토록 하였다.
부산시는 부산포 해전 승전일인 양력 10월 5일(음력 9월1일)을 부산 시민의 날로 지정하고 기리고 있다. 부산포해전은 이후 전쟁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일본의 수륙병진 전략은 완전히 무너졌다.
주 1) 부산 섬멸 작전은 조방장 정걸(丁傑, 1514~1597)이 도맡았다. 정걸은 이순신에게 부산이 지금 적의 소굴이 되어 있는데 여기를 친다면 적을 필시 깨트릴 수 있을 것이라고 건의하였고, 이순신은 그의 말을 따랐다. 이는 '호남절의록'에 나온다.
정걸은 이순신보다 나이가 30살이나 많은 팔순을 바라보는 백발장군이었다. 그는 이미 경상좌수사, 전라좌수사, 전라우수사, 전라병사를 역임한 백전노장 이었다.
주2) 연합함대가 부산포 쪽으로 이동하며 태워버린 일본 군선들은 모두 해전을 회피하려고 도주하는 함선들이었다.
주3) 선조수정실록에서 400여 척을 불태웠다는 것은 오기(誤記)이다. 100척이 맞다.
주4) 이순신이 손수 지은 제문(祭文)이다. (박기봉, p 426-428)
아,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사는 데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이야 정말로 아까울 게 없으나
유독 그대의 죽음에 대해서만 나의 가슴 아픈 까닭 무엇인가요.
(중략)
네 번이나 싸워 이겼으니 그 누구의 공이었는가
종묘사직 회복 함도 몇 날 남지 않을 듯 하였을 때
어찌 알았으랴. 하늘이 돕지 않아 적의 총알에 맞을 줄을
저 푸른 하늘이시여, 당신의 뜻은 참으로 알기 어렵나이다.
(중략)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그 재주 다 못폈을 때 지위는 낮았으나 덕은 높았으니
나라의 불행이고 군사들과 백성들의 목 없음이로다.
그대 같은 충의(忠義)야말로 고금에 드물었으니
나라 위해 던진 몸 죽었으나 오히려 살아 있음이어라.
아 슬프다. 이 세상에 그 누가 내 마음 알아주랴
슬픔 머금고 극진한 정성 담아 한 잔 술 바치오니
아, 슬프도다.
한편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몰운대에는 정운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순의비가 세워져 있다.
주5) 방답 거북선의 부상자가 5명이나 된 것은 눈 여겨 볼 부분이다.
거북선은 2차 해전때는 사상자가 한명도 없었지만, 3차(한산)와 4차 해전(부산포)때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 참고문헌 )
o 김영진, 임진왜란 2년 전쟁 12년 논쟁,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21
o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제1권, 비봉출판사, 2006
o 이순신 지음·조성도 역, 임진장초, 연경문화사, 1997
o 김종대,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가디언, 2012
o 김태훈 지음,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일상이상, 2014
o 박종평, 이순신, 지금 우리가 원하는, 꿈결, 2017
o 신호영, 이순신의 전쟁, 돋을새김, 2012
o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