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경주성 탈환과 비격진천뢰
- 작성일
- 2022.10.18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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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32회 경주성 탈환과 비격진천뢰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명군의 평양성 공격 패전
1592년 7월 17일 요동 부총병 조승훈 ·유격 사유 등이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머물고 있는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패전하였다. 평안북도 가산에 진을 친 조승훈의 명군은 여진족과의 전투로 단련된 기병이었는데 일본군을 가볍게 보고 있던 데다 평양에 주둔한 왜군이 많지 않다는 소문을 듣고 평양으로 달려갔다.
조승훈은 자정을 넘긴 3경에 출진하여 곧바로 평양성 밖까지 육박하였는데 도원수 김명원은 병력 3천명을 이끌고 뒤따랐다. 이때 김명원은 ‘쏟아진 폭우로 길이 미끄러우니 급하게 공격하여서는 안 된다’고 조승훈에게 충고했지만, 조승훈은 이를 무시하고 선봉장 사유와 함께 칠성문 공격을 감행했다. 이러자 고니시의 왜군이 좌우에서 일제히 조총을 쏘아댔다. 게다가 명의 군사들과 말이 모두 진흙에 빠지고 미끄러졌고 선봉장 사유·천총 장국충 · 천총 마세융이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으며 후미의 군사들 대부분이 살상을 당하였을 정도로 대패하였다.
급히 퇴각한 조승훈은 대정강(大定江)에 도착하여 하루 만에 요동으로 철수해 버렸다. 그런데 조승훈은 명군이 평양성 전투에서 패전한 것은 조선의 군사 일부가 왜군에 투항했기 때문이라고 무고하는 등 패전의 책임을 조선 측에 전가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은 심희수·윤두수 등을 요동 총병 양소훈 진영에 파견하여 적극 해명하는 동시에 평양성을 다시 공격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명나라는 파병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한편 조승훈의 패전 소식이 전해진 뒤 명의 충격은 매우 컸다. 당시 명의 국내 사정은 임진왜란 이외에도 삭녕의 변이라는 또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8월에 명나라는 병부우시랑 송응창(1536-1606)을 경략방해비왜군무(經略防海備倭軍務 약칭 경략)로 임명하고(송응창, p 24-25), 산동·요동·통주 등 12개 도에 총동원령을 내려 왜군 침략에 대한 철저한 방어책을 강구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은 명군의 급습을 받고 착잡하였다. 조선 전역에서 확산된 의병 봉기와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인해 전세(戰勢)가 꼬인 상황에서, 예상외로 빠른 명군의 개입에 크게 당황한 것이다.
# 영천성과 경주성 탈환
7월 들어 경상좌도 의병의 반격이 본격화되었다. 7월 28일에 의병장 권응수가 영천성을 탈환하였고 9월에는 경상좌병사 박진이 경주성을 탈환한 것이다.
먼저 영천성 탈환부터 살펴보자. 경상좌수사 박홍의 막하에 있던 별장 권응수는 고향 영천으로 돌아가 의병 활동을 하다가 연합의병장이 되어 정대임·정세아·조성·신해가 이끄는 의병 4천 명과 함께 영천성을 공격했다. 제5군 후쿠시마 마사노라 소속 왜군 1천 명은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권응수는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 화공(火攻)으로 왜적을 죽이니 5백여 명이 죽고 탈출한 자는 겨우 수십 명이었다. 아군 사망자는 83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자 안동 이남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이 모두 상주로 내려갔고 경주성 탈환도 가능해졌다.
1592년 8월 1일의 ‘선조수정실록’을 읽어보자.
“별장 권응수가 영천의 적을 격파하고 그 성을 회복하였다.
당시 왜적 1천여 명이 영천성에 주둔하여 안동에 주둔한 적과 서로 응하여 일로(一路)를 형성하고 있었다. 영천의 사민(士民)이 여러 곳에 주둔한 의병과 연결하여 공격하기 위해 박진에게 원조를 요청하자, 박진이 별장인 주부 권응수를 보내어 거느리고 진군하여 공격하게 하였다. 권응수가 의병장 정대임·정세아·조성·신해 등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군하다가 영천의 박연(朴淵)에서 적병을 만나 격파하고 그들의 병기와 재물을 거두었다.
이에 여러 고을의 군사를 모아 별장 정천뢰 등과 함께 진군하여 영천성에 이르니 왜적이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권응수가 군사를 합쳐 포위하고 성문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권응수가 큰 도끼를 가지고 먼저 들어가 적을 찍어 넘기니 여러 군사들이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였다. 적병이 패하여 관아의 창고로 들어가자 관군이 불을 질러 창고를 태우니 적이 모두 불에 타서 죽었고, 도망쳐 나온 자도 우리 군사에게 차단되어 거의 모두 죽었으며, 탈출한 자는 겨우 수십 명이고 머리를 벤 것이 수백 급(級)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성을 수복하여 아군의 위세가 크게 떨쳐졌다. 안동 이하에 주둔한 적이 모두 철수하여 상주로 향하였으므로 경상좌도의 수십 고을이 안전하게 되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권응수는 통정대부에 가자(加資)되고 방어사가 되었으며, 정대임은 예천 군수가 되었다. ”
다음은 경상좌병사 박진의 경주성 탈환이다. 8월 20일에 경상좌병사 박진 등이 경주 적을 포위하여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왔다. 권응수가 화공(火攻)으로 왜군을 격퇴하고 영천성을 되찾는 것을 본 경상좌병사 박진은 용기백배하여 열여섯 고을의 군사 1만여 명을 합쳐서 권응수로 선봉을 삼고 곧장 경주의 적에게 육박하였다. 그러나 적이 먼저 길 아래 산골짜기에 군사를 잠복시켰다가 전투가 한창 어우러졌을 때 뒤에서 돌진해 들어왔다. 이에 관군이 크게 패하여 전사한 자들이 즐비하였고 박진 등은 도망쳐서 돌아왔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8월 1일 18번째 기사)
9월 초에 박진은 다시 경주성 탈환에 나서 성공하였다. 1592년 9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 실려 있다.
“박진이 경주를 수복하였다. 박진이 앞서 패하였다가 다시 군사를 모집하여 안강현(安康縣)에 주둔하다가 밤에 몰래 군사를 다시 진격시켜 성 밖에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성 안으로 발사하여 진 안에 떨어뜨렸다.
적이 그 무기를 몰랐으므로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보는 중에 포(砲)가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 이에 맞아 넘어져 즉사한 자가 20여 명이었는데, 온 진중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신비스럽게 여기다가 이튿날 드디어 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도망하였다. 박진이 드디어 경주에 들어가 남은 곡식 만여 석을 얻었다. 일이 알려지자, 박진은 가선 대부로 승진하였다.
비격진천뢰는 이런 무기가 옛날에는 없었는데,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진천뢰(震天雷)를 대완포구(大碗砲口)로 발사하면 5백∼6백 보를 날아가 떨어지는데, 얼마있다가 화약이 안에서 폭발하므로 진을 함락시키는 데는 가장 좋은 무기였으나 그 뒤에는 활용하는 사람이 없었다.(飛擊震天雷, 古無其制, 火砲匠李長孫者創出。 取震天雷, 以大碗砲口發之, 能飛至五、六百步墜地, 良久火自內發, 最好陷陣, 而後無用之者)”
사관의 사평(史評)은 화포장 이장손이 비격진천뢰를 처음 만들었고, 성능이 아주 대단한 무기이며, 무슨 까닭인지 그 뒤로는 활용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비격진천뢰가 사라진 데 대한 안타까움은 신경의 ‘재조번방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신경은 '왜적이 이것을 가장 두려워하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제작하는지도 모르니 탄식할 일이다.'라고 썼다.
주1) 조선의 비밀병기 비격진천뢰는 최첨단 과학 무기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된 비격진천뢰(보물 제860호)는 지름 21㎝, 둘레 68㎝이다.
한편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비격진천뢰가 떨어질 때의 광경을 자세하게 묘사해놓았다.
“비격진천뢰가 성안으로 들어가 객사 뜰에 떨어지니 그 원리를 알지 멋하는 적은 앞다투어 몰려들어 구경하고 서로 굴리고 살펴보았다. 얼마뒤에 갑자기 포가 폭발하자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흩어지니 이를 맞고 즉사한 자가 30여명 되었다. 맞지 않는 자들도 쓰려 졌다가 한참 뒤애야 일어났다. 이튿날 아침 적병이 성을 비운 채 서생포로 달아나 버렸다. ... 예전에는 비격진천뢰라는 것이 없었으나, 군기시 화포장 이장손이 발명하였다. 진천뢰를 대완구(대포)에 넣어 쏘면 500~600보를 날아가며, 땅에 떨어지고 나서 한참 있으면 화약이 안에서 폭발하니 왜적들은 이 무기를 가장 무서워했다.”(류성룡 저·김시덕 역해, p 348-349)
(참고문헌)
o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
o 김영진, 임진왜란 2년 전쟁 12년 논쟁,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21
o 류성룡 저·김시덕 역해, 교감·해설 징비록, 아카넷, 2013
o 송응창 지음·구범진외 7명 옮김, 명나라의 임진전쟁 1 출정전야, 국립 진주박물관, 2020
o KBS 임진왜란 1592 제작팀 지음· 글 양선비 , 임진왜란 1592 - 동아시아 질서를 뒤바꾼 삼국 전쟁의 시작, 웅진지식하우스, 2022